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품면··· 복사꽃이 필 때면 꽃향기로 마을이 들썩들썩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진달래고향 의 봄이 절로 읖조려지는 산골마을이 바로 지품면이다         지품이란 품수를 안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지품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470년(성종 원년)경 4개의 성(姓)씨가 논의했다고 해서 입 ‘구(口)’자가 4번 들어간 한자로 지 품(知品)이라 했다고 한다.   영덕군 지품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는게 황장재이다. 지품면 황장리와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를 연결하는 345m의 고개다. 낙동정맥의 화매재와 대둔산 사이의 고갯마루이다. 안동 간고등어를 탄생시킨 유래가 깊은 역사의 고개이다.   당진영덕고속도로 동청송 · 영양 나들목으로 나오면 황장재가 지척이다. 국도 34호선이 지나는 황장재는 고속도로가 생기기까지 내륙에서 영덕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황장재에 ‘지품면 황장재’라고 쓰인 거대한 표석이 있다.   고갯마루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내려오면 하나둘 복숭아밭이 보인다. 지품면사무소 앞에는 노란색으로 칠한 앙증맞은 버스 모양 정류장이 눈길을 끈다. 정류장에 쓰인 ‘복사꽃향기마을’은 지품면의 중심인 신안리를 부르는 별칭이다. 복사꽃이 필 때면 꽃향기로 마을이 들썩들썩한다.   신안리에서 좀 더 내려오면 오십천이 옥계계곡과 만나 제법 몸집을 불린다. 지품면 일대에 복숭아밭이 많은 건 오십천과 관계가 있다. 1959년 태풍 사라호가 상륙했을 때, 오십천이 범람했다. 비옥한 땅이 자갈과 토사가 가득한 척박한 땅으로 바뀌었다. 폐허의 절망 속에서 주민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고심 끝에 자갈밭에서도 잘 자라는 복숭아의 특성에 주목해 복숭아밭을 일궜다. 지품면 복숭 아밭은 이런 아픈 사연을 품고 있다.         지품면은 어떤 곳   지품면은 조선시대 영덕현의 북면(北面)이다. 2004년 8월 26일 현재 면의 구성은 삼화1, 2리, 오천1, 2리, 용덕1, 2리, 송천1, 2리, 도계1, 2리, 신양리, 눌곡리, 낙평리, 신안리, 속곡리, 율전리, 옥류리, 수암리, 복곡리, 원전리, 지품리, 기사리, 황장리, 신애리를 합쳐서 24개의 행정리와 19개의 법정리, 54개의 자연부락과 85개의 반으로 구성 돼 있다.   면 소재는 경동로 7153(신안리 186-4)이다. 면적은 150.23㎢이다. 인구는 2025년 7월 현재 1865명이다. 넓이는 150.27㎢이다.   지세는 대둔산, 맹동산이 서북쪽에 높이 솟아 있어 서북쪽은 산세가 험하지만 동으로는 점차 낮아지는 형세를 하고 있다. 면을 가로질러 오십천 원류(原流)가 지나가고 있다. 이 유역을 따라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논농사와 과수원 농사가 주로 이뤄지고 있다. 산지가 많아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지계는 서쪽으로 청송군 진보면, 부동면과 접한다. 북쪽은 영양군 석보면과 남쪽은 달산면과 접하고 있다. 동북으로는 영해면과 축산면과 접하며, 동쪽은 영덕읍과 접하고 있다. 면내의 산업으로는 과거에는 한지(韓紙), 옹기 등의 업종들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닥나무나 흙을 원료로 활발한 생산활동을 벌였다. 국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지역경제에서도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현재는 이들의 수요가 급격히 감소, 이들 공장도 거의 폐업되고 현재는 한 두 곳만 남아 겨우 명맥만 유지해 나가고 있다. 면의 특성상 산지가 많은 관계로 주로 밭농사 위주의 농업이 발달해 있다. 한때는 고추, 마늘, 담배 농사가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는 오십천 유역의 사질토를 따라 복숭아, 포도, 사과, 배, 감의 과수 특산지로 변했다. 복숭아는 영덕군 최대산지로 전체의 53%를 차지한다. 산송이는 전국 최대산지로 영덕군 전체의 50%를 점유하는 등 농특산물 주산지로 지품면 농가의 주 수입원이 되고 있다.       지품면 유래 본래 지품면은 조선시대 영덕현의 북면(北面)이다. 1789년의 가구 총수에 의하면 용기리, 사자동리, 묵방리, 오십곡리(五十谷里), 보곡리, 기사리, 대동리, 지품리, 입석리, 양원리, 신기리, 오일리, 금천리, 전여동리, 도원리 (陶原里)의 23개 리가 있다. 1899년의 영덕군읍지에 의하면 △구롱기 △사자동 △묵방(상묵,외묵) △복곡리△기사리 △지품리 △대동리 △입석리 △주막리 △평지리 △황장리 △속곡리 △소항리(상소, 하소) △유산리 △상율 △하율 △주을포(상주 중주, 하주) △조족리 △눌우곡 △실율리 △오일리 △금천리 △저여동 △관동리 △대덕 △원전 △세류 △수암 △수내 △ 마항 △재곡 △토곡 △용수 △신기 △양원 △신성 △월전 △장전 △죽전 △지통리 △서당리의 45개의 리로 구성돼 있다. 이후 진보면의 낙평을 편입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에 신안동(주을포, 신성, 주막리, 조족리), 신양동(신기, 양원, 식율), 기사동(기사리, 평지리), 수암동(마항, 수내), 삼화동(관동, 전여, 월전, 용수), 옥류동(유산리, 장전리), 도계동(소항리, 대동리, 죽전리), 낙평동(낙평, 세류), 지품동(지품), 송천동(묵방), 율전동 (상율, 하율), 보곡동(지통리), 눌곡동, 오천동(오일, 금천), 용덕동(구룡기, 사자동, 대덕), 원전입석, 재곡, 황장동(황장, 토곡), 속곡리(서당리)등의 18개 동으로 개편하면서 면명을 지품면이라 했다.             지품면 마을 유래 삼화리 삼화리 유래는 용수, 관동, 전여의 세 마을을 병합, 삼화동이라 했다. 삼화1리는 15세기경(1400년경) 나 씨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했다. 삼화2리인 전여 마을은 17세기경(1600년경) 영천 이씨 이계원이란 분이 개척, 장등마을은 같은 시대에 김현철(金顯哲)이란 분이 개척했다. 월전 마을도 같은 시대에 오씨라는 분이 개척했다. 마치 보름달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달밭골 또는 월밭골 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 때 지품면에 편입됐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삼화리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으로는 삼화1, 2리로 분동 돼 있다.   삼화리의 위치는 동은 영덕읍 구미리, 서는 오천리, 남 은 신애리, 북은 국사봉을 면계로 영덕읍 화천리가 있다.    관동=사리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구읍곡이 있다. 관원들이 살았다.사리골=용수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은 흔적이 있다.용수골=삼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 마을 한 가운데 있었는데 이곳에서 용이 등천 했다고 한다.   오천리 오천리 유래는 오일(午日)의 오(午)자와 김천(金泉)의 천(泉)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천1리인 오일리는 15세기인 세종 때(1428년경) 야은(野隱) 배담(裵湛)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오천2리인 김천 마을은 15세기에 홍씨라는 분이 개척, 김천이라 했다. 정씨라는 분이 마을 입구를 개척, 돈골(金谷)이라 하다가 떠나고 다시 밀양박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1 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금·중금·하금·오일동을 병합하여 오천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됐다.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오천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오천1 · 2리로 분동 돼 있다.   오천리의 위치는 동은 영덕읍 구미리, 화개리, 천전리, 서는 신양리, 남은 삿갓봉(해발320m)과 달산면 대지리, 북은 율전리, 옥류리가 있다.   오일=오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18세기 전기(1710년 경)에 배씨 가문의 5형제가 마을 보(洑) 를 만들고 오가대리(五家大里)라 하다가 오일리라 개칭했다.김천동=오일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그 밖에 상금, 마금, 하금 등이 있는데 이들 마을은 일제 강점기때 금광을 개설, 계곡 냇가에는 사금(沙金)을 채취하기도 했다.   신양(新陽)리 신양리 유래는 신기(新基)의 신(新)자와 양 원리(陽原里)의 양(陽)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 후반(1580년경)에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입주하여 양원과 신기를 개척했다. 월성이씨가 같은 시기에 입주, 식률(植栗)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동, 식률동, 양원동의 각 일부와 서면(西의 재궁동(齋宮洞) 일부를 병합. 신양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신양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신양리의 위치는 동은 오천리, 서는 눌곡리, 남은 달산면 대지2리와 면계를 이루고 북은 눌곡리, 신안리가 있다. 이 마을은 안동과 영덕간의 34번 국도가 통과한다. 달산· 지품천이 합류, 오십천을 이뤄 수원(水源)이 풍부한 편 이다. 장터(삼거리)=신양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옛날 장이 섰다.  신양리=신양리에서 으뜸되는 마을. 눌곡리 눌곡리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본래 황곡(黃谷)이라 했다는 말이 있다. 황(黃)은 누르실 또는 누리실이라고도 한다. 이 누르실의 한자 표기로 눌곡(訥谷)이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마을은 어느 시대인지 경주 김씨의 김주린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 동명을 황곡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양원동, 구룡 동의 각 일부를 병합, 눌곡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눌곡리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눌곡리의 위치는 동은 신양리, 서는 송천리, 용덕리, 남은 달산면 인곡리와 면계를 이룬다. 북은 신안리가 있으나 동은 시루봉, 남은 퉁소암, 북은 마고산 등이 가로놓여 있다. 용덕리 용덕리 유래는 구룡기(九龍基)의 용(龍)자와 대덕동(大德洞)의 덕(德)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용덕1리 는 16세기경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용덕2리는 시대는 알 수 없으나 문씨 터전에 김씨가 정착했다고 하는데, 지형(地形)이 흡사 사자가 머리를 내미는 것 같아 사자골이라고도 불렀다. 일명 대덕리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대덕동과 구룡동의 일부를 병합, 용덕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용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구역상 용덕1 · 2리로 분동돼 있다. 용덕리의 위치는 동은 달산면 대지리와 눌곡리와 신양리, 서는 청송군, 남은 달산면 인곡리, 북은 송천리가 있다. 구룡터(구룡)=용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대덕동=구룡터 서쪽에 있는 마을.사자동=대덕동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웃절· 아랫절골(上, 下寺谷)=절이 있었던 마을.     송천리 송천리 유래는 알 수 없다. 마을 주위에 소나무숲이 무성했다. 옛날 이 마을에 솔가지를 따서 먹(墨)을 제조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한 분은 15세기 후기인 임진왜란(1592) 2년 전인 1590년에 수안김씨의 묵와 김간(金)이 피난처를 찾는데 송(松)자 든 지명을 찾아서 영해면 괴시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마을 이름을 송대(松臺)라 했다. 들국화가 많이 피 어 국골(菊谷)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묵·외묵동을 병합, 송천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송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1·2리로 분동돼 있다.   송천리의 위치는 동은 눌곡리, 서는 청송군과 기사리, 남은 용덕리, 북은 낙평리가 있다. 대둔산의 연봉(連峰)들 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옛날에는 송림이 울창, 인적이 드물었다고 한다.   먹골(먹동)=송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임.밭먹골=먹골 바깥(북)쪽에 있는 마을임.안먹골=먹골 안쪽에 있는 마을임.웃먹골=먹골 위쪽에 있는 마을임. 낙평리 낙평리 유래는 알 수 없다. 마을 앞으로 오십천이 흘러들어 수원이 풍부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마을은 16세기 중종(中宗) 연간(1530년경)에 제주 고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병자호란 때(1636) 최림이란 분이 호란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동과 당시 진보군 동면의 낙평동 일부를 병합, 낙평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낙평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마을의 위치는 동은 신안리, 서는 기사 · 수암리가 있다. 남은 송천리, 북은 속곡리가 있다. 마을의 산주령은 오마 형국이라 하며 앞에는 오십천 냇물이 흐르며 서쪽에는 신선암이 우뚝 솟아 있다. 세류동(잔버들)=낙평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버드나무가 많았다.         신안리 신안리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신성(新星) 등 몇몇 자연 마을을 합쳐 새롭게 출발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이 마을은 17세기경(1629년경)인 인조(仁祖) 연간에 남원방씨가 줄포(茁浦)를 개척했다고 한다. 그 뒤 유씨가 들어왔고 방씨는 복곡(洑谷)으로 이주했다. 평산신씨는 산내(山內)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상주동(줄포), 중주동(신성), 하주동(산내)을 병합, 신안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 오늘에 이른다.   산안리의 위치는 동은 오천리, 서는 낙평리가 있다. 남은 눌곡리, 북은 율전리 속곡리가 있다. 이 마을은 옥녀봉과 마고산이 뒤에 있다. 영덕읍을 통하는 34번 국도가 마을 앞을 지나는 면 소재지이다. 거랫마=신안리에 있는 마을.뫼안(임안)=새마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마고산(麻 姑山)이 있다.새마=신안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약 60여년 전에 새로 생긴 마을.솔정마을=거랫마와 새마 사이에 있는 마을로 큰 소나무 정 자가 있었다.용치매기=생싯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 줄포=새마 북쪽에 있는 마을.     속곡리 속곡리 유래는 속골짜기가 돼 속골 또는 속동, 속곡이라 했다. 마을은 지세가 높다. 신안리에서부터 시작, 무려 30여 리에 이르는 계곡이 형성돼 있는 승지(勝地)로 이름이 있는 속곡계곡이 있다.    마을은 17세기초(1620년 경)에 옥산장씨가 하속곡을 개척했다. 뒤이어 임씨가 상속곡을 개척한 뒤 18세기(1702년경)에 평산신씨 신문식 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이후 윤 · 김 · 차씨 등이 들어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속 · 하속 · 외속동의 일부를 병합, 속곡동이라 해서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속곡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속곡리의 위치는 동은 도계리, 율전리, 서는 수암리, 낙평리, 복곡리, 남은 신안리, 북은 영해면과 면계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 상속동은 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로 일명 신촌이라 한다. 하속은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일명 윤 씨촌이라고도 했다.   당촌=지와집마 옆에 있는 마을로 당이 있었다.양지마=속곡리에 있다.예탑(예터, 古基)=속곡리에 있다.지와집마(瓦村)=예탑 옆에 기와집이 있다. 율전리 율전리 유래는 밤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밤실 또는 율전이라 했다. 마을은 15세기 중기에(1450년경) 김녕 김씨 김후생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1500년 경에 연안차씨 차제동이라는 분이 이곳에 들어왔다.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 뒤 17세기 중기(1650년경) 경주최씨의 최가은(崔家隱)이라는 분이 이곳을 개척하고 윗밤실(上栗洞)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 · 하율동 등을 병합, 율전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율전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율전리의 위치는 동은 삼화·옥류리가 있다. 서는 속곡리, 남은 신안 · 오천리가 있다. 북은 도계리가 있는데 마을 뒤에는 맹동산이 있다.   아래밤실=밤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웃밤실=밤실 위쪽에 있는 마을.     도계리  도계리 유래는 이 마을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도계동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도(桃)자를 도(道)자로 바꿔 도계동이라 했다. 도계1리는 17세기경 김녕 김씨의 김연생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그 뒤 많은 지사(志士)가 양성, 독지곡 또는 하소라 했다 한다. 도계2리인 배목 마을은 17세기경 임씨 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지형이 배를 매어둔 나루터와 같아 동명을 배목이라 했다. 절골 마을은 16세기경 유씨라 는 분이 입주, 절이 있었는데 소실됐다. 배목과 절골 사이 에 있는 새마을은 류씨가 새로 마을을 이룩했다. 가라골은 차씨가 개척했다. 마을들을 상소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 · 하소동을 병합, 도계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됐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도계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 구역상 도계 1 · 2리로 분동돼 있다.   도계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면 조항 · 옥류리가 있다. 서는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와 군계를 이룬다. 남은 율전 · 속곡리, 북은 영해면 대리(대동)와 면계를 이룬다.   독지골=도계 남쪽에 있는 마을임.상소동=하소동 북쪽에 있는 마을임.상소항=독지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상소동 길목이 됨. 옥류리 옥류리 유래는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15세기경(1425년경) 문화류씨가 외옥류를 개척했다. 진주강씨는 내옥류를 개척했다. 조선시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외류동을 병합, 옥류동이라 해서 영덕면에 편입됐다.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옥류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옥류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면 대곡 · 칠성리, 서는 도계리, 남은 율전리, 북은 축산면 조항이다. 마을 뒤에는 옥녀봉(해발400m)이 있다. 내류동=옥류 안쪽에 있는 마을.외류동=옥류 바깥쪽에 있는 마을.    신애리 신애리 유래는 믿으면서 사랑하라는 박애정신의 상징적인 뜻이 담긴 이름이다. 천주교 등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다. 마을은 오천리 산 219 산 중턱에 위치한 음성 나환자 마을이다. 1965년 3월 정부 주선으로 신애원 또는 신애농장으로 오천 1리에 속해 있다가 1989년 1월 1일 군조례 제1021호로 오천리 일부를 분리, 신애리로 독립한 마을이다.   마을의 위치는 영덕 안동을 연결하는 34번 국도에서 오십천 냇가를 건너면 바로 마을 입구가 된다. 마을은 매월 정부에서 지급하는 양곡과 연료 · 부식비 등을 수령, 생활 한다. 일부는 복숭아 등 과수재배, 양계, 양돈으로 생활하며 천주교 안동교구에서 지원받기도 한다.   수암리 수암리 유래는 수곡(壽谷)의 수(壽)자와 대암(臺岩)의 암(岩)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수곡으로도 쓴다. 동명은 대암 곧 바위처럼 장수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대암에서 동명이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을은 16세기 전기(1514년경)에 제주고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마을 이름을 마항이라 했다. 그 뒤 평산 신씨가 입주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곡·수내동, 그리고 신리 일부 와 진보군 동면의 낙평리 일부를 병합, 지품면에 편입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수암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마을의 위치는 동은 속곡리, 낙평리, 서·북은 복곡리, 기 사리, 남은 낙평리가 있다.   대암=수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대를 이룬 바위가 있다.  수곡=대암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깊은 산골짜기에 물이 흘 러내린다고 하며 옛날 호랑이가 있어 범호골 이라고도 했다. 복곡리 복곡리 동명의 유래는 보(洑)가 있어 보골 또는 보곡이라 했지만 변해 복곡이 됐다. 마을은 15세기 후반 (1480년경) 죽산안씨가 개척했다. 안씨가 제지공장을 세워 지통(紙桶) 마을이라 했다. 같은 해 분성 김씨가 개척, 고등곡이라 했다. 18세기초에는 청송 김씨가 들어와 보두마을이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복곡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복곡리가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위치는 동은 수속곡리가 있다. 서는 지품리, 기사리, 남은 수암리, 북은 원전리가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으며 들이 적고 산림이 울창한 마을이다.   고등골=복곡 서쪽에 있는 마을.     원전리 원전리 유래는 조선시대 지품원(知品院)의 앞이 되므로 원앞 또는 원전이라 했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1460년경)에 이씨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 원터라 했다. 그 무렵 향교(鄕校) 제관(祭官)이 살아 제관곡(祭官谷)이라 했다. 그 뒤 향장(鄕長) 임병영이라는 분이 재양(載陽)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재곡동을 병합, 원전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원전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원전리의 위치는 서북으로는 황장·지품리, 북은 영양군 화매리와 군계를 이룬다. 남쪽은 복곡리가 있다. 영덕 안동간 34번 국도가 마을을 통과한다. 예전에는 5일 시장이 있었다.   목너매=원 앞 서북쪽에 있는 마을.아릿모치(모티, 모퉁이)=원전 아래에 있는 마을.  웃모치=원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장새터=원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장이 섰다.재곡동(才谷洞)=원전 동북쪽에 있는 마을.쟁새골=높은 꼭지 남쪽에 있는 마을.주막모치=원 앞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 있었다.     지품리   지품리 유래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지품부곡이 있었다. 조선시대 이 마을에 지품원(知品院)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은 15세기 후기에 (1470년경) 마을이 개척 됐다. 그 뒤 4성(姓)의 지사(志士)가 공론해 지품이라 하기도 하고 학곡(鶴谷)이라 칭했다. 본래 옛 영해부(寧海府)에 딸린 지품부곡(知品部曲)이 있었다. 조선시대 지품원(知品院)이 있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동동(大同洞) 을 병합, 지품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지품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지품리의 위치는 동은 원전리, 서는 청송군, 남은 기사리, 북은 황장리가 있다.   대동동=지품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그밖에 대학 · 소학동이 있다.     기사리 기사리 유래는 옛날 신라 말년( 935년경)에 신라의 많은 충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 대둔산 아래로 들어와 은거, 기사촌(其仕村)이라 했다. 현재는 그것을 생각한다 해서 기사리로 고쳐쓰고 있다.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송씨라는 분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살고 싶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기사라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 북면(北面) 지역이었다. 갑오개혁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 현을 군으로 개칭할 때 영덕군에 속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의로 통폐합 할 때 평지동을 병합, 기사동으로 하고 지품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로 개 칭할 때 기사리가 돼 현재에 이른다.   기사리의 위치는 동은 낙평 · 수암 · 복곡리가 있다. 서는 대둔산과 청송군 부동면과 군계를 이루고, 남은 지품리가 있다.   안기사=기사리 안쪽에 있는 마을.평지마=기사 북쪽 평지에 있는 마을임. 황장리 황장리 유래는 황장산 밑이 돼 붙인 이름이다. 마을은 16세기 후기(1570년경)인 선조(宣祖) 연간에 남평 문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했다. 조선 초기 이곳에서 나는 나무를 나라에서 재목으로 쓰기 위해 황장봉산으로 봉하고, 황정(黃井)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토곡동을 병합, 황장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황장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황장리의 위치는 동은 원전리, 서는 황장재 넘어 청송 군 진보면과 군계를 이룬다. 남은 지품리, 북은 영양군 석 보면 화매리가 있다. 이 마을의 전래 동명은 황장 동쪽에 톳골, 토곡이 있다.     용마총의 전설   용마총은 전국적으로 분포된 말무덤 설화의 변이형이다. 장수가 자신이 아끼던 준마의 능력을 시험하려다 잘못된 판단으로 준마를 죽이게 되고, 그 준마의 무덤을 만들게 된 이야기이다. 용마총은 2002년 영덕군에서 발행한 영덕군지에 수록됐다. 영덕군지에는 채록 경위가 밝혀져 있지 않다.   지품면 삼화리에는 돌무덤 세 개가 나란히 있다. 돌무덤이 생긴 유래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라 때 한 화랑이 있었는데, 화랑에게는 아끼는 용마가 있었다. 하루는 그 화랑이 지금의 돌무덤이 있는 곳에서 열심히 궁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화랑은 용마에게 “내가 활을 쏠 테니 네가 화살을 물고오너라”하고는 활을 쏘았다. 나는 듯이 뛰어가던 용마가 화살 없이 그대로 돌아왔다. 화랑은 용마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생각하고는 앞뒤를 생각하지도 않고 칼을 빼어 말의 목을 쳐 죽여 버렸다. 그때 한 농부가 화살을 들고 달려와서 “말이 화살을 찾다가 못 찾고 돌아간 뒤에 화살이 떨어졌다”고 했다. 화랑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경솔하였음을 깨닫고 후회했지만 이미 죽은 말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말을 묻고 양옆에 말안장과 칼을 따로 묻었다. 그래서 세 개의 무덤이 나란히 만들어지게 됐다. 뒷 사람들이 그곳에 보검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고 탐을 내어 무덤을 파헤치려 하면 천둥과 번개가 쳐서 파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말과 말안장, 보검을 묻은 세 개의 돌무덤을 ‘말무덤’이라고도 한다.   용마총의 주요 모티프는 ‘명마의 능력을 시험하는 장수’와 ‘말무덤’이다. ‘말무덤’ 설화는 장수가 자신이 타고 다니는 명마의 능력을 시험하려다가 부주의나 실수로 죽인 다음에 만든 말의 무덤에 관한 설화이다.   용마총은 ‘말무덤’ 설화의 일반적인 줄거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장수 대신 화랑이 등장한다. 충직한 말은 장수를 위해 온 힘을 다했는데도 화랑의 경솔함으로 죽임을 당한다. 화랑은 자신의 능력을 확대시켜 줄 말을 죽이는 한계를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민중은 이 전설을 통해 권위적이고 부도덕한 지배층의 횡포를 풍자한다. 결과적으로 말의 죽음은 말뿐만 아니라 소중한 말을 잃은 화랑의 비극적인 종말을 암시하기도 한다.                   자방송(子房松) 전설 이야기 자방송은 자방송이라 불리는 소나무에 대한 자연물 전설이면서 중국의 역사적인 인물인 장자방(張子房, ?~B.C. 186)에 대한 인물 전설이다. 자방송은 2002년 영덕군에서 발행한 영덕군지에 수록됐다. 채록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지품면 복곡리 북쪽 기슭에 자방송이라고 불리는 크고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에는 중국 한나라 건국 공신 장자방과 창해역사(滄海力士)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옛날 중국 진시황 대에 진시황의 폭정이 심했다. 이를 보다 못한 장자방은 한고조 유방(재위 B.C 202~B.C.195) 과 의논한 끝에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천하의 장사를 구하러 나섰다. 그럴 만한 인물을 쉽사리 찾지 못했다. 해동 (海東)에 역사(力士)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영덕 지역으로 와서 장사를 찾다가 지쳐서 이 소나무 아래 기대어 탄식했다.   “이곳까지 와서 아직도 장사를 만나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고조를 뵐까 ….”그때 기이하게도 그 소나무에서 계시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북으로 백여 리만 가면 천하의 장사가 있느니라”하는 것이었다.  자방은 곧바로 울진군 평해 지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창해역사를 만났다. 그 뒤부터 자방이 기대어 탄식한 이 소나무를 ‘자방송’이라 불렀다. 이후 사람들이 이 소나무의 가지만 베어도 재앙이 닥쳐왔다 한다. 그리고 백여 년 전에는 이 소나무 위에 또 다른 소나무가 돋아나고 있었다. 어떤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이 새순을 달여 마셨더니 정신병이 완치되었다는 말도 전한다.   자방송의 주요 모티프는 ‘장량과 창해역사’이다. 창해역사는 중국의 진시황을 습격한 인물이다. 창해역사의 정보가 역사에서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창해역사를 우리나라 인물로 설정하고 장자방, 즉 장량(張良)이 창해역사를 찾아 우리나라로 왔다는 설화가 강원도 지역과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다. 자방송은 창해역사보다는 장자방에 초점이 맞춰진 설화이다. 장자방이 기대어 탄식해 소나무의 이름을 자방송이라 불렀다 한다. 자방송의 새순을 달여 먹고 병이 나았다는 말도 전하는 것으로 보아 지역민들은 이 자방송을 영험한 나무로 인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고산 구룡폭포 전설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마을 뒷산이 마고산이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영덕읍에서 아주 첩첩산골이다. 참으로 신선한 곳이다. 영덕대게와 시원한 폭포를 동시에 체험하려면 마고산으로 가자.영동고속도로 만종 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나들목으로, 다시 34번 국도를 통해 안동과 신양을 거친다. 신양교에서 우회전해 1.8㎞쯤 가다가 대지교를 건넌 뒤 왼쪽 69번 도로를 따르면 옥계동이다. 대지교에서 오른쪽 길로 850m가량 가다가 우회전해 용덕교를 건너면 구룡폭포 입구로 이어진다. 해발 397m에 불과한 야트막한 마고산 기슭에 이처럼 크고 웅장한 폭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림잡아 높이 20m 를 넘는 구룡폭포는 삼면이 험상궂은 바윗덩어리로 둘러싸여 있고, 동남쪽으로만 트여 있다. 팔각산 자락에 펼쳐진 거대한 바위 병풍들과 깊은 계곡의 파노라마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아홉 용이 살았다는 깊은 못과 시 원한 물줄기다.   우리나라에는 구룡(九龍)이라는 이름의 폭포나 계곡이 많다. 비록 용이 실재하지 않는 전설상의 동물이지만 지극히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온 까닭에, 웅장한 폭포 아래 파인 깊은 웅덩이에 용이 살다 승천했다고 믿고 싶었으리라. 일룡 ․ 이룡 ․ 삼룡 ․ 사룡 ․ 오룡 ․ 육룡 ․ 칠룡 ․ 팔룡 등의 이름은 왜 붙이지 않은 걸까? 9라는 숫자를 신성시한 까닭임이 분명하다. 금강산의 구룡폭포를 필두로 오대산 청학동, 원주 치악산, 울진 불영계곡, 밀양 가지산, 남원 지리산 등의 구룡폭포가 대표적인 예다. 여느 구룡폭포와 달리 영덕 마고산 기슭에 자리한 구룡폭포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구룡기 마을에서 800미터 남짓 가니 삼거리가 나왔다. 곧바로 가면 대덕동이다. 오른쪽 작은 다리를 건너 내먹동 방면으로 800미터 가량 오르자 오른쪽으로 좁다란 샛길이 보였다. 진로를 방해하는 무성한 수생식물을 헤치며 20분가량 첨벙첨 벙 물을 거슬러 오르니 구룡폭포의 위용이 눈에 들어왔다.   해발 397미터에 불과한 야트막한 마고산 기슭에 이처럼 크고 웅장한 폭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주변 지형을 살펴보면 쉽게 의문이 풀린다. 이곳 구룡폭포의 물은 마고산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라 주왕산 동북쪽 자락의 왕거암(907m), 느지미재, 명동재(875m) 등지에서 흘러내린 10 여 가닥의 계류가 모인 뒤, 갑자기 땅이 푹 꺼지면서 이루어진 폭포인 까닭이다. 어림잡아 높이 20미터를 넘는 구룡폭포는 삼면이 험상궂은 바윗덩어 리로 둘러싸여 있고 동남쪽으로만 좁다랗게 트여 있다. 더욱이 폭포 아래 웅덩이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검푸르고 넓어 용 아홉 마리가 금방이라도 고개를 불쑥 내밀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무시무시한 분위기는 처음 느꼈다. 공포심을 자아낼 만큼 장엄한 이 폭포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교통이 불편하고 찾아가는 길이 무척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황장리 암석 동신 지품면 황장리에 있는 암석과 관련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암석 동신은 진시황이 만드는 만리장성에 쓰이기 위해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까지 움직였던 바위가 그곳에서 만리장성이 축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오도 가도 못해 그곳에 머물렀다는 신이담(神異譚) 내지 기이담(奇異談)이다. 2002년 영덕군지편찬위원회가 간행한 영덕군지에 수록됐다. 채록 경위는 밝히지 않았다. 옛날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 있는 큰 바위가 만리장성을 만드는 데 자신이 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중국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길을 떠나던 중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에 도착했다.   황장리에서 다시 길을 떠나려는데 멀리서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벌써 완성됐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바위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엄청난 성을 축조하는 데 자신이 쓰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바위는 마지못해 황장리에 머물기로 했다.   그런데 바위가 마치 중국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마을 사람들은 그 바위를 선돌이라고 불렀다. 선돌 위에 돌을 던져 얹히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동신(洞神)으로 신봉했다. 암석 동신의 주요 모티프는 ‘신이’와 ‘기이’, ‘득자(得子)’등이다. 바위가 움직인다는 것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는 광포 전설 중 하나이다. 영덕에 있는 암석은 만리장성을 쌓는데 일조하기 위해 움직였다고 하니 `기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암석에 돌을 던져 세우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득자’를 비는 기자의례(祈子儀禮)와 관련된 것이라고 하겠다. 기자의례는 생산력 신앙을 배경으로 한다. 전승 집단은 암석 동신 이야기에서 움직일 수 있는 바위와 아들을 낳게 해주는 바위가 자신들의 마을에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황장재   지품면 황장리와 진보면 신촌리를 연결하는 345m의 고개이다. 영덕읍 에서 출발하는 34번 국도가 이곳을 지나간다. 예전에도 영덕에서 진보로 가는 큰 길이 이 고개를 통과했다. 과거에는 ‘임물현(林勿峴)’으로 불렀다.   여지도서에 “임물현은 현 북쪽 57리에 있고 영해 읍령(泣嶺, 지금의 울치재)에서 산줄기가 이어진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대부분의 옛 지도에 황장재가 표현돼 있는데, 임물현, 또는 임울현(林蔚峴 혹은 林鬱峴)으로 표기했다.   황장재는 낙동정맥의 화매재와 대둔산 사이의 고갯마루이다. 안동 간고등어를 탄생시킨 유래가 깊은 역사의 고개이다. 황장재는 황장리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황장재 주변 산은 심승산 또는 실어봉이라 불렀다.   영덕장을 보고 가던 장꾼들이 이 봉우리에서 휴식을 취하고 떠날 때 주변 경치 구경에 정신이 팔려 생선 보따리를 두고 그냥 간다는 이야기에서 ‘생선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의 실어봉(失魚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황장재는 낙동정맥의 한 구간으로, 영덕의 서쪽 경계이면서 영양에서 청송을 잇는 동쪽 경계에 자리한다. 북동으로는 화매재를 지나 포도산과 명동산으로 이어진다. 남서로는 대둔산(900.1m)으로 연결된다. 지질은 중생대 백악기 신라층군의 화산암인 보경사반암류로 이뤄져 있다. 황장재를 기준으로 영덕 오십천의 지류와 청송 반변천의 지류인 서시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식생은 고개 주변의 산지에는 숲이 울창하다. 소나무와 낙엽활엽수가 섞인 혼합림을 이루고 있다. 황장재는 국도 제34호선(경동로)이 지나며, 부근에는 황장재휴게소가 있다. 고개 주변에는 ‘지품면 황장재’ 라는 표지석이 있고 작은 공원과 주차장도 있다. 도로로 끊긴 낙동정맥에 2021년 8월 기준 동물의 이동을 위한 생태 통로 터널을 조성 중이다. 황장재는 낙동정맥을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산행의 출발점이자 도착지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황장재를 경계로 영덕은 복숭아가 유명 하고, 경상북도 청송은 사과 산지로 유명하다.         동해명산 대둔산 영덕군 지품면 기사리와 청송군 진보면 및 청송읍에 걸쳐 있는 산이다. 대둔산은 영덕군 지품면 기사리와 청송군 진보면 괴정리 및 청송읍 월외리에 걸쳐 있는 높이 900.1m의 산이다. 대연산(大延山) · 둔동산(芚洞山) · 느지맥이재라고도 부른다. 대둔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보현과 여지도서(輿地圖書) 진보현에 둔동산으로 기록돼 있다. 둔동산이 어떤 사유로 대둔산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둔산 북쪽 사면 아래 괴정리 둔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 둔동산으로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대둔산 명칭 역시 둔동산과 마찬가지로 둔전(屯田)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 대둔산은 주왕산국립공원의 북쪽에 속한다. 북서쪽으로는 황장재(740m)와 연결된다. 남동쪽은 먹구등 (846.2m)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산이다. 기반암은 중생대 백악기 화산암인 각력질안산암에 해당된다. 안산암은 침식에 강해서 급경사지를 이루어 지세가 험준,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 남사면의 골짜기를 따라서는 괘천이 서류한다. 황장재를 기준으로 영덕 오십천의 지류와 청송 반변천의 지류인 서시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식생은 소나무와 참나무 등 다양한 활엽수가 섞인 혼합림을 이룬다. 소나무는 능선과 서쪽 사면에 분포하고 정상 부근과 계곡 사면에는 활엽수가 우세한 편이다.   대둔산은 주왕산국립공원 내에 자리하며, 비법정 탐방로로 지정돼 있다. 정상에는 표지석이 없고 ‘대둔산’ 이라는 표지판만 나무에 걸려 있다. 주변에 키 큰 참나무가 많아 조망은 불가능하다. 서쪽 능선으로 청송군의 태행산이 이어진다. 청송군 쪽으로 월외 · 달기폭포가 형성돼 있다.   우리나라에 대둔산을 명칭으로 하는 산은 3곳이다. 한자는 다르지만 전북 완주와 충남 논산 경계의 대둔산 (877m)과 전남 해남 두륜산도립공원의 대둔산(671m) 등이 있다. 그중 가장 높은 산이 영덕과 청송 경계의 대둔산이다.   산행은 황장재~갈평재~대둔산~먹구등~명동재~느즈미재~왕거암~대궐령~용전리로 내려오는 코스로, 거리는 20.85㎞로 6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오천솔밭 유원지 송림과 각종 야생숲, 고목이 어우러진 자연발생 유원지이다. 영덕군 오천솔밭은 지품면 오천리 마을 앞 오십천변에 수령 150여년 되는 푸른 소나무 400~500여 그루가 300m정도 울창한 송림으로 이뤄져 있다. 오십천령이 물 위에 떠보인다고 해 부수령(浮水嶺)이라고 불린다.   솔밭 앞에는 오십천의 맑고 푸른 물이 이곳에 강을 이뤄 유유히 흐르고 맞은편에서는 수십 길의 절벽이 병풍 처럼 펼쳐져 있다. 솔밭 앞에는 오십천이 흐른다. 농바우, 문천바우 등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들로 장관을 이뤄 여름철 피서지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곳은 차박이나 노지캠핑을 즐기는 캠퍼들 사이에서 유명한 곳이었다. 2021년 9월에 캠핑장이 조성, 현재는 무료 캠핑이 불 가능하다.   영덕의 오천솔밭은 영덕군 지품면 오천1리에 위치해 있다. 1428년경 야은(野隱) 배담(裵湛)이 개척한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오천솔밭의 적송은 그 후손들이 조성했다. 소나무 숲과 캠핑장, 화장실, 개수대 등이 갖쳐줘 있다. 영덕역과 영덕 나들목에서 가깝고, 인근에 영덕 복숭아 정보화 마을이 있다.   천솔밭 옆으로는 은어로 유명한 오십천이 흘러내린다. 절벽으로 형성된 낮은 산이 강을 따라 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식수대, 화장실, 주차장 시설등을 갖춘 자연이 선물해 준 자연유원지로, 가족단위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가는 길 마다 양옆으로 과수원에는 영덕복숭아가 열려있다. 도로변에서는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맛있는 영덕복숭아를 판매하고 있다. 인심 좋은 분들이 많아서 덤으로 영덕복숭아와 천도복숭아도 바로 따서 맛볼 수 있다. 오천솔밭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솔밭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저것은 버들치와 다슬기잡이 체험장 이다. ‘오천솔밭’은 2016년 국민안전처 물놀이 안전명소로 최종 선정됐다. 물놀이 안전명소는 국민들이 물놀이를 안심하고 즐길 수 있도록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지자체의 자율적 안전관리를 유도하기 위해 2014년부터 선정해 왔다. 물놀이 안전명소 선정은 관광객들이 사고위험 없이 안심하고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물놀이 안전사고 여부 △안전관리요원 배치 △안전시설 설치△응급구호시설 운영 등 안전관리분야와 환경위생, 이용편의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선정한다.     용추폭포 영덕군 지품면 신안리의 오십천 중상류에 있는 폭포다. 용추폭포는 심산에 길게 뻗어 흐르는 대둔산 계곡물이 합류, 폭포가 된 곳이다. 15m 낙차의 폭포수와 원시 그대로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서 주위의 울창한 숲과 조화를 이루어 절경을 이룬다. 용추폭포는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태의 폭포라는 뜻이다. 용추폭포는 수직절리를 따른 균열에 2단으로 발달돼 있다. 폭 3m, 높이 6m로 중간 규모이다. 폭포 아래쪽에는 폭포의 침식으로 형성된 폭호와 넓은 소(沼)가 함께 잘 나타난다. 폭포의 기반암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의 각섬석화강암으로 미지형, 요철, 사면향 등 다양성을 갖는다.   주변에 수직의 하천 절벽과 기반암 하상, 하천 습지, 애추(崖錐, 가파른 낭떠러지 밑이나 경사진 산허리에 고깔 모양으로 쌓인 흙모래나 돌 부스러기) 등 다양한 지형이 분포한다. 폭포 위에는 기반암 하상이 나타나고 폭포 아래에는 폭호가 발달한다. 두부침식(강의 최상류부를 침식시켜 하천의 길이를 연장하는 작용)으로 곡류목 (Meander Neck, 곡류 하도의 만곡부)이 절단되며 협곡을 이룬다. 폭포 앞 넓은 소 부근에는 갈대와 수초가 자라 하천 습지가 형성돼 있다. 용추휴게소 부근 다리에서 관찰할 수 있다. 폭포는 2단으로 발달, 감입곡류 하도가 절단되는 곡류핵 부분에 자리한다. 접근성이 좋아 폭포의 규모와 형태를 관찰하기에 편하다. 특별한 훼손없이 자연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지역 대표성, 특이 · 다양성 등 지형 경관이 우수, 보존 가치가 높다.         구룡폭포 영덕군 지품면 용덕리에 있는 폭포다. 지품면 용덕리와 송천리의 경계인 새밭골 부근 용덕천 상류에 자리한다. 높이가 20m가 넘는다. 좌우가 높고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구룡폭포는 폭포 아래쪽에 형성된 넓고 검푸른 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설화가 전해져 ‘구룡폭포’라 불린다.   구룡폭포의 크기는 폭이 10m, 높이가 20m 정도로 대규모이다. 기반암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각섬석화강암이다. 폭포 상류의 화강암은 판상절리와 수직절리가 발달, 암석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폭포 하부에는 넓은 연못이 형성돼 있다. 폭포 하부의 암석은 폭호의 와류에 침식, 동굴을 이루고 있다. 폭포 아래쪽 연못에는 큰 바위와 자갈 · 모래 등이 퇴적돼 있다. 폭포 주변에는 높은 절벽과 함께 암벽에서 부서진 돌들이 원추형으로 쌓인 너덜지대인 애추(崖錐=Talus, 가파른 낭떠러지 밑이나 경사진 산허리에 고깔 모양으로 쌓인 흙모래나 돌 부스러기)가 발달돼 있다. 기반암 하상과소규모 급류성 폭포, 소 등 다양한 지형이 분포한다. 구룡폭포는 영덕에서 청송 방향으로 국도 34호선을 이용, 신양삼거리 에서 국가지원지방도 69호선으로 옮겨 용덕리로 이동하면 새밭골에 도 달한다. 계곡을 따라 10분 정도 이동 하면 관찰할 수 있다. 지역 대표성이 높다. 병풍을 두른 것처럼 급경사 지형에 기반암 하상이 폭포의 상단을 조각하고 있다. 폭포의 형성과 기반암 특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고 학술 및 교육적인 가치도 높다. 폭포의 구성 요소 와 주변 지형도 다양하게 분포, 보존 가치가 높은 지형으로 평가되어 보존 대책이 필요한 지형이다.           영덕 복숭아마을 태백의 매봉산에서 시작된 낙동정맥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남으로 향하며 통고산, 백암산을 빚어 놓고 주왕산으로 내닫는다.   영덕 중에서도 지품면은 전국에서 가장 큰 복숭아과수원지대다. 봄이면 핑크빛으로 수줍게 핀 복사꽃 관광지로도 알려져 있다. 복사 · 사과 · 배꽃이 울긋불긋 피어있는 시골이다. 오지의 비경과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 지품면이다.   아름다운 복사꽃밭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1959 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사라호에 논과 밭이 폐허가 됐다. 먹고 살기가 수월치 않았던 이 지역 사람들이 하천변에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밭고랑으로 복숭아밭을 하나둘씩 늘려가 지금은 100만 평이 넘는 복숭아밭이 됐 다. 다른 곳보다 모래가 많이 섞여있고 물이 잘 빠지는 토질 때문에 복숭아도 단맛이 아주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일대를 복숭아 마을로 불린다.   영덕복숭아마을은 지역 특산물인 복숭아와 관련된 각종 체험 프로그램 을 운영하고 있다.   영덕복숭아마을로 지정된 삼화리는 관동, 용수, 전여 등 세 마을을 합해 붙여졌고, 오천리는 ‘오일(午日)’ 의 ‘오(午)’와 ‘김천(金泉)’의 ‘천(泉)’ 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복숭아 농사는 꾸준한 발전을 거듭, 영덕을 대표하는 농산물로 자리 잡았다. 1962년 복숭아 통조림이 생산되면서 판로가 확대됐다. 1970년부터 복숭아 재배는 본격적으로 확산 됐다.   영덕군에서도 복숭아가 만개하는 4월 복숭아 큰잔치라는 축제를 연다. 복숭아마을을 찾는 관광객 수가 많아지면서 지속적인 발전과 농가 수익 확대에 이바지하고자 정보화 마을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행정안전부는 영덕군 지품면 오천 · 삼화리를 정보화 마을로 지정했다. 오천리는 남북으로 길게 자리잡은 형태로 마을의 중심부를 오십천이 서에서 동으로 관통한다. 오십천이 휘감아 흐르는 주변으로 인가가 들어서 있 다.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지대를 이 룬다. 마을의 북쪽과 남쪽은 산지가 들어서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영덕복숭아마을에서는 마을정보 센터를 운영, 주민들에게 정보화 교육을 하고 있다. 누리집에서 복숭아를 비롯한 지역 특산품 판매, 관광 안내, 지역 뉴스 제공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주변 유관기관 과 협력, 복숭아병조림만들기, 복숭아따기, 오천옹기만들기, 체험사진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지품면 민간인 희생사건’ 유족 승소 영덕 지품면에서 빨치산에 약탈당했는데 “내통했다”며 총살당한 유족이 75년 만에 국가배상을 받게 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빨치산으로부터 식량을 빼앗겼는데도 ‘내통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한 농민의 유족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사건 발생 75년 만이다.   지난해 9월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104단독 이회기 판사는 A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소송에서 “피고가 원고에게 1억 9200만 원을 지급하라”고 최근 판결 했다. A씨의 선친은 1949년 12월 경북 영덕 지품면의 산간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이던 그 무렵 10명이 넘는 빨치산이 이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의 식량을 털어갔다. 군경은 A씨 선친을 비롯한 마을 젊은 남자들을 연행해 구금했다. 과거 빨치산의 위협에 못 이겨 음식을 준 적이 있던 A씨 선친은 ‘식량을 제공하는 등 내통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2023년 8월 진실 · 화해를 위한 과거 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영덕 지품면 민간인 희생 사건’에 관해 진실규명 결정을 해 A씨에게 통지했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을 “군과 경찰이 비무장·무저항 상태 민간인들을 연행해 적법한 절차없이 집단 살해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A씨는 올해 1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A씨 선친은 정확한 사실관계 파악 없이 단순히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의심만으로 군경에 의해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 당했다”며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아울러 “A씨 등 유족이 겪었을 정신적 고통, 그 후 상당 기간 계 속됐을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 어려움 등을 고려해 위자료를 책정했다”고 설명했다.       지품면 3.1 독립운동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지품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 29인은 태화 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2시 30분께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로써 전국적으로 일어난 3 · 1운동이 시작됐다.   3월 11일 무렵 지품면 황장동 교회의 집사 주명우는 ‘매일신보’를 보고 서울과 기타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3월 16일 영해면의 김세영이 보낸 김중명으로부터 영덕군에서도 3·1운동이 추진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3월 19일 원전동 장날 만세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종이 깃발을 만들어 ‘대한독립 만만세(大韓 獨立 萬萬歲)’라고 적은 후 마을 신자 14~15명에게 시위 참여를 권유하게 된다. 3월 19일 정오 무렵 원정동 시장에 도착한 주명우는 종이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죽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군중들에게 소리 쳤다. 황장동 교회 신자인 정순용 · 김주일 · 박기동 · 김석이 등도 주명우의 권유와 외침에 호응했다. 이날 이석산 등 시장에 모인 군중들도 동참해 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 날 20일에는 신안동의 윤석초 집에 임순근 · 문의향 · 김형문 등이 모였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3 · 1운동이 확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들도 ‘정치의 변혁’을 희망하고 거사를 일으키자고 결의했다. 구한국 국기를 본떠 종이 깃발 1기(旗)를 제작했다. 임순근은 깃발에 ‘대한 조선 독립만세’라는 글을 썼다.   오후 9시께 윤석초 집에 약 60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문의향이 선두에서 깃발을 들고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마을 주민들은 그 뒤를 따라 마을 일대를 줄지어 행진했다. 약 2시간 동안에 걸쳐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해산했다.   3월 24일 아침 원전동 장날을 맞아 황장동의 윤악이가 원전동의 신분금을 찾아가 “오늘 여기 시장에서 구한국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윤악이는 주명우의 부인으로 남편이 3월 19일 만세 시위 운동으로 체포됐다. 신분금은 김태을의 부인으로 역시 남편이 3월 18일 영덕 읍내에서 만 세 시위를 하다 체포됐다.   윤악이와 신분금은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고 시장으로 나갔다. 정오 무렵 윤악이는 시장 군중들에게 “자신들은 여자다. 하지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여 한국 만세를 부른다” 등의 내용으로 연설했다. 신분금도 호응,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윤악이 · 신분금은 지품경찰 관주재소 경찰에게 체포됐다.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8, 6 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지품면 3 · 1독립운동은 3회에 걸쳐 일어났다. 개신교 및 유림 세력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체포된 남편에 이어 부인들이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한 것은 전국에서 유일한 사례이다.         지품을 빛낸 독립운동가 김혁동   독립운동가 김혁동은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덕면 읍내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1889년 6월 4일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洛坪 洞)에서 태어났다. 1901년에 지품면 낙평동에 교회를 설립했다. 예수교 북장로파 영수로 활동했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영덕군 영덕면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영덕 지역 만세운동의 주도 세력은 기독교 세력과 기독교 · 유림의 연합 세력, 그리고 유림 세력의 세 계열로 구분된다. 영덕면의 경우 지품면 원전동의 시위를 기독교 세력이 주도했 다. 영해·병곡·남정면의 시위는 기독교·유림의 연합 세력이, 지품면 신안동과 창수면의 시위는 유림 세력이 주도했다.   1919년 3월 초 지품면 낙평동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을 만나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었다. 영덕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에 합의, 영덕면 금호동 교회 조사 강우근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강우근이 동의하자, 이후 영덕면의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강우근은 영덕읍 교회 등 4개의 교회를 감독하는 지위에 있었다.   3월 17일 이승구 · 안상룡 · 이명언· 김태을 등과 만세시위를 논의했다. 16, 17일 김암우·이정규·강대열·김용하 등에게 3월 18일 영덕 읍내 장날을 기회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고 제의 했다. 제의를 받은 인물들은 각자 교인 동지들을 모았다. 1919년 3월 18일 영덕면의 화개 · 금호동, 남정면의 남정동 등지로부터 남석동 장터에 모인 50여 명의 기독 교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백 명의 장꾼들이 이에 호응했다. 일제 경찰은 주도 인물들을 체포하고 군중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20년 3월 2일 풀려났다. 이후 고향에서 교회 활동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지품을 빛낸 여성 독립운동가 윤악이 윤악이는 일제강점기 지품면 원전동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 운동가이다. 그는 1897년 4월 17일 영덕군 지품면 원전동에서 태어났다.   남편은 1919년 3월 19일 지품면 시위를 주도한 주명우이다. 3월 24일 원전동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 복역했다. 1962년 2월 26일 사망했다. 영덕군의 3 · 1운동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도했다. 지품면 낙평동에 사는 기독교 장로교회 지도자인 김세영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서울 시위를 목격하고 3월 3일의 고종 인산에 참여한 후 4일에 귀향했다. 김세영은 곧바로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만세시위를 모의했다. 하지만 김세영은 서울을 다녀온 까닭에 경찰의 예의주시를 받았는데, 다음날에 전격 체포, 1주일간 예비검속을 당했다. 김세영을 대신, 권태원이 시위 준비에 나섰다.   1919년 3월 18일 영해면의 장날을 맞아 오후 1시에 만세시위가 발발했다. 이날 시위에는 3000여 명이 가담했다.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는 물론이고 공립보통학교과 우편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집기를 부수고 건물을 파괴했다. 다음날에도 수천 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이어 갔다. 대구로부터 급파된 보병 80연대 군인 17명과 헌병이 총격을 가하면서 8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영해면의 시위는 곧 주변으로 확산 됐다. 원전동에 사는 기독교 장로교회의 지도자인 주명우는 김중명으로 부터 김세영이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 을 촉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만세시위를 모의했다.   주명우는 기독교인 10명을 규합, 원전동시장 장날인 3월 19일 오전11시 30분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헌병주재소 앞에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던 주명우는 경찰에 의해 즉각 체포됐고 군중은 해산했다.   원전동시장의 다음 장날인 3월 24 일 윤악이는 신분금에게 “오늘 여기 시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자”며 독립 만세시위를 주동할 것을 제안, 즉시 동의를 얻었다. 신분금 역시 3월 19일 시위로 남편인 김태을이 검거된 형편 이었다.   정오가 되자 시장통에서 독립선언식을 열고 ‘우리는 여자인데도 한국 독립을 희망하고 한국의 만세를 부르짖는다’며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이어 신분금과 함께 시위군중을 이끌며 만세행진을 하다 시위 현장에서 체포됐다.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지품면 문화유산 돈수재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 재실이다. 돈수재(遯峀齋)는 김덕유(1694~176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김덕유의 자는 주언(周彦)이고, 호는 돈수(遯 峀)이다. 1804년(순조 4) 김덕유의 후손인 김정련(1783~1862)의 주도로 수안김씨(遂安金氏) 부장공파(部將 公派)와 지역 유림의 공론으로 건립했다. 영덕군 지품면 송천리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1590년에 수안김씨의 묵와 김간이 피난처를 찾는데 ‘송(松)’자 든 지명을 찾아서 영해면 괴시리에서 여기로 옮겨 마을 이름을 송대(松臺) 라 했다. 또 들국화가 많이 피어 국골(菊谷)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돈수재는 김정련이 사림과 지역민의 협조를 얻어 1804년에 건립, 1980년대에 중수했다. 돈수재는 정면 6칸 측면 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문간을 중심으로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문간방과 부엌·아랫방이 있다. 그 뒤에 안채가 있다. 정면의 사랑마루와 아랫방이 양쪽으로 돌출, 양날개집 형태를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 이다. 다소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다시 바닥면을 90㎝가량 올려 방과 마루를 꾸몄다. 왼쪽으로 돌출되어 날개를 이룬 정면 1칸 측면 2칸의 사랑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오른쪽은 앞 쪽이 사랑방, 뒤쪽은 책방이다. 사랑채 뒤쪽은 영덕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래칸을 사이에 두고 곳간과 상방이 붙어 있어 안채로 이어 진다. 안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 의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은 상방, 오른쪽은 도장방과 2칸 규모의 안방, 그리고 2칸 부엌이 건물 전면까지 이어 진다. 가구는 대들보 위에 동자기둥 을 세워 종량을 받고 그 위에 제형판 대공을 세워 마룻대[종도리]를 받는 간결한 5량가로 돼 있다. 1995년 12월 1일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1980년 중수했지만, 건물은 조선 후기 건축 요소를 잘 보여준다.         ‘경와(敬窩)’ 현판   경와(敬窩), 선비정신을 새긴 글자와 그 터전이다.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위치한 ‘경와(敬窩)’ 현판은 조선 후기 학자 김시하(金時夏, 1707~ 1801)의 학덕을 기리고자 걸린 편액이다. ‘경와’라는 명칭은 ‘공경의 거처’를 뜻한다. 유학적 가치인 경(敬)을 삶의 중심에 두고 실천했던 김시하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본래 이 편액은 김시하가 거처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고택에 걸려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훼손되자, 인근의 정자인 반송정(盤松亭)으로 옮겨 보존하게 됐다. 이로써 ‘경와’는 단순한 집 이름을 넘어, 지역 학풍과 가문 정신을 상징하는 문화적 의 미를 지니게 됐다.   ‘경와’ 현판이 현재 걸려 있는 반송정은 경주김씨 김주린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눌곡종택의 부속 건물이다. 눌곡종택은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전통을 간직한 고택으로, 대청, 사랑채, 안채, 그리고 반송정 등 다양한 공간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배치 돼 있다. 반송정은 선조들이 자연 속에서 학문을 닦고 시문을 읊으며 휴식을 즐기던 장소다. 지금도 고즈넉한 분위기와 선비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경와’ 현판과 눌곡종택은 단순한 물리적 건축물을 넘어, 유교적 도덕과 가문의 전통, 그리고 지역 사회의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정성스럽게 새겨진 ‘敬窩’ 두 글자에서 선비의 마음가짐과, 이를 이어가고자 하는 후손들의 깊은 뜻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김성용 기자     <<이 기사는 영덕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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