영덕의 첫 들머리 푸른 바다아름다운 해변이 일품인 고장
영덕군 최남단에 위치한 남정면역사가 살아 숨쉬고 석양노을이참 아름답다 달님도 고개숙인다
영덕군은 동해를 끼고 있는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해변이 일품인 고장이다. 해맞이 명소이다.
승용차로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장사해수욕장이다. 사실상 영덕의 들머리이다. 쏟아지는 햇살과 너울대는 파도, 사각거리는 모래, 울창한 솔숲을 두루 갖춘 해수욕장이다. 장사상륙작전의 현장이 바로 장사해수욕장이다.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석양 노을이 참 아름다운 고을이 바로 남정면이다. 남정면은 대한민국 경북 영덕군의 면이다. 넓이는 73.28㎢고, 인구는 2025년 5월 기준 2203명이다.
영덕군의 9개 읍면 중에서도 3번째로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면 소재지는 장사리, 담당 법정리는 15개이다. 영덕군 최남단에 위치한다.
군내 대부분의 읍면이 처한 현실과 같이 면적의 83.5%가 임야이다. 이들 임야에서 산출되는 송이버섯은 지역민들의 소득창출에 큰 보탬을 주고 있지만 임야의 활용도는 낮은 편이다. 지역의 장기적인 발전에 있어서 이들 임야의 이용 방안 모색이 지역경제의 발전에 돌파구를 마련해 줄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논이 6.95%, 밭이 3.1%를 차지한다. 남정면은 논 면적이 밭 면적보다 다소 높다.
남정면의 리별 단위면적은 회 1.2.3리가 면내에서 제일 큰 면적을 차지한다. 사암 1.2리가 두 번째로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남호리가 제일 작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동리이다.
남정면은 장사해수욕장으로 유명하다. 7번 국도를 통해 포항시와 접한다. 6.25 전쟁 중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된 곳이기도 하다.
남정면의 토산물은 바다의 해산물로는 미역, 김, 전복, 해삼, 문어, 삼치, 방어, 광어, 우럭, 홍합, 백합, 가자미, 오징어, 숭어, 전어, 학꽁치, 보리멸, 멸치 등이 있다.
육지의 농산물로는 벼, 보리, 조, 수수, 옥수수, 콩, 팥, 녹두, 고구마, 감자 등이 있다. 채소류에는 배추, 무, 고추, 마늘 등이 있다. 과실류에는 사과, 배, 복숭아, 감 등이 있다. 특산물에는 부추, 참깨, 들깨, 땅콩, 담배, 송이, 은어, 미꾸라지 등이 있다.
● ● 영덕의 중심 남정면
남정면은 조선 시대 영덕 현의 외남면이다.
1789년의 호구 총수에 의하면 외남면에 속한 동리로는 △남역리 △역전리 △역전 해리 △구배육리 △구배해리 △원척육리 △원척해리 △비물육리 △비물해리 △신흥육리 △신흥해리 △자부랑리 △장사육리 △장사해리 △고부육리 △고부해리 △지경육리 △지경해리 △골곡리 △사라동리 △쟁암리 △동동리 △도천리 △소근동리 △다사라리 △고만당리 △영귀동리 △사동리 화무동리의 29개의 리로 이뤄졌다.
1896년에 발간된 영덕읍 지부 사례에 따르면 구계, 도천, 덕성, 원척, 적암, 다사, 쟁암, 비물, 자부랑, 신흥, 장사, 두천, 오산, 고부, 지경, 봉전, 동동, 양성, 상회, 하회, 남호, 남역, 상화, 하화, 원동, 우곡, 원구의 27개 동으로 기록됐다.
1899년 경북도영덕군읍지에는 남역, 역전리, 구배리, 원척리, 비물리, 신흥리, 자부랑리, 장사리, 고부리, 두천리, 원(완)진리, 지경리, 다사라, 도천리, 쟁암리, 동동, 적암리, 덕성리, 고만당, 화무동, 익동리, 사동리, 골곡, 와화의 24개의 동으로 구성됐다. 이후 두천·원직리가 장사리에 합쳐졌다. 덕성이 도천에, 익동이 화무에 합쳐지면서 1914년의 부군면 폐지까지 20개 동으로 구성됐다.
1914년의 부군도 통폐합 때에는 구계동, 원척동, 부흥동(원척리, 비물리, 신흥리, 자부랑리의 일부를 통합), 장사동(두천동, 오산동, 신흥동 일부를 통합), 부경동(고부, 지경), 회동(골곡, 상회동, 하회동의 일부를 통합), 사암동(다사라, 적암), 쟁암동(쟁암, 동동), 봉전동(와화), 도천동(도천리), 양성동의 11개 동으로 구성, 남정면이라 했다.
1934년 4월 1일에 강구면이 신설되면서 영덕면에 속하였던 남정동(남역), 남호동(역전리), 우곡동(고만당, 원구동), 중화동(사동, 화무, 상화, 하와, 원동의 일부를 통합)의 4개동이 이속, 15개 동으로 남정면을 구성하게 됐다. 1988년 5월 1일에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남정면 영덕군 남쪽 들머리
한 지역의 위치는 기후와 농업, 산업, 역사,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에 있어서 그 지역의 자연과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남정면의 경도와 위도상의 수리적 위치는 영덕군이 차지하고 있는 수리적 위치 안에 들어가 있다. 영덕군이 위도상 북위 36° 15-36° 40’, 경도상 동경 12909- 12927 `사이에 위치, 남정면도 이 범위 안에 그 수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남정면의 남쪽 극점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내연산 자락이다. 서쪽의 극점은 달산면 옥산리와 포항시 북구 죽장면 하옥리와 접하고 있는 해월산(바데산) 부근이다. 북쪽의 극점은 달산면 홍기 2리 오봉산 부근이 된다. 동쪽의 극점은 장사리 와 부경리가 경계하는 지점이 된다.
남정면의 해안선은 면의 남쪽인 부경 2리 앞에서 포항시 북구 송라면 지경리와 경계하며 면의 북쪽인 남호리에서 강구면 삼사리와 경계를 하고 있다. 남정면은 군내의 강구면과 달산면과 접하고 있다. 타 시군으로서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과 포항시 북구 죽장면과 경계를 하고 있다.
교통으로는 부산에서 온성으로 연결되는 국도 7번이 있다. 지방도로는 청송 부남에서 남정면 장사리에 이르는 932번이 있다. 군도로는 장사리에 회리에 이르는 2번, 남호리에서 영덕읍 화개리에 이르는 1번, 사암리에서 남호리에 이르는 18번이 있다. 농어촌 도로는 14개 노선이 있는데, 면도는 2개, 리도는 7개, 농도는 5개가 있다.
남정면은 수리·지리적 위치로 보아 영덕군의 어느 지역보다 포항시에 가깝다.
사회·경제·교육적인 활동면에서 포항권과의 교류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경제·사회적 활동의 참여도에도 이러한 여건이 다소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쨌든 남정면은 영덕군의 남쪽 관문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 ● 남정면 지세·산세
>> 지세
남정면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남으로 달리는 낙동정맥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東)의 지세를 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강구면 서쪽으로는 달산면, 남쪽으로는 포항시 북구 송라면, 서남쪽으로는 포항시 북구 죽장면, 동쪽으로는 동해와 경계를 하고 있다. 따라서 내에는 낙동정맥이 동해를 따라 남으로 달리며 해월봉, 봉황산, 동대산 등의 크고 작은 산을 만들어 주고 있다.
면의 진산(鎭山)인 동대산을 중심으로 회 1. 2. 3리, 양성리, 봉전 1·2리, 쟁암리, 사암 1.2리, 도천리, 우곡리, 중화리, 남정리, 부흥 3리는 해안지역이면서도 바다와 접하지 않는 내륙 동리로 이뤄져 있다.
장사리, 부경 1. 2리, 남호리, 구계리, 부흥 1. 2리는 바다를 접하고 있다. 반농반어의 구조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장사리는 바다와 접하면서도 어선이 있지 않은 유일한 마을이다.
면의 해안 쪽은 부경 1·2리, 장사리 부흥 1·2리, 원척리, 구계리, 남호리는 7번 국도가 지나가는 관계로 교통이 발달했다. 이들 마을은 연안 바다에서 잡아 오는 싱싱한 수산물을 이용한 횟집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해안을 따라 장사해수욕장, 부흥해수욕장, 남호해수욕장 등이 잘 정비돼 있다. 여름 한 철은 물론 사계절 휴양지로 이름이 있어 많은 관광객과 휴양객이 찾아오고 있다.
>> 산세남정면 관내에는 해월봉, 봉황산, 동대산 등외에도 각 마을을 둘러싸고는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이러한 산들은 울창한 숲과 계곡을 만들고 있다. 해월봉과 봉황산, 동대산은 유명하다.
● 해월봉(海月峰)해월봉은 일명, 바데산, 바달기산, 바들기산으로 불리고 있다. 남정면, 달산면, 죽장면에 걸쳐 있다. 높이는 646m로 동대산의 지맥이 뻗어내려 만들어진 산이다.
해월봉이란 이름은 전해오는 말로는 같은 학교의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 1871년 영해 동학 의거를 지도하기 위해 영양과 영해를 들릴 때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유래됐다.
현재는 달산면 옥산 3리에 대부분 속하고 있다. 그 주봉은 남정면 사암 2리 마을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산 정상에는 해당화가 많이 자생한다. 옛날 이 산에 호랑이가 많아 이를 잡기 위한 틀을 많이 놓았다. 범들과 또 은어를 잡아 나라의 임금님께 진상하였다는 직경소가 이 산의 산자락인 달산면 옥계 쪽에 있다.
● 봉황산(山)봉황산은 해월봉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맥이 만든 것으로 남정면의 도천리와 우곡리, 구계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79m이다. 옛날 홍수가 났을 때 봉황이 산 정상에 날아와 앉아 봉황산이라 불리었다.
산 정상에 올라서 보면 남으로는 장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로는 낙동정맥이 물결치듯 남으로 달리는 것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쪽 산 아래는 도천리가 아담하게 터를 잡고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 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던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의 목적으로 감행된 1950년 9월 14일 장사상륙작전을 이 산 정상에 설치한 야포로 LST인 문산호를 공격, 아군의 상륙 작전을 방해하고, 아군의 인명을 희생시켰다.
● 동대산동대산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과 달산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남정면의 진산이다. 높이는 791m로 산 아래는 정암리가 있다. 동대산의 정기가 이 마을 감싸고 있어 군내에서도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산은 예로부터 의병 활동과 관련이 많다. 구한말 영천에서 일어난 산남의진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혼 적이 남아 있다. 의병장인 신돌석 의병장의 흔적도 남아 있다.
산 정상에는 광복정국의 좌우익 갈등과 6.25 한국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현재는 1960년 대간첩 작전을 위하여 국군이 주둔, 돌로 쌓아 놓은 참호와 진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좋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 하천남정면 관내에는 면의 지세에서 알 수 있듯이 길고 큰 하천은 없다. 연중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 대부분이다. 면의 남쪽으로부터 지경천, 장사천, 구계천, 남호천이 있다.
● 지경천(川)지경천은 동대산에서 발원, 회 1, 2~3리를 거처 포항시와의 경계인 이사 앞을 지나 부정 2리 앞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지방 2급 하천이다.
옛날에는 골곡포, 또는 회리천이라고 불렀다. 이 골 곡이란 하천의 이름에서 회리라는 지명이 온 것으로 보인다.
● 부경 온천지경천의 발원지에는 깊은 계곡 사이로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계곡 밑에는 회동저수지 및 수원지가 있어 남부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해주고 있다. 하류 지역에는 온천수가 솟아 나와 부경 지역 온천개발지구로 지정됐다. 현재는 부경 온천이 세워져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있다.
● 장사천 혹은 부흥천장사천은 일명 부흥천으로 불린다. 오래전에는 부홍천으로 불렀으나, 현재의 모든 표기에는 장사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천은 쟁암리에서 내려와 봉전 1·2리를 거치는 한줄기와 해월봉에서 발원, 사암 1. 2리와 도천을 지나 내려오는 한줄기가 봉전2리 마을 앞에서 만난다. 이것이 부흥 3리로 내려오는 원줄기에 동대산에서 발원, 양성리의 쪽지골을 지나 장사들을 적시는 또 한줄기가 부흥 2리 앞에서 만나 동해로 들어간다.
장사천, 일명 부흥천을 중심으로 도천들, 봉전들, 장사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봉전들에는 특용작물인 부추재배가 성행한다. 상류 지역에는 도천저수지가 축조돼 있다. 하류 지역의 농수 공급을 원활히 해주고 있다.
강 하류인 부흥2리와 3리 앞의 냇가에는 해마다 은어가 지천으로 올라와 지역과 타지의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는 명소로 자리를 잡고 있다.
● 구계천구계천은 봉황산과 우곡리 뒷산인 박대산에서 발원, 하부골을 지나 구리 앞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구에는 국가 어항인 구계항이 있어 연근해 어선들 수십 척이 이곳을 모항으로 삼아 어로작업을 하고 있다.
태풍과 폭풍이 내습할 경우. 평상시 인근 항·포구에 정박해 있는 소형 선박들의 대피항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평시에도 수십 척의 어선이 정박하고 있다.
● 남호천남호천은 해월봉에서 발원하는 한줄기 냇물과 우곡리 두시산에서 발원하는 한줄기 냇물이 남호리 새마을 동리에서 만나 남호리 본 동리를 통하여 바다로 유입한다.
상류인 중화리의 절골에는 경(정)수 사란 큰 사찰이 있었다. 지금은 폐찰이고, 유적만 남아 있다. 상류 지역에는 1964년도 축조된 남정 저수지가 있어 하류의 남정과 남호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해주고 있다.
● 항구현재 남정면 관내에는 국가 어항인 구계항과 지방 어항인 부경항, 어촌 정주 어항인 부흥·원척·남호항이 있다. 부경항은 남정면 부경 1리에 있는 지방 어항으로 방파제의 길이가 253m이다.
부흥항은 남정면 부흥리에 있는 소규모 항구다. 1996년 어촌정주어항시설 사업으로 시작됐다. 1998년, 2000년의 연이은 공사로 오늘날 형태의 어항으로 변모, 방파제의 길이는 114m이다.
원척항은 남정면 원척리에 있는 소규모 항구다.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연이어 공사가 진행됐다. 현재까지도 꾸준한 보수공사로 총 길이 138m의 방파제가 구축된 어항으로 변했다. 지리적 위치에 의해 태풍 내습 시 방파제 붕괴가 쉽게 일어나는 곳으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한 어항이다.
구계항은 군내의 유일한 국가 어항으로 남정면 구계리에 있다. 방파제의 길이가 총 448m로 2000년에 90m의 물양장이 신설됐다. 현재는 태풍이나 폭풍이 몰아칠 때, 남정면 및 강구면 내 선박의 피항처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강구 해양파출소 구 신고장소가 있다.
남호항은 남정면 남호리에 있는 소규모 어항으로 방파제 길이가 54m이다. 1997년 1998년 및 현재까지 착실히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 저수지
● 쟁암지남정면 장암리에 있다. 1993년 축조했다. 물 댈 면적은 13ha이고, 유역면적은 247ha, 만수 면적은 1.2ha, 저수량은 5772㎡다. 영덕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 부흥지남정면 부흥리에 있다. 1945년 축조됐다. 유역면적은 55ha이고, 만수 면적은 1ha, 저수량은 미상이다. 농업기반공사가 관리한다.
● 남정지남정면 남정리에 있다. 1964년도에 축조됐다. 물 댈 면적이 52.6ha이고, 유역면적이 950ha, 만수 면적이 7ha, 저수량은 2,440m이다. 농업기반공사가 관리한다.
● 양성지남정면 양성리에 있는데 1970년 축조됐다. 물 댈 면적은 41.6ha이다. 유역면적 303ha. 만수 면적 4ha이다. 저수량은 168m이다. 농업기반공사가 관리한다.
● 꼬부랑지남정면 양성리에 있다. 1945년 축조됐다. 유역면적이 30ha이고, 만수 면적이 1ha, 저수량은 미상이고,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한다.
● 사암지남정면 사암리에 있다. 1972년 축조, 물 댈 면적이 15.3ha이다.유역면적 100ha, 만수 면적 1ha, 저수량 61㎡다.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한다.
● 회동지남정면 회 3리에 있다. 1975년 축조됐다. 물 댈 면적 80ha, 유역면적 710ha, 만수 면적 4ha, 저수량 345㎡다.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한다.
● 천율지남정면 회리에 있다. 1945년 축조했다. 물 댈 면적이 5.3ha이다. 유역면적 5ha, 만수 면적 1ha, 저수량이 65m이다.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한다.
● 가지밭골지남정면 회리에 있다. 1945년 축조, 유역면적 50ha, 만수 면적 lha. 저수량 12ha이다. 농업기반공사에서 관리한다.
● 회리 정수장남정면 회 3리에 있다. 2003년 11월 12일 준공했다. 1일 3000톤의 수돗물을 생산할 수 있다.사업비는 75억 원이 들었다. 급수 혜택을 받는 인원은 2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 남정 하수종말처리장남정면 부흥 3리 391-1에 있다. 1일 800톤의 하수를 처리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차집관로는 4.93km에 이르고 있다. 중계펌프장은 8개소가 있다. 공사기간은 2001년 10월 22일~2003년 10월 21일에 걸쳐 이뤄졌다. 사업비는 70억이다. 하수처리 지역은 장사리 부홍리, 봉전리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 ● 남정면 마을 유래
>> 장사리
장사리 동명의 유래는 긴불 즉, 긴 백사장이 마을 앞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긴불, 진불 또는 장사라 했다.
이 마을은 1470년경 안 씨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 내동이라 이름하고 정착했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장사 서쪽 높은 곳을 개척, 두천이라 이름을 짓고 정착한 데서부터 마을이 형성됐다. 조선 시대에는 긴불, 뒤천, 오산, 장태, 점집 등 자연마을로 형성됐다.
영덕군 외남면에 속했는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합할 때 이 마을들을 병합, 장사동이라 하고 남정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장사리가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약 1만8000여 평의 장사평야를 이룬다.양성리가 있고 남은 약 200여m 정도 되는 남산이 솟아 있는 부경리가 있고 서북은 오산이 있으며 부흥리가 있다.
오산(烏山) : 장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이 까마귀 형국이라 한다.장태(장터) : 장사장이 열리는 곳이다.점대집 : 장사 남쪽 길옆에 있는 마을로 유기점이 있었다.장사원터 : 장사리 328에 있었던 조선 시대 역원 터다. 명사십리와 푸른 동해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곳이다. 조선 시대에 이 지역을 지나가는 관리들이 쉬어 가던 곳으로 유명했다. 동사무소로 쓰이다가 외남면 사무소로 사용했다.쪽박산(南山) : 먼 옛날 동해 바닷물이 고여 산 정상이 마치 쪽박이 물에 떠 있는 것 같이 보였다고 한다.
>> 부경리부경리는 고부동의 부(阜)자와 지경동의 경(境)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경1리는 19세기 후기인 박 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원진(元津)이라 하다가 뒤에 고부라 했다. 부경2리는 임진왜란 때(1592) 최 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 지경이라 했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고부동과 지경동을 병합, 남정면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부경리라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으로 부경 1·2리로 분동돼 있다.
부경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양성리, 회리, 남은 포항시 송라면 지경리와 경계를 이룬다. 북은 장사리와 이웃하고 있다.
고부 : 곱은등 밑에 있는 마을이다.섬대마 : 지경 남쪽에 있는 마을로 물이 양쪽으로 흐르고 외따로 떨어져서 마치 섬과 같은 마을이다.어목골 : 고부와 원진나리 사이의 오목한 곳에 있는 마을.원진(원진나리) : 고부 북쪽에 있는 마을.통시밋 : 지경 북쪽에 화장실이 있었는데 그 밑이 되는 마을이다.지경(큰지경, 영덕지경) : 영덕군과 영일군의 지경(地景)이 되는 마을이다.
>> 회(晦)리
회리의 유래는 회나무가 많아 횟골 또는 회동이라 했다. 회 1리 아랫마을은 18세기 후기 평산신씨 신 유덕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회 2리인 양지마을은 16세기 후기 진 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회·하회동을 병합, 회동으로 남정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회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구역상 1·2·3리로 나뉘어 있다.마을 위치는 동은 장사·부경리, 서·남은 포항시 송라면 대전리와 경계를 이룬다. 북은 양성리가 있다.
구릉마 : 회동 서쪽 구렁진 곳에 있는 마을.아릿마 : 회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양지말 : 아릿마 서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웃마 : 회동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 양성리양성리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마을 서쪽에 성재라는 산이 있는데 옛날 성(城)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에서 바다가 보이고 성이 있는 곳에서 명명된 이름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마을은 17세기 후기인 숙종 때 박 씨라는 분이 들어와 마을을 개척,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으로 양성이라 했다.
1914년 3월 1일 일제는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양성동으로 남정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양성리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성리의 위치는 동은 장사리, 부경리, 서·남은 회리, 서·북은 쟁암리, 봉전리가 있다.
쪽지골(中基) : 양성리와 쟁암리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 봉전리
봉전리 유래는 봉황산 밑이 되므로 봉전, 또는 가름길이라 해서 가리미라 했다. 옛 봉전동인 1리는 17세기 후기인 숙종 때 김 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구리골 마을인 2리는 노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17세기 후기에 안씨(安氏)가 입주, 마을이 번창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동(銅洞)을 병합, 봉전동이라 했다.남정면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봉전리로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 1, 2리로 분동돼 있다.
마을의 위치는 동은 부흥리, 원척리, 서는 쟁암리, 남은 양성리, 북은 도천리가 있다.
구리골 : 가리미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에 구리가 난다고 한다.아릿못 : 구리골 아래 모통이에 있는 마을이다.양지마 : 문봉 동쪽 양지에 있는 마을.웃대못 : 구리골 윗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다.
>> 쟁암리쟁암리 유래는 마을 어귀에 상투방우와 탕건방우가 우뚝 솟아 마주 보고 있는데 서로 싸우고 있어 이 바위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1570년경 신씨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하면서 쟁암 동이라 했고, 남정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쟁암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쟁암리의 위치는 동은 봉전·도천·부흥리가 있다. 서는 포항시 죽장면과 면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은 양성·회리, 북은 사암리가 있다.
귀민재 : 쟁암 서쪽에 있는 마을.
>> 사임리사암리 유래는 다사동의 사(士)자와 적암동의 암(岩)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암1리는 15세기경 박씨가 처음 정착했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때 김씨가 피난, 이곳에 왔다. 사암2리는 임진왜란 때 김·이·박씨가 피난 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다사동과 적암 동을 병합, 사암 동이라 불렀다. 남정면에 편입,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사암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사암 1·2리로 분동됐다.
사암리의 위치는 동은 구계·우곡리, 서는 달산면과 포항시 죽장면, 남은 쟁암리, 북은 중화리가 있다.
다사래 : 사암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냇물이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스하다.적암동 : 마을 아래에 붉은 바위가 있다.양지뭍 : 다사래 양지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음지뭍 : 다사래 음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 도천리도천리 유래는 마을 앞에서 두 내(川)가 합하므로 두내 또는 도천이라 했다. 마을은 1450년경 김 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그 뒤 우·국씨가 살았다.
16세기 후기인 임진왜란 때(1592) 이수춘이라는 분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창했다. 1909년에는 큰 불이 나서 마을이 한때 폐허화 됐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덕성동을 병합, 도천동이라 하고 남정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도천리라 불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천리의 위치는 동은 구계·원척리, 서는 쟁암리, 남은 봉전리, 북은 우곡리가 있다.
덕성동 : 도천 서쪽에 있는 마을.
아릿골 : 도천 아래에 있는 마을.큰-매 :도천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 우곡리우곡리 유래는 봉황산이 봉황의 형국이다. 이곳이 봉황의 날개에 해당, 우곡이라 했다. 마을은 15세기인 세조 때 이 씨라는 분이 이곳으로 피난, 마을을 개척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만봉이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구동을 병합, 우곡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됐다.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남정면에 편입,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곡리의 위치는 동은 남호리, 서는 사암리, 동남은 구계리, 도천리, 북은 남정리가 있다.
고만당 : 우곡 서쪽에 있다. 강원도 간성 현감을 지낸 바 있는 고만당 김주헌이 산 데서 붙여진 이름.원구동 : 우곡 위쪽에 있는 마을로 원씨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원곡동으로 불렸다.
>> 중화리중화리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상화·하화동의 중간을 택해 중화동이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동은 고려 시대 때 이 씨라는 분이 개척했다. 상화동은 조선조 중종 때 황보라는 성을 가진 분이 개척, 경주김씨와 함께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화동은 김씨가 개척했고 경주 최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화·하화·원동을 병합, 중화동이라 해서 외남면에 편입됐다.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하면서 남정면에 편입, 1988년 5월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중화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중화리 위치는 동남은 남정·우곡리, 서는 달산면, 북은 강구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아릿마 : 화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안억골 : 화동 윗쪽에 있는 마을.억골 : 중화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절골 : 억골 서쪽에 있는 마을.
>> 남정리남정리 유래는 이 마을 남쪽에 정자가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 1480년경 주·권씨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동남쪽 대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다. 조선 시대 청하의 송라역에 딸린 남역으로 남역 또는 역마라 했다.1914년 4월 1일 일제가 스스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남정동으로 했다. 영덕면에 편입,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을 재조정할 때 남정면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남정리가 됐다.남정리 위치는 동은 남호리, 서남은 중화·우곡리, 북은 강구면 삼사·화전리와 접한다.
구기실 : 남역에 있는 마을.아릿마 : 남정리 아래에 있는 마을.웃마(웃톳) : 남정리 위에 있는 마을.
>> 남호리본래 영덕현의 외남면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 역전으로 불리 다가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시 남호동으로 하고 남정면에 편입시켰다. 냄불, 남역불, 내무뿔로 불렸다. 남역 앞에 있는 벌(모래사장)가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내목불 : 개척 당시 바닷가 중간에 내가 흐르고 양 주변에 큰 버드나무가 번성, 내 목 불이라 이름 붙였다.
>> 구계리구계리 유래는 마을 앞 바위의 모양이 마치 새우가 물에 떠 있는 형상과 같아 하부라 했다. 이것이 변해 구배, 구계가 됐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고 깊은 계곡이 있어 구계라 했다고도 한다. 마을은 17세기 후기인 숙종 때 김 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 외남면 지역이었다. 갑오개혁 뒤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종전의 현을 군으로 개칭할 때 구계리는 영덕군에 속했다.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13도 제를 실시할 때 경상도에 속했다. 1914년 3월 1일 일제는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구계동이라 하고 남정면에 속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 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로 개칭할 때 구계리가 됐다.
마을의 현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도천리, 남은 원척리, 북은 우곡·남호리가 있다.
>> 원척리영덕현 외남면 소속으로 조선 인조 연간에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이 터를 잡고 마을을 개척했다. 동해와 산언덕을 자로 재듯 조화로워 원척이라고 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시 원척동으로 남정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원척리로 바뀌었다.
새새쪽 : 동리 북쪽에 있는 마을.마새쪽 : 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
>> 부흥리부흥리 유래는 자부랑의 부(富)자와 신흥의 흥(興)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부흥1리는 17세기 초기인 선조(宣祖) 때 양 씨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했다. 도천리 앞산인 봉황산 주령 봉황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형국이다. 날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날미(飛勿)라 불렀다. 2리는 16세기경 정 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한 뒤 지형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봉황의 새끼는 아름답다 해서 가추(佳雛)라 불렀다.
3리는 17세기경 권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부자가 많이 생겨 자부(慈富)라 했는데 지금은 자부랑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비물·자부랑·신흥동의 일부를 병합, 부흥동이라 하고 영덕군 남정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부흥리가 됐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2·3리로 나뉘어 있다.
마을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봉전리, 남은 장사리, 북은 원척리가 있다.
개곡 : 날밋 서쪽에 새로 된 마을.날밋(나루 끝) : 부흥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자부랑 : 가추 서쪽에 있는 마을.
● ● 남정면의 유구한 역사
>> 삼국시대남정면은 일제강점기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했다. 그 이전까지 외남면으로 불리던 지명이 바뀌면서 새롭게 생긴 면명이다.
남정면이 역사의 기록에 처음으로 보이는 때는 삼국시대, 즉 신라 시대 초기로 신라와 왜구(倭寇)와의 공방에서 보이는 사도성 관련 기록이 그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달라왕(阿達) 9년(162), 조분왕(王) 4년 (233) 7월과 유례왕 9년(292) 6월, 동왕 10년(293) 조에 다음과 같은 그 기록이 나온다.
사도성을 순행, 지키는 병사들을 위로했다. 아달라왕(王) 9년(162). 이찬 우로가 왜인들과 사도성에서 싸웠는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배를 태우니, 적이 물에 이르러 모두 죽었다. (조분왕 4년(233) 7월)왜병이 사도성을 공격 함락하니. 왕은 일길찬 대곡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이를 수복하게 했다.(유례왕 9년(292) 사도성을 고쳐 쌓고는 사벌주의 호민 80여 가구 이주시켰다. (유례왕 10년 293)왜구가 신라를 침범하기 시작한 것은 신라의 첫 임금인 박혁거세 왕 때부터였다. 남정면 지역을 포함한 동해안 일대는 해류의 영향으로 왜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위의 사도성도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으로 오늘날 남정면 장사리의 남산 부근과 양성리 뒷산을 잇는 지역에 있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로는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현재의 남정면 장사리의 옛 지명을 사동포(冬)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개 장사리에서 타 동리로 시집갈 경우, 이를 부를 때 "사도이 댁" 이라 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 남정면 고구려 지배받아남정면 지역은 5세기 말에 이르러 고구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고구려는 신라 소지왕(王) 3년(481) 춘(春) 3월에 오늘날 영덕지역인 호명성을 비롯한 7개의 성을 빼앗은 후 현재의 흥해지역인 미질부에까지 그 세력을 넓혔다. 이때 영덕은 야시홀, 영해는 우시군이란 고을 명을 얻었다.
남정면도 고구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 지배를 받았다. 남정면은 통일신라 이후에는 서울인 경주에서 전국을 이어주는 역로중에서도 경주 안강·신광·청하·송라·남정·영덕을 이어주는 북해의 중요한 역로에 위치했다.
오늘날 남정면 남정리는 남역이란 지명을 가지면서 공문서와 같은 명령의 전달과 물자의 수송기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정면 지역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야시흘이란 고을 명이 야성 군(郡)으로 바뀔 때 역시 야성군에 소속됐다.
성덕왕대(聖德王代)에는 강릉 태수(江陵 寺)로 부임하러 가는 남편 순정 공(公)을 따라가던 수로부인(水 夫人)이 남정면 회 3리에서 발원(발원은 불교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간절한 소망을 마음 깊이 새기고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의미) 했다.
부경 2리를 거쳐 동해로 유입하는 골곡천의 바위 절벽 아래에서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할 때, 지역의 인물이 수로부인(夫人)의 미모와 부덕을 흠모, 헌화가(花를 지어 바친 고장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헌화가가 만들어진 장소는 현재 부경 온천의 뒤쪽을 둘러싼 병풍바위 밑이라고 한다.
>> 고려 시대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된 안동지역의 병산 전투에서 영덕의 재암성(城) 성주 선필 (善) 장군을 따라 남정면민들이 대거 출전, 도와줬다. 931년 태조 왕건이 남정면 남정리의 남역을 거쳐 우곡리와 도천리를 지나 경주로 가면서 남정면민을 크게 위로하고 지나갔다.
고려 시대 역시 남정면 남정리에는 남역이 있어 송라역과 영덕읍의 화수1리인 주역 사이를 이어주는 역참으로 통신과 물품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현재의 부경2리인 골곡포, 장사리인 사동포, 원척리와 구계리 사이인 심문곡포를 비롯한 동해안 일대에 크게 침범할 때, 영해 사람 사재소감등의 지역의 포구 박강을 따라 지역민들이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 등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 조선 시대영덕군은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야성군으로 바뀌었다. 고려 초인 940년에 영덕군이 됐다. 고려 중기에는 영덕군이 폐지, 영해에 속했다. 감무(監務)가 파견됐다가 고려말에 영덕현으로 회복됐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영덕현이란 고을 명을 계속 사용하다가 갑오경장(1894) 이듬해인 1895년 영덕군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외남면, 즉 남정면은 영덕현의 최남단 면(面)으로 경주부 관할하의 청하현과 접하면서 지역의 남쪽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2년 일본군이 쳐들어오면서 일어난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로부터 남하한 일본군이 7월 말에 영해를 침탈한 후, 남정면을 지나 송라를 거쳐 남으로 내려갔다. 이때 영덕군에서는 창수면 위정 약수터에서 의병장 신귀년(申)이 이들을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전몰했다. 일본군은 남정면 남정리에 있던 남역을 통해 지나갔다. 한편으로는 군내의 많은 인사가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진(花王山)에 참여, 일본군을 무찌르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남정면에 관련된 역사적인 기록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보이지만, 남정면의 전신인 외남면이란 면명(名)은 조선 시대인 1789년도에 발간된 호구 총수에 처음 보인다.
호구 총수에 기록된 당시의 외남면에 속한 동리는 다음과 같았다. 남역리, 역전리, 역전해리, 구배육리, 구배해 원척육리, 원칙해리, 비물육리, 비물리,해리, 신홍유리, 신홍해리, 자부랑리, 장사육리, 장사해리, 고부육리, 고부해리, 지경리, 지경해리, 골곡리, 사라동리, 쟁암리, 동동리, 도천리, 소근동리, 다사라리, 고만당리, 영귀동리, 사동리), 화무동리의 29개 동리로 구성돼 있다.
100여년 뒤인 1896년에 발간된 영덕읍지부사례에 의하면, 당시 외남면에 속한 동리가 기록돼 있다. 여기에 의하면 구계, 도천, 덕성, 원칙, 적암, 다사, 쟁암, 비물, 자부랑, 신흥, 장사, 두천, 오산, 고부, 지경. 봉전, 동동, 양성, 상 회, 하회, 남호, 남역, 상화, 하화, 원동, 우곡, 원구의 27개 동으로 기록돼 있다.
>> 일제강점기와 현대1899년에 발간된 경상북도 영덕군읍지에 외남면의 각 동리의 이름이 기록된 이후 여기에서 언급된 두천리와 원진리가 장사리에 합쳐졌다. 덕성리가 도천리에 익 동이 오늘날 중화인 화무에 합쳐졌다.
1914년 일제강점기 당시 부군도(府郡 島) 폐지가 일어나기 전까지 20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1914년의 부군도(府 郡島)가 통폐합될 당시에 외남면에 속한 동리는 구계동(구배리), 원척동, 부흥동(원척리, 비둘리, 신흥리, 자부랑리의 일부를 통합), 장사동(두천동, 오산동, 신흥동 일부를 통합), 부경동( 境: 고부, 지경), 회동(골곡, 상회동, 화회동의 일부를 통합), 사암동(다사라, 적암), 쟁암동(쟁암, 동동), 봉전동(와화), 도천동(도천리), 양 성동(洞)의 11개 동으로 조정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때까지도 남정면, 즉 외남면에 속했던 남정동(남역), 남호동(역전리), 우곡동(고만당, 원구동), 중화동(사동, 화무, 상화, 하화, 원동의 일부를 통합)의 4 개 동을 영덕면에 이속시켰다. 종전까지 외남면이라 불리던 우리 지역을 남정면이라는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말인 1934년 4월 1일 영덕군의 동면을 폐지하고, 강구면이 신설하면서 당시 영덕면에 속하였던 남정동(남역), 남호동(역전리),우곡동(고만당, 원구동), 중화동(사동, 화무, 상화, 하화, 원동의 일 부를 통합)의 4개 동을 다시 남정면으로 이속시켜 남정면은 15개 동으로 구성하게 됐다. 1945년 광복이 된 후에도 이것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2006년 12월 31일 현재에는 장사리 부경1-2리, 회1. 2. 3리, 양성리, 봉전1.2리, 쟁암리, 사암1.2. 리, 도천리, 우곡리, 중화리, 남정리, 남호리, 구제리, 원척리, 부흥1.2.3리로 나누어져 22개의 행정리로 남정면을 구성하고 있다.
현재의 남정면은 15개의 법정리. 22개의 행정리, 26개의 자연부락과 58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1988년 5월 1일에 군 조례 제972호에 의해 등을 리로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남정면 3·1독립운동
1919년 4월 4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29명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2시 20분경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로써 전국적인 3·1독립운동이 시작됐다.
3월 16일 경북도 영덕군 영덕면 금호동의 개신교 북장로파 조사(助師) 강우근(姜佑根)은 3·1독립운동 소식을 들었다. 남정면 남정동 김용하의 집을 방문,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강우근의 만세운동 참여 권유에 김용하는 3월 18일 같은 마을 이복이를 설득했다. 3월 16일 영덕 읍내 남석동 시장에서는 강우근 등의 주도로 영덕면 3· 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남정동 주민이었던 최명술·신조경·강두황등도 영덕면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영덕 전역으로 3·1운동이 퍼졌다. 부흥동의 박명방과 양성동의 개신교 신자 김석조, 장사동의 정상용등 20대 청년들은 매일신보의 보도를 보고 전국 각지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4월 3일 부경동 김도석 집에서 여러 명의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이들은 “우리도 구한국의 독립을 희망하니 마땅히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라고 결의했다. 청년들은 각자 구한국 국기를 모방한 작은 종이 깃발을 만들었다. 하지만 김도석의 부친에게 발각, 만들었던 깃발은 전부 소각당했다.
4월 4일 박명방이 정상용 집으로 찾아가서 “오늘은 장사동 장날이다.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일으키자”라고 협의했다. 김석도도 동의, 재차 작은 종이 깃발 11기를 만들었다. 당시 깃발에는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 신대한독립만세(新大韓獨立萬歲)’라는 글을 적었다.
정오 무렵 이들은 장사동 시장으로 나아가 박춘길 등에게 종이 깃발을 배부했다. 깃발을 흔들며 시장 군중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장에 있던 100명의 군중도 호응,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남정면 3·1독립운동을 주도한 박명방·김석조·정상용은 장사경찰관주재소 경찰에게 체포됐다. 3명 모두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남정면 3·1독립운동은 영덕 군내에서 가장 늦게 일어난 운동으로, 개신교 신자와 청년들이 주도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 ● 남정면 산남의진과 매우 밀접
남정면은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의병 활동과 관련, 이름이 있었다. 500년 조선 왕조는 180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대내외적인 혼란 등에 따라 그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산업혁명에 따른 서구의 열강들이 부국강병을 우선으로 한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원료 공급지로 떠오르는 동양에서 조금 먼저 산업화를 달성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집요한 침략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국과 전쟁을 벌여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러시아와도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후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대내적으로는 대외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 부족과 고래의 전통에 얽매인 양반 관료들의 사고(思考)와 대원군(大院君)의 통상수교거부정책 등으로 조선은 혼란과 침체 일로를 걷기에 이르렀다. 이때 민비시해사건(閔妃事件)과 단발령 등의 사건이 보태어져 온 나라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됐다.
1895년 8월 20일 (음력) 고종황제의 황후인 친러파인 명성황후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주구인 낭인 테라자 등과 조선의 우범선(禹) 등이 주동이 된 불한당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는 불충한 일이 발생하자 조선 전체는 의분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고래로부터 내려온 상투를 잘라내는 한편, 신식의 양복을 입히려고 하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영덕지역은 신운석(錫)과 김노헌(金)을 중심으로 하는 영덕의진( 陣)과 이수익(李岳)을 중심으로 하는 영해의진(寧)이 결성, 활약했다. 영덕에서의 의병 활동은 경기도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연합한 것이 유명했다.
산남의진은 고종황제의 측근인 영천 출신인 정환이 아들 정용기를 대장으로 삼아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1906년 3월에 영천을 중심으로 기병한 의병진이다.
산남의진의 대장인 정용기는 의병을 일으키자 우선 영해를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하고 있던 신돌석 의병장과 연합 체제를 갖추기 위해 측근인 정순기를 보내어 이를 도모했다. 산남의진의 중군장인 이한구가 달산면의 주리와 봉산리, 옥산리 등지로 이동, 오기도 했다.
1907년 9월 1일에 정용기 대장이 죽장면 입암리 전투에서 순사 하자 새로이 부친이던 정환직이 대장을 맡아 직접 한 부대를 인솔, 영덕으로 북상했다. 이해 10월 20일 남정면 장암리의 동대산에 도착했다.
동대산에 도착한 정환직 부대는 전열을 정비한 후, 다시 북상하면서 감시하던 일본군 척후병 1명과 순검 1명을 체포, 사살했다. 부대원들의 사기를 높이고는 도천리를 거쳐 사암 1. 2리인 붉은바우와 다시래를 거쳐 달산면 옥산리로 가서 나머지 한 부대와 합친 후 29일 다시 일본군 척후병 1명을 사살하고는 다시 남정면 사암리로 돌아와 주둔했다.
이후 정환직 대장은 이듬해 봄에 이르러 부득이한 사정으로 부대를 일단 해산하기로 하고 자기는 강릉으로 가는 길에 영덕군 병곡면 각리에 머물다가 배신자로부터 첩보를 얻은 일본군에게 잡혀 영천에서 순국했다.
남정면은 산남의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돌석과 남정면과의 관계는 구체적인 사실이 알려진 것은 없다. 당시의 재판기록을 통해 그 대강만을 알 수 있다. 신돌석의 수하로 재판을 받은 임한조의 재판기록이 그것이다.
재판기록을 보면 피고는 8회 원년(1907) 4월 중에 적과 신돌석 배 아래에 속해 수백 명의 동당과 함께 외남면(남정면 하화동(중화)에 거주하고 있는 최찰방을 목적으로 하고는 동리에 도착, 최찰방(崔집에 침입, 동인을 협박하고 전 170냥을 탈취했고··· (용희 2년 1908).
11월 4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재판장 판사 도산호이랑 위와 같이 신돌석 의병장의 부대는 남정면 중화리에까지 와서 군자금을 모집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재판기록에는 탈취, 즉 강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군 자금을 지원한 부자들이 일본군의 보복이 두려워 그렇게 진술한 것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신돌석 의병장과 관련, 남정면 내에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남정면 지역 동대산, 해월산 등지를 배경으로 많은 흔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무 10년(1907)에 산남의진의 정환직의 부하로 참여, 융희 2년 (1908) 10월 20일 영덕 헌병 분견소에 귀순했다.
이해 11월 22일 다시 정환직의 부대로 복귀, 융희 3년(1909) 음력 정월 9일 밤 외남면 상회동(현 남정면 회 3리) 이연호(李浩)의 집을 탈취한 죄로 교수형을 받은 신석준(石)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올해 음력 정월 9일 밤 10시경 오두환 등 수명과 함께 곤봉을 휴대하고 영덕군 남면 상회동(현 남정면 회 3리) 거주 이연호 집으로 돌입, 석반을 제공, 돈 1000남을 지출치 않으면 구타한다고 위협했다.
이연호가 석반만을 제공하고 금전을 지출하지 않아 다시 이를 강탈한 방법으로 오두환의 지휘 밑에 이연호가 거주하고 있는 초가 6칸에 방화, 소각하고 이연호를 납치, 남정면 석산 밑에 상처를 입히고 산속으로 끌고 가서 난타하고, 두부 및 무릎 밑에 상처를 입히고··· (융희 3년(1909) 3월 31일 대구지방 재판소 형사재판 기록)
1910년에는 영덕군 외남면 양성동(현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 출신의 김일원(金日元)과 청하 출신의 윤홍곤(坤)외에 7명이 남정면 장사리 박시훈의 집을 탈취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으로 이들은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기록에 의하면 피고 윤홍은 전기 목적으로 외의 7명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동 41년 (1908) 6월 4일경 영덕군 외남면 장사리 박시훈의 집에 몰입, 총으로 그 집 사람을 협박하고 돈 35원 엽전 11관문, 기타 의류 잡품을 강탈하고···(명치 43년 1910년 9월 20일 대구 공소원 형사부 재판기록).
한 말의 독립 우국지사로는 남정면 회 3리 출신인 이봉지사가 있다. 남정면 관내의 한 말 대외 항쟁 사는 영남지역의 대표적 의병진이었던 산남의진과 신돌석의 영릉의진이 모두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모를 알아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갑오경장(甲午改革) 이후인 1895년 영덕현이 영덕군으로 영해부가 영해군으로 개칭되었지만, 군을 구성하고 있던 각 면의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따라 병탄이 돼 나라가 망하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영해군(郡)과 영덕군이 통합돼 새로운 영덕군이 설치됐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군내의 리동의 고유한 이름과 각 면의 이름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이때 외남면으로 불리던 우리 지역은 남정면으로 바뀌었다.
● ● 남정면을 빛낸 역사 인물
● 김일원 의병개항기 영덕군 남정면 출신의 의병이다. 김일원(1880?~1910)은 영덕군 외남면(지금의 남정면) 양성리에서 태어났다.
산남의진은 정용기가 고종의 밀지를 받은 아버지 정환직의 명에 따라 1906년 봄 영천(永川)에서 일으킨 의병부대이다. 정용기는 서울 진격을 목표로 삼고 관동으로 길을 트기 위해 산남의진을 이끌고 북상하던 중 1907년 10월 7일 경상도 청하군(지금의 포항시 북구 일부를 담당하던 옛 행정구역)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 미야 하라 소위가 이끄는 청송수비대의 기습을 받고 격전 끝에 전사했다. 정용기가 전사하자 정환직이 영덕·영일·청송·의성 일대에서 의진을 다시 일으키게 된다.
당시 산남의진에 가담한 김일원은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군사 100여 명과 함께 경북 북부와 동해안 연안 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07년 10월 29일 흥해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공격하여 일본인 이치하라 소장과 소장 가족을 처단했다. 우편취급소에 보관된 300여 원을 압수했다.
근처에 있는 일본 군경의 근거지인 경무분파소 및 기타 13동의 집을 불태웠다. 11월 3일 신녕 읍내에 들어가 군청의 무기를 다량 징발하고 경무분파소 및 순검 박재진의 집을 불태웠다. 11월 4일 의흥읍내에 들어가 경무분파소를 공격하여 분파소와 순검 주택 3동을 파괴했다.
11월 15일 다시 흥해 읍내로 들어가 친일 인물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했다. 군청을 포함한 여러 가옥을 불태웠다. 11월 16일 청하 읍내에 들어가 순검 김학윤에게 군수품을 징수, 1909년 12월 28일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에서 군수품을 징수했다.
그러나 끝내 체포되어 1910년 9월 20일 대구공소원형사부에서 김수곡·윤흥곤(등과 함께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이봉술 의병개항기 영덕군 남정면 출신 의병이다. 이봉술의 이명은 이학산(李鶴山)이다. 본적지는 경북 영덕군 외남면 상회동(지금의 영덕군 남정면 회리)으로 체포 당시 29세였다.
이봉술은 1908년 1월 3일 김상만 의병장 휘하에 들어가 약 20명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다. 김상만의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 조직된 의진으로 추정된다.
이봉술은 부대원들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경주·영천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1월 8일 경주의 어느 마을 아무개로부터 군자금으로 엽전 얼마를 징수했다. 그러나 이후 체포, 1909년 12월 15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강도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던 중, 1912년 12월 22일 칙령(勅令) 제13호에 의해 대구지방법원에서 형 집행을 면제받고 풀려났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 어찌 잊으랴 장사상륙작전
● 장사상륙작전
장사동 상륙 작전 또는 장사동 전투는 1950년 9월 15일~9월 19일까지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 작전을 포함한 전투이다.
전투가 벌어진 장사리는 과거에는 장사동으로 불리었다. 경북 지역 중 읍·면의 하부 행정구역을 리(里)가 아닌 “동”(洞)으로 불리던 지역들을 1988년 5월 1일리(里)로 통일하면서 현재의 장사리가 됐다.
당시 장사 상륙 작전의 작전계획서인 ‘작전명령 제174호’에 따르면 인천 상륙 작전에 맞추어 9월 15일부터 시작하는 유엔군의 낙동강 전선 돌파 공격을 위해 북한군의 보급로 차단을 통한 후방 교란이 공식적인 주목적이었다. 간접적으로나마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한 북한군의 주의 분산을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9월 15일 오전 6시 상륙 작전이 개시됐다. 학도병과 이들을 지휘하는 육군 장교들로 구성된 총 772명의 독립 제1 유격대대가 LST 문산호를 타고 장사리 해안에 상륙했다.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고 철수한 작전이다. 이 상륙 작전은 인천상륙작전과 양동작전으로 성공했다. 원래는 제8군의 임무였다. 유엔군의 상륙지점 교란을 위해 인민군 복장을 하고 특수 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게 작전명 174를 맡긴 것이다.
부대는 3일간의 물자만 보급받아 9월 14일 2시 장사리 해안에 상륙하여 교란할 때 다 쓰고 철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태풍 케지아로 인해 LST 문산호가 좌초되는 바람에 작전 계획은 뒤틀려버렸다.
발이 묶은 제1 독립유격대대는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7번 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뒤, 9월 19일에 유엔군 정찰기에 포착됐다. 해안선을 따라 항행하던 미국 제7함대 기획단 77 소속 USS 헬레나 CA -75(영어판)가 이끄는 포격임무대(bombardment Task Force)의 엄호를 받으며, LST 조치원호를 타고 철수했다.
39명 정도가 마지막 철수 과정을 엄호하면서 남겨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작전의 결과로 독립 제1 유격대대의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상처를 입을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 제1 유격대대 휴식을 취하고 인원을 보충받은 정비한 뒤, 전선에 복귀했다. LST 문산호는 좌초된 채로 버려졌고, 시간이 지나 1997년 3월 6일 발견, 인양됐다. 영덕군에 전승 공원과 전승기념관이 설립됐다.
●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9월 14일이 상륙일로 알려졌지만, 최신 기록과 자료에 의하면 9월 15일이 상륙일이다. 작전에 참여한 독립 제1 유격대대가 772명이 순수 학도병이고 여기에 지휘관이었던 국군 장교들을 비롯해 국군 기간병을 합치면 800명대로 알려졌지만 772명은 학도병과 국군을 포함한 수치이다. 부대원 772명과 전사자 139명 이런 수치들 모두 추정 수치이다.
현재까지 작전의 주목적이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한 기만 작전으로 알려졌지만, 작전명령서에 나온 공식적인 주목적은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행해지는 낙동강 방어선에서의 총반격을 위한 후방 교란 작전이었다.
부수적으로 같은 9월 15일에 실행된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해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 ● 장사상륙작전 다시 태어난 문산호
1997년 수색 작업에 나선 해병대가 장사 앞바다에서 2700t급 전차 상륙함(LST) 문산호를 발견한다. 장사상륙작전이 벌어지고 47년이 지난 이때가 장사상륙작전참전유격동지회의 염원이 이뤄진 순간이다.
2020년 6월, 장사 앞바다에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개관했다. 문산호 외관을 재현한 전시관이다. 장사상륙작전을 기념하고 참전 용사를 기린다. 2019년 김명민이 주연한 영화 〈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이 그들의 이야기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국내 유일한 바다 위 호국 전시관이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에서 이어진 다리를 건너 입구에 다다른다. 기념공원에는 장사상륙작전전몰 용사위령탑과 당시 상륙 작전 모습을 재현한 동상이 있다. 그 너머로 그들이 탈환한 200고지가 보인다.
명부대가 상륙한 길을 되짚어 기념관으로 향한다. 기념관은 총 5층 규모다. 1~2층은 전시 공간, 3~5층 선상은 전망대와 쉼터 역할을 한다. 내부는 일반 전시관과 비슷한 상자형 구조다.
1층은 장사상륙작전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롤로그에서 출발해 장사상륙작전의 배경과 명부대 결성, 작전에 따른 출동까지 과정을 다룬다. ‘아! 장사 학도병’에서 보는 노래 영상이나, 학도 의용군이 위장을 위해 착용한 북한 군복과 참고서를 넣은 책가방 전시물 등이 눈길을 끈다.
“나는 유달리 키가 작고 몸이 왜소했던 편이라 소총을 어깨에 메고 산비탈을 내려 달리면 총이 땅에 닿아서 타, 타, 타 소리를 낼 정도였다”라는 참전 용사 박노영의 증언이 그날의 긴박함을 전한다.
작전을 위해 지급된 식량은 건빵 한 봉지와 미숫가루 세 봉지인데, 그마저 문산호가 좌초하며 물에 녹았다고 한다. 전시장 곳곳에 당시 참전 용사의 생생한 인터뷰 기록이 강렬하다.
2층 전시관은 작전 전개와 영웅이란 주제로 꾸며진다. 애니메이션 ‘상륙 -200고지를 점령하라’ 영상을 관람하고 상륙함 철판을 닮은 모퉁이를 돌면, 가슴 뭉클한 장면이 나타난다.
명부대원은 6일간 이어진 전투가 끝나고 구조선 조치원호로 철수한다. 그때 배를 해안 가까이 댈 수 없어 대원 39명은 구조되지 못한 채 남겨진다. 그 순간을 재현한 모형이 ‘끝나지 않는 작전’이다. 동료를 두고 돌아서야 했던 이들의 인터뷰 영상이 더해져 한층 가슴 아프다.
마지막 ‘영웅’ 전시장은 전체가 유리 바닥이다. 그 아래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한 용사들의 군번과 이름표가 하나하나 놓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 위에 있음을 전한다.
장사상륙작전을 모래 예술로 표현한 영상이나 모래 디지털 방명록도 있다. 모래 디지털 방명록을 그리거나 적으면 맞은편 모래밭 영상에 담긴다.
관람을 마치고 3층으로 나온다. 3~5층은 갑판과 함교다. 3층 갑판에는 해군이 기증한 함포 4대를 설치했다. 갑판 제일 앞자리에서 장사 해변과 200고지가 한눈에 보인다. 전시로 본 장사상륙작전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4~5층은 준비 중인 공간이 많다. 하지만 어디서든 장사 해변과 동해의 파노라마가 장엄하다.
장사 해변으로 걸어 나오니 장사상륙작전에 나선 대원들의 시선이 겹친다. 그 끝에 위령탑과 기념공원이 있다. 동상이 소소하게나마 그날의 전장을 되살린다. 위령탑 앞에서 고개를 숙여 묵념하는 이들이 눈에 띈다. 어린 학도병의 희생을 한 번 더 기억한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오후 5시(월요일, 명절 당일 휴관), 관람료는 어른 3000원, 중·고생 2000원, 초등학생 1000원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매시 정각과 30분 안내대 앞에서 해설을 진행한다.
● ● 남정면 풍물 거리&가볼 만한 곳
● 도천리 도천숲도천숲은 국가 지정유산으로 지정한 천연기념물이다. 영덕군 남정면 도천리 75에 위치한다. 전형적 마을숲이다. 약 400년 전 마을이 형성됐을 무렵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천리는 북서쪽으로 바데산(높이 646m), 북동쪽으로 봉황산(높이 270.7m)이 펼쳐지는 산악 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동해와도 가깝다. 도천리에는 마을과 경작지를 가로질러 하천(장사천)이 흐르는데 도천숲은 마을의 모습을 살짝 가려주는 위치인 하천 너머 경작지 쪽 강변에 조성돼 있다.
숲은 동서 방향으로 약간 긴 타원 형태를 띤다. 수해를 예방하고 풍수지리상의 지형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비보림이다. 도천숲 조성 유래에 의하면 마을 앞 지세가 마을을 위협하는 사두혈(뱀의 머리) 형상이어서 불길한 기운을 눌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엽승림으로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수구막이(물이 빠져나가는 수구가 트여 있으면 좋지 않다고 해서 수구가 보이지 않도록 막는 것)로 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때 마을 서쪽 서달산에서 현재의 숲까지 연결될 정도로 숲의 규모가 커 영덕 제일의 울타리라 불렸다.
숲이 있는 도천리는 영덕 제일의 부촌이었다. 하지만 불이 나고 경작지가 조성되며 숲은 현재 크기로 줄어들었다. 숲에는 땅을 파서 삼베의 재료인 대마를 찌는 삼굿 작업을 하던 구덩이가 있다.
도천숲은 남한에서 삼굿 공정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 신(神)의 위패를 모신 제당(제사를 지내는 당집)이 있는 숲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洞祭)를 지내왔다. 예전에는 오랫동안 마을을 떠나면 제당에 인사를 드린 후 길을 나서고, 숲의 나뭇가지 하나도 가져가지 않을 정도로 숲을 신성시했다고 전해진다.
주요 수종은 느티나무, 팽나무, 말채나무이다. 그 밖에 시무·회화·쉬·단풍·이팝·고욤·개서어·뽕나무 등 약 170주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수령 100~200년으로 추정되는 거목들이 여럿 있고, 수령 300년 이상의 나무도 있다.
조성 유래가 알려진 마을 숲으로 문화·민속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09년 12월 30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지정면적은 1만 9,064㎡이다.
● 장사해수욕장남정면은 동해안의 아름다운 자연과 푸짐한 먹거리를 자랑한다. 숨겨진 해안 절경과 특별한 체험을 선사하는 여행지다. 푸른 동해를 끼고 있는 남정면은 아름다운 해변과 기암괴석이 펼쳐진 해안선, 싱싱한 해산물까지 갖추고 있어 여행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다.
장사해수욕장을 둘러싼 산과 언덕들은 그리 높거나 위협적이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다. 크거나 산만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의 자연 같은 어촌 군락이다. 심심치 않게 그 나름의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갯바위들과 작은 송림 숲은 그야말로 최고다.
6·25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장사해수욕장. 모래 낱알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어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인 감흥이 공존한다.
좌로 굽은 3자 형의 해안선이 바로 장사해수욕장이다. 백사장 길이는 900m, 폭은 50m, 평균 수심은 1.5m로, 동해안 7번 국도변에 위치한다.
바닷물이 깨끗하고 경사가 완만하며 백사장에 울창한 송림이 있어 가족 피서지로 적합하다. 개장은 7월 10일부터 8월 20일까지이다. 영덕군에서 해수욕장을 직접 운영하여 요금과 서비스가 좋고 각종 편의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다.
가자미·넙치·우럭 등이 많아 바다 낚시꾼들이 연중 찾는 곳이기도 하며, 주변에 삼사 해상공원이 있다.포항을 따라 올라오자면 환상의 7번 국도 자락, 영덕의 시작이요 끝인 지점에서 맞이하는 장사해수욕장. 아담하고 그림 같은 포구에선 단체 야영객들이 송림과 조화를 이루었다.
언덕과 백사장과 자그마한 갯바위들이 연출해 내는 작은 전경들이 마치 액자 속 바다 풍경 같다.
해수욕장 한편에선 다채로운 해안 스포츠체험이 한창이다. 바다와 강을 잇는 그림 같은 물줄기.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언덕 위 어촌풍경이 아스라한 바다 구름에 쌓여 환상적인 이국의 어촌을 연상시킨다.
1979년 개장한 이곳 장사해수욕장은 남쪽의 우뚝 솟은 남산과 아름드리 즐비한 소나무들이 우거진 송림 숲이 조화로운 풍광을 연출한다. 동쪽 푸른 바다 해안가에는 부흥2리에서 시작한 모래사장이 부경1리에 이르도록 거의 십 리에 걸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과거 명사십리의 명성을 품고 있다.
장사는 해수면이 완만, 아이들이 노닐기에 그지없이 좋은 곳이다. 여러 가지 수상 레저를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4계절 관광지로 새 단장을 마친 장사해수욕장이다.
● 남정 5일 시장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 있는 남정 5일 시장은 1986년에 개설됐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활기와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힘찬 분위기의 시장이다. 장날은 2일, 7일이다.
물가자미, 돌미역, 멸치, 건어물, 산나물 등 찬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남정 5일 시장만의 특유의 힘찬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꼭 한번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는 맛집들이 즐비하다. 영덕 대게는 남정면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싱싱한 게살의 풍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영덕 물회는 싱싱한 해산물을 얼음에 넣고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시원한 별미로, 더운 여름철 입맛을 돋우기에 완벽하다.
남정 5일 시장을 중심으로 남정면 곳곳은 맛집 또한 풍부하다. 싱싱한 해산물로 만든 해물탕, 대게, 물회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영덕 대게는 싱싱하고 살이 꽉 차 있어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자연과 문화, 맛을 모두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곳이다.
남정면은 맑은 동해를 끼고 있어 싱싱한 해산물이 풍부하다. 시장에 가면 대게와 과메기가 유명하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 식당이 있다. 회, 해물탕, 조개구이 등 다양한 차림표를 맛볼 수 있어, 취향에 맞는 맛집을 찾을 수 있다.
남정 5일 시장은 회로도 유명하다. 싱싱한 광어, 도다리, 우럭 등 다양한 종류의 회를 맛볼 수 있다. 회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쌈으로 먹으면 더욱 맛있게 즐길 수 있다.
김성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