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수면 고려시대 예주의 땅조선시대 수많은 인재 배출   울울창창 산속에 둘러싸인 마을동해로 흐르는 `송천`이 있고그 물은 푸르고 맑아 마을 이름을푸를 창(蒼)자 써서 창수라 지었다나옹선사 태어났고 장육사 있는 곳      경북 영덕군 창수면은 고려시대 예주의 땅으로 시작해 1331년 덕원소도호부, 1413년 영해부로 개칭됐다. 이후 1895년 영해면에 속했다가 1914년 영덕군에 통합되면서 오늘날의 창수면으로 자리 잡았다.   창수면은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산간 지역이지만 단순한 오지에 그치지 않는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남긴 발자취가 서려 있으며, 풍요로운 자연과 더불어 아기자기한 체험 여행의 명소로도 손꼽힌다. 흙과 바람, 물을 직접 느끼며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송천은 동해로 이어지며 푸르고 맑은 물빛을 자랑한다. 이 물줄기 덕분에 마을 이름에도 푸를 창(蒼)자가 쓰였다. 또한 고려 말 고승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이자 장육사가 자리한 불교의 명소이기도 하다.   창수면은 영양군과 접해 있어 교통과 문화의 경계 역할을 해왔다. 대표적인 고개인 서읍령(창수령)은 창수2리에서 영양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현재는 918번 지방도로가 통과한다. 옛날에는 영해와 내륙을 잇는 주요 통로였으며, 고려 말 몰락한 왕족들이 이 고개를 넘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 『젊은날의 초상』의 배경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와 자연, 설화와 문학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창수면은 유서 깊은 고장으로, 지금도 그 뿌리 깊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창수면은 어떤 곳    경북 영덕군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창수면은 군 내에서 가장 넓은 고을이다. 면적은 152.29㎢, 인구는 올해 8월 기준 1962명으로 △가산 · 갈천리 · 미곡 · 백청 · 보림 · 삼계 · 수리 · 신기 · 신리 · 오촌 · 인량 · 인천 · 창수리 등 13개 법정리로 구성돼 있다. 면 소재지는 신기리로, 창수면 행정복지센터와 창수초등학교, 우체국, 보건지소, 파출소 등이 자리한다. 창수면은 동쪽으로 병곡면, 서쪽으로 영양군 영양읍 무창·양구리, 남쪽으로 영해면 원구리 · 대리, 북쪽으로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와 접한다. 사방이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태백산맥이 북쪽 경계를 형성한다. 송천과 울령천을 비롯해 국골거랑, 숯골거랑, 오서천 등 여러 하천이 흐르며, 인량리 앞 들판을 제외하면 평야는 거의 없다. 역사적으로 창수면은 조선시대 영해부의 오서면(烏西面)과 서면(西面)으로 구분돼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 두 면이 합쳐져 현재의 창수면이 됐다. 면 명칭은 본래 이곳의 역원(驛院)인 ‘창수원’에서 비롯됐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도 기록된 교통 요충지였다. 고대에는 우시산국이 있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1833년(순조 33)에는 창수면이 다시 영해도호부의 서면과 오어면으로 편제됐다. 이후 1895년 오어면이 오서면으로 개칭됐고, 1914년 영해군이 영덕군에 통합되면서 창수면으로 명칭이 정착됐다. 현재의 13개 법정리는 1988년 군 조례 제972호에 따라 확정된 것이다. 지형은 서북쪽으로 갈수록 산악이 험준하며, 북쪽에는 삼승령과 독경산, 서쪽에는 울령과 독경산, 남쪽에는 맹동산과 형제봉이 위치한다. 교통은 지방도 제918호선과 국가지원지방도 제69호선, 지방도 제920호선이 관통하며, 주요 마을은 골짜기와 산자락을 따라 형성돼 있다. 좁은 평야에서는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문화유산도 풍부하다. 고려 말 고승 나옹왕사가 창건한 장육사가 대표적이다. 이곳의 건칠관음보살좌상은 보물로 지정돼 있으며, 대웅전과 화수루는 경북도 유형문화재다. 창수면은 영덕군의 서북단을 차지하는 산간 오지이지만, 오랜 역사와 불교 문화, 그리고 태백산맥이 빚어낸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창수면 마을유래     인량리    조선시대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로 꼽힌다. 예주(禮州) 사림의 본거지이자 영해부 5대 성(姓), 8대 종가(宗家)가 뿌리를 내린 곳으로, 수백 년간 학문과 충효의 전통을 이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인량리보다 ‘나라골’이라는 옛 이름을 더 사랑한다. 전해 내려오기로는 삼한시대 우시국의 도읍이 이곳에 있었다 하여 나라골이라 불렸으며, 국동(國洞)으로도 불렸다. 마을 뒤 산세가 학이 날개를 펼치고 나는 듯한 형국이라 하여 나래골·익동·비개동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과거길에 오른 인물이 끊이지 않아 사모관대 행렬이 이어졌으며, 근현대에도 박사 학위자만 40여 명, 서울대 출신이 40여 명에 달한다.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마을의 위상이 오늘날까지 실감나게 한다.   역사적으로 인량리는 삼한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고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고, 대한제국기에는 영해군 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상동과 인하동을 합쳐 인량동이라 하였으며,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됐다. 1988년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면서 현재의 인량리가 되었으며, 현재는 인량1 · 2리로 분동돼 있다.   영해 인량리와 포항 흥해, 울진 평해는 경북 동해안 3대 곡창지대로 손꼽혔다. 배산임수의 남향 지세 덕분에 옛 세도가들은 영해부 최고의 명당인 인량리에 앞다투어 터를 잡았다. 고려 말부터 번성한 이 마을에는 조선시대 들어 대흥 백씨, 재령 이씨, 안동 권씨, 야성 정씨, 무안 박씨, 영양 남씨, 영천 이씨, 신안 주씨 등이 입향해 집성촌을 이뤘다.   마을 곳곳에는 종택과 고택이 즐비하다. 충효당(운악 이함 종택), 오봉종택(오봉 권책 종택), 용암종택(용암 김익중 고택), 갈암종택(갈암 이현일 종택), 우계종택(우계 이시형 종택), 소호종택(소호 박신지 종택)이 대표적이다. 또한 삼벽당(이중량 종택), 원모재(함양 박종산 종택), 자운정(석계 이시명 고택), 처인당(영양 남씨 남달만 고택), 강파헌정침(청백리 권상임 고택) 등도 세월을 견뎌내며 남아 있다.   인량리는 현재는 예전만큼의 세를 유지하지는 못하지만, 조선 사림 문화의 중심지로서 역사적 의미와 학문적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마을 지명도 독특하다. 동쪽에는 강학소, 서북쪽에는 사당골, 강학소 서쪽에는 세원모치, 나라골 아래쪽에는 아랫나라골(아릿마)이 있다. 동쪽으로는 병곡면 사천리, 서쪽으로는 가산리와 신기리, 남쪽으로는 영해면 원구리와 마주하며, 북쪽으로는 칠보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명문가의 전통과 더불어 풍수지리적 명당의 기운을 간직한 인량리는 오늘날에도 영남 사림의 자취를 고스란히 전하는 산 역사이자 문화의 보고로 평가된다.   강학소=인량리 동쪽에 있는 마을사당골=웃나라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세원모치=강학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신원이란 원집이 있었다아랫나라골(아릿마)=나라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     가산리   가산리는 산세가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의 마을로,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행정리상 가산1리와 가산2리로 나뉘어 있다. 가산1리는 원래 가사리 또는 단산이라 불렀다.구미, 동짝모태, 두들마, 복치락골, 서원마, 서짝모태, 우렁티, 점못이 등 여러 자연 마을이 있다.   역사적으로 가산리는 조선시대 영해도호부에 속한 동리였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해군 서면으로 편제됐으며, 1914년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면서 우앙현과 우상동 일부를 합쳐 가산동이라 불렸다. 이후 1988년 행정구역 개칭에 따라 가산리가 되었다.   마을은 등운산 줄기와 비봉산(103.8m), 대봉산(184. 2m) 끝자락을 따라 가옥들이 집촌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앞쪽으로는 가산들 · 앞들이라 불리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논농사가 활발하다. 마을 뒤편의 가산지는 농업용수를 공급하며 지역 농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국가지원지방도 제69호선이 마을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해 교통 접근성도 좋다.   가산리 일대는 예로부터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역동 우탁(1263~1342)이 이곳의 경관을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회양당 권상정은 ‘가산팔경’을 지정해 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주요 유적으로는 구산정, 봉주정사, 추달재, 불매정, 우현정 등이 있으며, 복치락골에 위치한 복철암은 고려 고승 나옹대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진다.   가산리의 입향조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후 함양 박씨와 영양 남씨가 정착해 세거해 왔다. 가산2리 우렁리 마을은 안동 권씨가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적으로 가산리는 동쪽으로 인량리, 남쪽으로 신기리, 서쪽으로 미곡리, 북쪽으로 등운산과 접해 있다. 영해에서 서쪽으로 지방도 제918호선을 따라 5㎞ 이동한 뒤 창수면 소재지를 거쳐 국가지원지방도 제69호선을 타고 1㎞ 정도 들어서면 도착할 수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가산리는 예부터 지금까지 명승지로 사랑받아 온 유서 깊은 마을로 평가된다.   구미(龜尾)=가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거북이 꼬리와 같다동짝모태=가산 동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두들마(두들모치)=구미 서북쪽 두둘(둔덕)에 있는 마을서원마=가산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단산서원(丹山書院)이 있었다서짝모태=가산리 서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우렁티(雨仰峴, 雨峴)=큰 한티와 작은 한티에 둘러쌓여 있는 마을점못(점촌)=가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신기리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는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 ‘새술막’ 또는 ‘신기’라 불린 데서 유래한 마을이다.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행정리로 신기1리와 신기2리로 나뉘며 가나무지, 반송정, 배나리, 우장골, 중간마, 학교옆 등 여러 자연마을이 있다.   조선 후기 영해도호부 서면에 속했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해군 서면으로 편제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신기 · 우정동을 합쳐 신기동이라 하고 창수면에 편입했으며, 1988년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면서 신기리로 불리게 됐다.   신기리는 동쪽으로 인량리, 서쪽으로 신리, 남쪽으로 영해면 묘곡리, 북쪽으로 가산리와 접한다. 면적은 20.55㎢(2020년 말 기준)이며, 동쪽으로 인량대산, 남쪽 옥금 뒤 연봉, 서쪽 형제봉, 북쪽 열고개로 둘러싸인 산촌 마을이다. 대체로 산지가 많아 평야는 드물다.   마을은 창수면의 중심지로, 창수면 행정복지센터와 창수초등학교, 창수우체국, 창수보건지소, 창수파출소 등 주요 관공서와 공공시설이 밀집해 지역 행정과 생활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신기리 일대에는 다양한 문화유적이 전해진다. 대표적으로 ‘옥산(玉山)’ 각자(刻字), 영모당 이공 묘도비, 사암재, 유한인 타루비, 청류정 등이 있으며, 자연마을 반송정에는 나옹대사가 출가할 때 꽂아둔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나무는 6 · 25 전쟁 이후 고사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우장골에는 한때 위정사(葦井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행정과 문화, 전설이 공존하는 신기리는 창수면의 중심지로서 현재까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가나무지=새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가죽나무가 많았다. 반송정(盤松亭)=새술막 동쪽에 있는 마을로 반송나무가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출가(出家)할 때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 한다 배나리=반송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와 배가 드나들었다우장골(위장골, 雨井洞, 葦長谷)=새술막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위정사(葦井寺)가 있었다중간마=신기 북쪽에 있는 마을학교옆=새술막 남동쪽에 1936년에 신축된 초등학교가 있는 옆 마을   신리리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는 마을 지형이 배와 같다 하여 ‘새배실’이라 불리다가, 한자로 신리(新梨)라 표기한 데서 유래했다. 마을에 큰 배나무가 있어 ‘새배실’ 또는 ‘신리’라 했다는 설도 있으며, 이후 신이(新梨)가 변해 신리(新里)로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행정리상 신리1리와 신리2리로 나뉘며 도리갈면, 갱변모치, 마리배기, 배락딤, 새모치, 선들, 새배실, 아릿모치, 웃모치, 재공모치, 정자모치 등 여러 자연마을이 있다.   조선 후기 영해도호부에 속했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해군 서면에 편제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갈상동을 병합해 신리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했다. 이후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면서 오늘날 신리리가 됐다.   신리리는 동쪽으로 형제봉, 서쪽으로 읍령, 남쪽으로 맹동산, 북쪽으로 독경산이 둘러싼 산촌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울령천이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가며, 울령천 양편에는 마을과 농토가 자리 잡고 있다. 2020년 말 기준 면적은 12.20㎢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북쪽과 동쪽으로 갈천리, 서쪽으로 창수리, 남쪽으로는 형제봉 너머 영해면 대리와 맞닿아 있다.   자연마을 정자모치에는 무안 박씨 박재만이 도천정사(道川精舍)를 창건해 교육에 힘썼으며, 그의 손자인 박우락 또한 유학 교육을 이어갔다고 한다. 정자모치는 도천(道川 또는 導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신리리의 마을 개척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을에서 약 600년 된 느티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받들어 온 점에 비춰 14~15세기 무렵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도리갈면=신리와 갈천리에 걸쳐있는 마을갱빈모치(강변못)=갈면 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마리배기(馬峴洞)=배락딤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말처럼 됐다배락딤(葛上洞)=갈면 윗쪽에 있는 마을새모치=새배실 북쪽에 새로된 마을선들=선들 옆에 있는 마을매배실(碧水)=신리의 으뜸되는 마을아릿모치=갈면 아래쪽에 있는 마을웃모치=도리갈면 윗쪽에 있는 마을쟁골모치=새배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재령이씨 재궁(齋室)이 있다정자모치=도리갈면 북쪽에 있는 마을로 무안박씨의 자려(紫廬) 박재만(朴載萬)이 창건한 도천정(道川亭)이 있다.     갈천리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는 동명은 갈면(乫面)의 ‘갈(葛)’자와 옥천(玉川)의 ‘천(川)’자를 따서 붙여졌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행정구역은 갈천1리와 갈천2리로 나뉜다. 자연마을로는 절골갈면, 도리갈면, 밀밭마을, 방골, 새못, 옥천, 일모실, 진싯골 등이 있다.   갈천1리는 운서산(519.9m) 아래에, 갈천2리는 독경산(684.1m) 동남쪽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마을 내 큰 도로가 없어 갈천1리는 장육사1길을 지나 지방도 제920호선과 연결되고, 갈천2리는 진시골길을 통해 남쪽으로 나가야 지방도 제918호선과 이어진다. 2020년 기준 면적은 13.87㎢에 이른다.   동쪽으로는 미곡리, 서쪽은 창수리, 남쪽은 신리리 · 창수리, 북쪽은 인천리 · 오촌리와 접한다. 주요 유적으로는 나옹왕사가 창건한 장육사가 있다. 장육사는 불국사의 말사로, 보물로 지정된 영덕 장육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을 비롯해 대웅전, 문수보살 · 보현보살 벽화, 천장 벽화, 후불탱, 지장탱 등 문화재가 남아 있다. 또한 화수루, 일지재, 청문정 등이 있다.   마을의 개척은 12세기 말경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세기 후반인 1879년 고종 16년 무렵, 재령 이씨 운서 이현규가 마을 주위에 칡이 많아 ‘갈면(葛面)’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전에는 갈산(葛山), 가을면(加乙面), 갈면(乫面) 등으로도 불렸다.   또한 1705년 무렵 무안 박씨 죽헌 박태주가 인량리에서 이곳 운서산 기슭에 새못(新洞)이라 이름 붙이고 닥나무밭을 일궈 한지를 생산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피난처 역할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고, 대한제국 때는 영해군 서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갈면동·옥천동·일모소가 통합돼 ‘갈천동’으로 편제됐으며,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됐다. 이어 1988년 군 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고치면서 오늘날의 갈천리가 됐다.   도리갈면=갈면 남쪽 골짜기에 휘돌아 있는 마을임. 1970년대에는 신리리에 딸린 바 있다전골갈면=갈면 서쪽 골짜기에 장륙사(莊陸寺)가 있는 마을밀밭마을=밀밭재 밑에 있는 마을방골(芳谷)=일모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새못(新洞)=진시골 북쪽에 새로된 마을옥천(玉川)=새못 위쪽에 있는 마을일모실(日暮室, 日暮所, 日池)=물래바 이골 서쪽에 있는 마을진시골(進水谷)=갈면 남쪽에 있는 마을         창수리    창수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창수원(蒼水院)이라는 숙식(宿食) 시설이 있어 창수원 또는 창수라 했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창수1 · 2리 행정리가 있으며, 자연마을로 마당두들, 방가골, 자라모기, 점두들이 있다.   과거 이곳은 영해도호부의 임내(任內)였던 창숙부곡(蒼部曲)이 있던 자리다.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해군 서면에 속했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방가·장구·창수동이 합쳐져 창수면 창수동이 됐다. 이후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창수리로 불리게 됐다.   창수리는 창수면의 서북단에 위치한다. 동쪽 멀리 등운산이 있고, 서쪽으로 울티재, 남쪽에 는 형제봉과 맹동산(768.2m), 북쪽으로는 독경산(684.1m)이 둘러싸고 있다. 마을은 전반적으로 맹동산 자락 끝에 집촌 형태로 형성돼 있으며, 이 일대에서 논농사와 밭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2020년 기준 면적은 17.17㎢이다.   동쪽으로 신리, 서쪽으로 영양군 영양읍 양구리, 북쪽으로는 맹동산 · 옥녀봉 · 작산 · 탕관봉을 넘어 보림리와 접한다. 지방도 제918호선이 동쪽에서 북쪽으로 마을을 관통하며 인근 신리리와 이어진다. 주요 마을은 창수리 남쪽과 지방도 제918호선을 따라 형성돼 있고, 맹동산과 독경산이 만나는 마을 중앙 끝자락에는 창수저수지가 있다.   마을의 개척 시기와 개척자는 분명치 않다. 다만 동제당 전설에 따르면, 처음에는 변씨(卞氏) 터전이 있었고 이후 임씨(林氏)가 ‘골매기’라 불리며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져, 변씨와 임씨가 초기 개척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당두들(瑪邱洞)=창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마당처럼 생겼다방가골(芳佳洞, 방갓골, 방갯골)=창수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약수(藥水)가 유명밤남골(栗南洞, 밤나뭇골, 자라모기)=창수 남동쪽 자라모기 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가 많이 있다. 점두들=창수 북쪽에 있는 마을로 토기점(土器店)이 있었다       미곡리    영덕군 창수면 미곡리는 마을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한때 등운산 아래 위치해 미실 또는 미곡이라 불리기도 했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미곡1 · 미곡2리가 있으며, 자연마을로 굼마, 너우내, 대봉, 돌밭, 두들못, 뒷마, 쑤안못, 안마, 양지마, 작은봉정, 중간못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도호부에 속했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해군 오서면에 편입됐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 시 미하·미상동 일부와 서면 우산동 일부를 합쳐 미곡동으로 하고 창수면에 편제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미곡리가 됐다.   지리적으로 미곡리는 동쪽 한티재, 서쪽 갈미봉(333.4m), 남쪽 대봉산(184.2m), 북쪽 등운산 군봉에 둘러싸인 산촌 마을이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옥천 입구에서 오서천과 합류하며, 마을 앞에서 희기천과 만나 송천으로 이어진다. 2020년 기준 면적은 10.507㎢이다.   미곡리는 동쪽으로 가산리, 서쪽으로 오촌리, 남쪽으로 신리와 갈천리, 북쪽으로 병곡면과 접해 있다. 경관이 뛰어나 ‘미곡팔경’으로 불리는 옥천, 형제계, 황라동, 잠두봉, 미산, 중포, 굴대, 장무동 등이 전해진다.   주요 유적으로는 평산신씨 재실인 봉정재(鳳停齋), 죽로공(竹老公) 종택, 권책(權策) 묘, 미곡리 고분군, 대봉재사(大峯齋舍) 등이 있다. 마을 북남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평야가 형성돼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국가지원지방도 제69호선이 남쪽 가산리와 북쪽 오촌리를 연결한다.   마을 개척은 옛날 유원서(兪元瑞)가 처음 시작했으며, 13세기 말 정씨(鄭氏)가 정촌(鄭村)이라 하여 정착했다. 14세기 말 신자악(申自嶽)이 마을에 정착했고, 후손 신대원(申大元)이 양촌(陽村)이라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굼마(굼마치)=미실 동쪽에 있는 마을대봉(大鳳)=미곡 서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형국이 봉(鳳)과 같다돌밭(石田)=미실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다두들못=미실 북서쪽에 둔덕이 있는 마을뒤삼(뒷모치)=미실 북쪽에 있는 마을쑤안못=미실 북쪽 마을 앞에 숲이 있는 마을안마(안마치, 음지마)=미실 안쪽에 있는 마을양지마(陽村)=미실 서쪽에 있는 마을 작은 봉정=미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촌리에 있는 봉정 남쪽의 작은 마을중간못=두들못과 쑤안못 중간에 있는 마을장무동=미실 서쪽에 있는 마을황파동=미실 서쪽에 있으며, 옛날 황씨와 파씨가 살았다고 한다.       오촌리    오촌리 동명의 유래는 오동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오동나무말’을 줄여 오말, 이후 오촌이라 불렀다. 법정리로 오촌1 · 2리가 있으며, 자연마을로 골모태, 닥실, 명서암, 뱅골, 봉정, 정촌, 최촌못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도호부에 속했고,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해군 오서면 관할지가 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봉정동을 병합하여 오촌동이라 하고 창수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오촌리로 명칭이 확정됐다.   지리적으로 마을은 동쪽에 등운산(767.8m), 서쪽에 운서산을 등지고 그 사이 골짜기에서 형성됐다. 지방도 제920호선이 마을을 관통하며, 오서천이 마을을 지나 옥천으로 흘러간다. 하천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돼 논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2020년 기준 면적은 12.47㎢이다.   주요 유적으로는 오촌리 냉천고택, 갈암고택, 존재종택, 명서암, 우헌정, 면운재고택 등이 있다. 등운산과 운서산 자락 끝에 마을이 형성돼 있으며, 앞쪽 평야인 오촌들에서 논농사가 성행한다.   역사적으로 오촌리는 13세기 고려 후기 원종·충렬왕 연간 안씨가 처음 개척했다. 이후 오씨가 들어와 오장골이라 불렀고, 조선 초 정씨가 정촌이라 하였다. 17세기 재령 이씨가 들어와 오촌이라 칭하며 대대로 세거하고 있다.   오촌리의 위치는 동쪽으로 병곡면 영리 · 아곡리와 칠보산, 서쪽으로 갈천리, 남쪽으로 미곡리, 북쪽으로 삼계리와 칠보산 주봉과 접해 있다.   골마(골모태)=오촌 북쪽에 있는 마을닥실(楮谷)=오촌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옛날 닥나무가 많았다명서암(冥棲庵)=오촌 입구에 있는 마을로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정자가 있다뱅골(白岩谷, 巳谷, 뱀골)=명서암 서쪽에 있는 마을봉정(鳳亭)=오촌 동쪽 등너머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봉이 대열매(竹實)를 먹는 형국이라 하며, 15세기 경주 이씨가 개척했다정촌못(鄭村)=오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정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최촌(崔村)못=뱅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최씨가 살고 있다.     삼계리    영덕군 창수면 삼계리는 마을 내 세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합류하는 곳에서 유래했다. 옷재, 삼승령, 칠보산에서 발원한 내가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시내골’이라 부르다, 시라골·시락골을 거쳐 한자로 삼계(三溪)라 했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삼계1 · 2리가 있으며, 자연마을로 구렁말, 국골, 동삿거리, 배목 등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영해도호부 오어면에 속했고, 1895년 영해군 오서면으로 편제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삼계동과 운계동 일부를 합쳐 삼계동이라 하고 창수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삼계리로 명칭이 확정됐다.   지리적으로 동쪽은 등운산, 서쪽은 독경산, 남쪽은 운서산, 북쪽 멀리 삼승령이 보인다. 영해에서 13㎞, 창수면 소재지에서 9㎞ 떨어져 있으며, 국가지원지방도 제69호선이 마을 앞을 지난다. 2020년 말 기준 면적은 15.27㎢이다.   삼계리는 경관이 수려해 신천8경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명소는 국곡목적, 산성반월, 와우창암, 장담모연, 벽연봉화, 남야장암, 서산낙조, 현등별계 등이다. 자연마을 구렁말 북쪽 산성산에서는 옛 산제를 지냈으며, 원수모기 고개에서는 옛 산적 출현 전설이 전해진다.   삼계리 배목(삼계1리) 마을은 15세기 말 성종 연간에 한 인사가 개척했으며, 17세기 중기 인조 연간에 영양남씨 남도명이 입주해 세거했다. 삼계2리 시락골은 고려 말 밀양박씨가 개척했으며, 18세기 중기 영조 연간 함양박씨 박세옥이 입주 후 후손이 세거했다. 구렁말은 최씨가 개척했으나 큰불 피해 후 안동 권씨가 구룡촌이라 개칭했다.   삼계리의 위치는 동쪽으로 병곡면 금곡리와 영리 칠보산, 서쪽으로 인천리, 북쪽으로 수리, 남쪽으로 오촌리와 접해 있다.   구렁말(九龍, 구롱말)=삼계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구렁이처럼 생겼다국골(菊谷, 굴곡)=장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동삿거리=구렁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동사(洞祠)가 있다배목=국골 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로, 배의 형국(行舟形)인 데서 붙여진 이름인데, 등운산의 운(雲)자를 따서 운계라고도 한다.      수리    1607년(선조 40) 최씨가 입향해 숯을 굽던 마을로, 숯골 · 수골 · 수곡 · 탄동리(炭洞里)·수동(壽洞)이라 불렸다. 후에 식수가 부족하자 식수가 많아지기를 기원하며 수동(水洞)으로 기록됐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수리는 행정리도 수리 하나이며, 자연마을로 유어동, 자무터, 집희암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도호부에 속했으며, 1895년 영해부가 영해군으로 개편되면서 영해군 오서면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유어동·집희암 · 자무터를 병합해 수동으로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수동에서 수리로 명칭이 확정됐다. 수리는 경관이 수려하고 지세가 비교적 완만하다. 동쪽으로 등운산맥, 남쪽으로 운서산 지맥, 서쪽으로 독경산, 북쪽으로 삼승령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동쪽 등운산맥과 서쪽 독경산 사이에는 수동저수지가 위치한다. 마을 동남쪽에는 드문드문 가옥이 자리하며, 주변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2020년 말 기준 면적은 13.33㎢이다. 주요 유적으로 박의장(朴毅長) 묘역, 영모재(永慕齋) 등이 있다. 마을 형성 초기에는 15세기 말 원씨와 주씨가 입주했으며, 17세기 초 선조 연간에 최씨가 들어와 숯을 굽고 거주하여 탄동이라 했다. 이후 함양 박씨가 입주하며 식수가 원활하기를 기원해 수동(水洞)으로 개칭했다. 수리의 위치는 동쪽으로 삼계리, 서쪽으로 백청리, 남쪽으로 인천리, 북쪽으로 삼승령과 잔두목 넘어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와 접하며, 서쪽은 독경산 지맥인 군봉과 이어진다.   유어동(遊魚洞)=숙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 용머리(龍頭)와 같은 바위가 있다. 또 소(沼)가 있어 쌍용이 있었다고 하며, 각종 물고기가 이 소에서 놀았다.   자모터(者武基)=집희암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자모(慈母)가 살았다집희암(集喜庵, 喜庵, 집함, 지패암)=문바위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약 400년 전에 마을을 개척할 때 수 만근 되는 바위를 들어내니 그 안에 두 줄기 물이 솟아올라 젖우물(乳井)이라 했다   인천리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인 인천리는 행정리 1 · 2리로 구성되며, 자연마을로 거릿마, 골말, 신촌, 안마, 양짓마, 새점골, 한밭, 황촌 등이 있다. 원래 인아리(仁雅里)라 불렸으며, 마을 주위 산과 바위, 앞 냇물이 맑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마을은 15세기 말인 1489년(성종 20년)에 개척되었으며, 처음에는 인아리라 했다. 이후 안동 권씨와 함양 박씨가 입향하면서 인계(仁溪)라 했고, 평산 신씨가 입향한 후에는 신촌(新村), 무안 박씨가 입주하면서 와곡(臥谷)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도호부에 속했으며, 18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해군 오서면에 편제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보하동 전체와 서면 일모소 일부를 병합해 인천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인천동에서 인천리로 명칭이 확정됐다. 인천리는 산세가 수려하여 성주목, 용각산, 인계, 운곡, 성리암, 도천, 보림, 선산이 ‘인계8경’으로 전해진다. 위치는 동쪽으로 삼계리, 서쪽으로 보림리와 독경산 지맥 성주봉, 남쪽으로 갈천리와 운서산 연봉, 조피산, 용각산이 솟아 있다. 당나무들·말보들에는 논농사가 이루어지며, 산자락 끝 주변으로는 일부 밭농사도 진행된다. 2020년 말 기준 면적은 11.48㎢이다. 거릿마=한밭 동북쪽에 있는 마을신천(新川)=인천 동쪽에 있는 마을안마=인천에서 한밭골로 가는 안쪽에 있는 마을양짓마=거릿마 양지쪽에 있는 마을골말=인천 서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한밭(大田谷)=인천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이 마을에는 6천 평이나 되는 큰 밭이 있다새점골=양짓마 서쪽에 있는 마을. 이 골짜기에 옛날 쇠점이 있었다황촌(黃村)=양짓마 동쪽에 있는 마을     보림리    영덕군 창수면 보림리는 마을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창수면 서북쪽 산간 취락지대에 자리한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행정리는 보림리 1곳이다. 자연마을로 거릿마, 아릿버임, 안마, 웃버임, 중말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도호부 오어면 관할지였으며, 1895년 이후 영해군 오서면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보중동과 보상동을 병합해 보림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보림동에서 보림리로 변경됐다.   보림리는 서쪽으로 조비산, 남동쪽으로 조피산(405. 2m) 자락이 마을을 감싸며, 두 산자락 사이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동쪽으로 내려갈수록 지대가 낮아져 인접한 인천리 쪽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진다. 2020년 말 기준 면적은 8.09㎢다.   마을은 15세기 후기 성종 연간에 원씨가 개척해 ‘버임’이라 불렀고, 이후 무안 박씨가 입주하여 옷재(烏峴)라 하다가 현재의 보림으로 개칭됐다.   보림리의 위치는 동쪽 인천리, 서쪽 옷재를 넘어 영양군 영양읍 무창리, 남쪽 독경산 맥을 넘어 인천리와 갈천리, 북쪽은 백청리와 접한다.   마을 골짜기 중 따비양개 맞은편 집에는 신돌석(申乭石) 장군이 은거했다고 전하며, 현재는 집은 없고 축대 흔적만 남아 있다.   거릿마=웃버임 앞길 옆에 있는 마을중말(중마, 寶中洞)=웃버임과 아릿버임 중간에 있는 마을아릿버임=버임 아래쪽에 있는 마을웃버임(寶上洞)=버임 위쪽에 있는 마을   백청리    영덕군 창수면 백청리는 마을 주변에 잣나무[栢]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영덕군 창수면에 속하는 법정리다. 행정리는 백청리 하나이다. 자연마을로 망상골, 잣나무골, 큰골, 허릿골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도호부 관할이었으며, 1895년부터 영해군 오서면 관할지가 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백청동이 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백청동에서 백청리로 변경됐다.   마을은 동남쪽에 독경산(564m), 서쪽에 오현의 수봉들, 북쪽에는 삼승령 낙맥이 솟아 있는 벽지 취락으로, 들이 없고 농토 대부분이 경사지에 펼쳐져 있다. 2020년 말 기준 면적은 6.71㎢다.   백청리는 16세기 초 성종 연간에 김씨가 개척했으며, 17세기 초 선조 연간에 수안 김씨 진사 김필경이 입주하며 ‘흘리(屹里)’라 불렸다. 함창 김씨가 들어와 ‘잣나뭇골’이라 했고, 망상골은 밀양박씨 박경룡이 개척하여 서리가 오지 않는 곳이라 ‘망상골(望霜谷·忘霜谷 · 忘星洞)’이라 했다.   위치는 동쪽으로 수리, 서쪽으로 영양군 무창리, 남쪽으로 창수면 보림리, 북쪽으로 영양군 영양읍 기산리와 접하며, 울진군과 삼승령 등 수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망상골=잣나뭇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서리가 오지 않는다큰골=백청리 남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허릿골(屹里)=백청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          12가문이 삶의 터전을 일군 ‘인량리’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은 영해 지역에 세거하는 12가문의 입향지이거나 초기 정착 과정에서 거쳐간 마을로 알려져 있다. 그중 8가문의 종가가 터를 잡아 반촌을 이루고 있으며, 여러 성씨가 오랜 세월 갈등 없이 함께 살아온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전통문화를 보존·전수하는 중요한 학습장 역할을 하고 있다.       ● 열두 성씨가 거쳐 간 마을 ‘인량리’옛 영해 지역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12가문이 거쳐 간 마을로 유명하다. 영해 5대 성씨로 불리는 △대흥 백씨(大興白氏) △영양 남씨(英陽南氏) △안동 권씨(安東權氏) △재령 이씨(載寧李氏) △무안 박씨(務安朴氏)를 비롯, 야성 정씨(野城鄭氏)·선산 김씨(善山金氏)·신안 주씨(新安朱氏) 등이 이 마을을 거쳐서 영해에 입향했다.    대흥 백씨로서 영해에 처음 입향한 이는 고려 말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지낸 백견(白堅)과 백견의 장남 백문보(白文寶=1303~1374)다. 백견은 영해 박씨인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 박감(朴)의 사위로 병곡면 각리에 정착했다가 수재로 창수면 인량리로 옮겨왔다.   영양 남씨 영해 입향조는 세종조에 감찰어사(監察御使)·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낸 남수(南須1395~1477)다. 남수는 울진에서 태어났으나 인량에 거주하고 있던 대흥백씨 백린(白璘)의 딸과 혼인하여 인량에 정착했다.   안동 권씨 영해 입향조는 권책(權策)이다. 단종의 외숙인 종숙부 권자신(權自愼)과 아버지 권자홍(權自弘), 큰형 권저(權箸), 둘째 형 권서(權署) 등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돼 일족이 모두 화를 당할 때 어린 나이로 홀로 영해에 편배(編配)돼 인량에 정착했다.   재령 이씨 영해 입향조는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지낸 이애(李=1480~1561)다. 이애는 성종 때 둘째 아버지인 이중현(李仲賢)이 영해부사로 부임할 때 책방으로 따라왔다가 당시 영해 대성인 진성 백씨 백원정(白元貞)의 딸과 혼인, 인량에 정착했다.   무안 박씨 영해 입향조는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박지몽(朴之蒙=1445~?]이다. 박지몽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백부 박이(朴)가 영덕 현령으로 부임할 때 따라와서 지역 토성인 야성박씨(野城朴氏) 박종문(朴宗文)의 딸과 혼인. 인량리에 정착했다.   함양 박씨(咸陽朴氏) 영해 입향조는 부사직(副司直) 박종산(朴從山)이다. 성주에서 인량으로 이거, 영해박씨 박성간(朴成侃)의 딸과 혼인했다.   야성 박씨 인량 입향조는 도사(都事) 박종문(朴宗文)이다. 당시 영해 지역의 호족인 영해박씨의 막강한 세도를 조정에서 염려, 이를 처리하라는 특임을 받고 영해 지역에 파견됐다. 하지만 영해박씨 실세들을 살상하지 아니하고 울령 밖으로 옮겨 살게 한 후 인량에 정착했다.   평산 신씨의 인량 입향조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빈시 판례 태복정(禮賓寺判禮太僕正)을 역임한 신득청(申得淸)이다. 공민왕에게 올린 시정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인량리로 이거했다. 고려가 망하자 대진 앞바다에 투신 자결했다.   신득청의 후손들은 일찍 인량을 떠나고 현재 인량리에 거주하고 있는 평산신씨는 신득청과 계보를 달리하는 신만걸(申萬傑)의 후손들이다. 임진왜란 때 용궁에서 영해부 입천동으로 옮겨와 살다가 신만걸의 손자 신준립(申俊立)이 인량에 정착했다.   야성 정씨의 영해 입향조는 진사 정진(鄭)이다. 무안 박씨 박붕(朴鵬)의 딸(박지몽 증손녀)과 혼인, 평해에서 인량으로 이거했다. 정진의 사촌 정담(鄭湛)은 함양 박씨 입향조 박종산의 증손녀와 혼인, 인량에 정착, 임진왜란 때 김제 군수로서 곰재[熊峙]에서 전사, 병조참판에 증직됐다.   영천 이씨 영해 입향조는 이사민(李士敏)이다. 할아버지가 영해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재령 이씨 입향조인 이애의 손녀와 혼인, 예안에서 인량으로 이거했다.   선산김씨 영해 입향조는 김석(金碩)이다. 영해 못골에 입향, 손자 김익중(金益重)이 인량에 처음 거주하게 됐다.   신안 주씨의 인량리 입향 과정은 상세히 고증할 수 없다. 여전히 9대째 살고 있는 종택이 마을에 있다.      ●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사는 반촌 인량리는 여러 명문가가 혼재한 특이한 사례로, 전형적인 한두 성씨 중심의 반촌과 대비된다. 1930년 일제강점기 조사에 따르면, 162호 747명이 거주했으며, 재령 이씨 35호, 영양 남씨 30호, 안동 권씨 25호, 영천 이씨 20호, 대흥 백씨 8호, 기타 44호로 구성됐다.1992년 발간된 향토사에는 재령 이씨 20호, 안동 권씨 24호, 영천 이씨 12호, 영양 남씨 12호, 함양 박씨 24호, 선산 김씨 20호, 평산 신씨 9호, 영해 박씨 7호, 무안 박씨 6호, 파평 윤씨 5호 등으로 기록됐다.   2004년 말 자료에 따르면 웃나라골(인량2리) 73호 147명이 거주하며, 함양 박씨 14호, 재령 이씨 13호, 안동 권씨 10호, 평산 신씨 10호, 신안 주씨 4호, 파평 윤씨 3호, 나주 임씨 3호, 영양 남씨 2호, 평해 황씨 2호, 영천 이씨 2호, 기타 10호로 구성돼 있다.   인량리는 반촌이면서도 전형적인 각성 촌락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한국의 반촌은 한 성씨나 두 성씨가 지배적인 종족촌락을 형성하고 있는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 보면 인량리는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 여러 성씨가 사는 인량리 사회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는 여러 성씨가 한 마을에 모여 살면서도 전형적인 반촌과 달리 혈연적 정체성과 신분 의식이 장례나 동제 운영, 노인들의 교유관계 등 사회적 활동에서 크게 드러나지 않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동제는 마을 주민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체 의례로, 반촌에서는 마을마다 운영 방식이 다양하다. 경주 양동마을은 동제를 지내지 않고, 안동 화회마을은 타성 중심으로 양반은 참여하지 않는다. 영해면 호지마을과 원구마을은 신분과 성씨에 따라 제관과 참여를 제한하며, 신분적 경계를 뚜렷이 하고 있다.   그러나 인량리는 12동신을 모신 여러 동제당이 존재했고, 주민들은 집 가까운 제당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동제의 규모는 작은 경우 3~4가구, 큰 경우 50가구 이상이었으나, 참여나 제관 선임, 운영에 성씨나 신분적 제약이 없었다. 인량리 동제 조직은 혈연이나 신분보다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근린성에 기반해 결합됐다. 한국 농촌에서는 상포·상조·초롱 등 장례조직을 운영하며, 성씨나 신분 배경에 따라 중심 종족과 타성이 따로 조직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량리에서는 장례 조직도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운영됐으며, 성씨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참여가 가능했다. 인량2리의 사례를 보면, 과거 마을을 4개 구역으로 나눠 장례 조직을 운영했으나, 주민들은 혈연이나 신분과 관계없이 참여했다.   한국 농촌에는 성별 · 연령별로 구분된 사랑방이 있어 한가한 시간에 주민들이 모여 교류했으나, 반촌에서는 혈연 과 신분에 따른 구분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반면 인량리에서는 노인들의 교유관계에서 성씨나 신분 구분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남녀 간 내외 구분은 유지됐으나, 특정 성씨나 반상을 중심으로 한 모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주민들의 의식 속 혈연과 신분 의식이 여전히 존재함에도, 여러 성씨가 오랜 세월 함께 생활하며 배타성과 우월감이 상당히 희석된 결과로 분석된다. 인량리는 반촌적 특성을 지닌 마을임에도, 공동체 운영과 사회적 교류에서 개방적이고 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 인량은 전통문화의 학습장   오랜 세월 여러 명문 성씨가 함께 생활하며 여러 가문의 종가가 터를 잡아 살아온 곳으로,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고가옥과 종택이 즐비하며, 조상들이 남긴 문적은 중요한 문화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재령 이씨 영해파 종택 충효당(忠孝堂)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으며, 선산김씨 입촌조 용암 김익중(金益重)의 종택은 경북민속문화재로, 재령 이씨 갈암 이현일(李玄逸) 종택은 경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이 외에도 △평산신씨 종택 만괴헌(晩槐軒) △장수현감을 지낸 권만두(權萬斗) 고택 지족당(知足堂) △재령이씨 우계파 종택(愚溪派宗宅) △권상임(權尙任) 살림집 강파헌 정침(江坡軒正寢) △영천이씨 종택 삼벽당(三碧堂) △정담 장군 정려비(鄭湛將軍旌閭碑) 등 누정과 재사가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각 가문에서 소장한 고문서와 고서화는 한국국학진흥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 기탁되어 소중한 전통문화 자료로 활용된다. 신안 주씨 종택 소장의 고문서는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러한 문화자원은 청소년과 관광객에게 농촌 생활을 체험하고 전통문화를 학습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04년부터 마을에서는 전통테마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폐교된 인량초등학교를 새 단장해 현대식 객실과 회의실을 마련했으며, 종가 및 고건축물 탐방, 고택 체험 민박, 전통 예절 교육, 민속놀이, 농작물 수확 체험 등 계절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말이면 많은 탐방객이 방문하며, 전통문화 체험과 농촌 생활을 접할 수 있는 교육과 관광의 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간, 나옹선사 반송 유적지 靑山要我生無言(청산요아생무언)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蒼空請吾活無塵(창공청오활무진)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解脫貪慾脫居嗔(해탈탐욕탈거진)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如水若風居歸天(여수약풍거귀천)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세월은 나를 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우주는 나를 보고 곳없다 하지 않네聊無愛以無惜兮(요무애이무석혜)번뇌도 벗어 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如水如風終我(여수여풍종아)강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 하네.       자연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의 집착과 번뇌를 내려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3·4·3·4의 음절이 멋진 이 시는 우리 한민족의 몸속에 흐르는 아리랑 가락이 흘러가는 듯하다. 많은 선시를 남긴 덕분에 불교 가사(歌辭) 문학의 시조로도 통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는 고려 말기 고승 나옹선사(1320~1376)가 지은 선시다. 고려 후기 공민왕의 스승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나옹선사는 영해(寧海), 지금의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에서 태어났다. 출생부터 생사를 넘나들어 험난했다. 아버지는 지방의 하급 관리였고,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세금을 내지 못해 아버지는 도망자 신세였다. 만삭의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예주부(禮州府) 관가로 끌려가던 도중에 길에서 나옹을 낳았다.   못된 관원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버려두고 어머니를 끌고 갔다. 다행히 상황을 파악한 예주부 부사에 의해 풀려나게 된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던 곳에 돌아와 보니, 수십 마리의 까치들이 날개를 펴고 갓난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까치소’ 또는 ‘작연(鵲淵)’이라 불리게 됐다. 스무 살에는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의 죽음과 얼마 후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자 문경 묘적암으로 출가했다. 출가하면서 지팡이를 바위 위에 거꾸로 꽂아 놓고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지팡이는 아름드리 반송(盤松)으로 잘 자랐지만 625년 만에 1965년 고사했다. 지금은 새로 심은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1970년경 이곳 주민들이 반송이 고사한 자리에 사당을 짓고 나옹선사의 초상화를 모셔 두었다. 이런 연유로 신기리 마을을 반송정 마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나옹은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며 깨달음을 얻었고 원나라로 건너가 인도 승려 지공화상(중국과 한국에서 활동)의 가르침을 받았다. 개성 신광사 주지를 했고 여주 신록사에서 열반, 그곳에 부도탑이 있다. 그는 인도 불교를 한국불교로 승화시킨 인물로 기록돼 있다. 특히 ‘염불은 곧 참선’이라는 가르침을 쉬운 가사문학으로 풀어내 민중들을 교화하고자 했다.   2008년 10월 21일 영덕군 주최, 영덕문화원과 나옹왕사기념사업회가 주관, 입적하신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지관 큰스님께서 사적비 비문을 근찬, 나옹왕사 사적비 제막과 더불어 반송기념식수를 했다.   나옹선사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 옌징, 지금의 베이징)으로 건너가 인도에서 온 지공선사에게서 법을 전수받았다. 귀국해서 훗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된 무학대사에게 법을 전했다.   주로 양주 회암사에서 주석했지만,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3년간 주지를 지내기도 했다. 고려 공민왕 때 왕사(王師)를 지냈다. 1376년에 밀성군(密城郡, 밀양) 영원사로 향하던 중에 병이 났고 여흥(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게 된다.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전국 방방곡곡에 사리를 모셨고, 중국은 사람을 보내 스님의 사리를 가져갔고, 일본에서는 스님의 영정을 모셔갔다고 한다.   인도의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제자 가섭을 통해 내려오던 선맥(禪脈)이 108대 조사 지공 선사를 거쳐 나옹에게 전해졌다. 나옹선사의 선맥은 다시 무학대사로 이어지고, 조선 선(禪)불교의 든든한 토대가 됐다. 나옹선사는 인도의 붓다, 중국의 선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깨달음을 우리말로 풀어냈던 사람이다.   나옹선사는 세상의 법과 불법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 수행자가 찾아야 할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임을 역설했다. 현재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 곧 정토라는 유심정토(唯心淨土)의 입장을 견지했다. 태고 보우와 더불어 불교계를 대표하는 종조라 칭해지는 나옹왕사, 지공, 무학은 삼화상(三和尙, 세 분의 수행을 많이 한 승려)으로 꼽힌다. 그래서 세 인물을 함께 그린 화상(像)을 여러 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속명은 아씨, 법명은 혜근, 초명은 원혜이다. 법호는 나옹, 당호는 강월헌, 시호는 선각으로 그 지칭하는 이름 또한 다양하다.   창수면 반송유적지에는 반송정 누각과 강월헌 정자 그리고 나옹선사 사당이 건립, 사적비와 반송이 식재, 나옹선사를 기념하고 있다.   나옹선사가 입적한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는 고려불교를 중흥시킨 업적을 기려 보제존자 석종부도(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가 남겨져 있다. 그를 기리는 나옹예술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영덕군은 창수면에 전시, 관찰체험, 수련지구로 구성된 `나옹왕사 역사문화체험지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역사문화체험지구 내 수련시설인 `인문힐링센터 여명`(여행과 명상)에서 명상과 기체조, 인문학, 건강음식체험, 숲길 걷기 프로그램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웰니스 산업 콘텐츠를 활용하고 있다.             구름이 쉬어가는 곳, 장육사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별칭이 붙은 운서산(雲棲山)은 520m 높이에 불과 하지만 깊은 골짜기와 울창한 숲을 품고 있다. 운서산은 금계가 알을 품은 형상을 하고 있어 금계포란(金鷄抱卵)형 명당자리다. 장육사(裝陸寺)가 있는 곳이다. 장육의 장(莊)은 한길 장으로 새길 때는 여섯 갈래 뜻하며, 여섯 육으로 새길 때는 숫자 육(六)의 대신으로 두 글자 모두 6을 의미한다.   장육사는 영해-창수면을 이어주는 920지방도로를 타면 도착할 수 있다. 길 이름도 ‘장육사길’이다. 운서산 장육사이지만 주변을 칠보산, 등운산, 독경산 등 높은 산들이 외호하고 있다.   장육사는 고려 공민왕(재위1351-1374) 때 나옹왕사가 서기 1355년, 자신의 고향인 창수면에 창건했다. 주변의 산세가 발이 여섯 개인 거북을 닮아 장육사라 했다.   산사에 저녁 타종 소리가 맑고 향기롭게 퍼져나간다. 템플스테이로 유명한 장육사의 템플스테이 구호는 ‘우바이 세상’이다. 우바이(보살)와 우바세(처사)는 출가하지 않은 재가 신자를 통칭하는 말이다.   깊은 산 속 조그만 비구니 사찰이다 보니, 숙박형 템플스테이는 여성만 받는다. 삶에 지쳐있거나 새로운 활력을 위해 잠시 멈춤이 필요한 여성들이 마음 편하게 쉬고 명상하며 자신을 다듬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오랜 역사를 지녔지만 2000년대 이전엔 자그마한 규모였는데 2011년 영덕군이 추진한 3대 문화권 사업에 선정돼 장육사 부근이 나옹왕사체험지구로 개발되면서 넓은 도량을 갖춘 영덕군 대표 사찰로 자리 잡았다.   나옹왕사 체험지구에는 나옹왕사 선수행길, 테마가도, 인문힐링센터 여명, 나옹왕사기념관이 있다. 현대인의 ‘마음 충전소’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장육사는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이며,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대한민국의 소중한 관광자원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서 창건 이후 많은 수도승이 다녀간 수도 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 세종조에 산불로 당우가 전소되었던 것을 중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육사에는 1395년(태조 4) 태조와 왕비를 송축하기 위해 지방 관리들이 중심이 돼 조성한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보물 제993호)이 봉안돼 있다. 기념관 초입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나옹선사의 선시(禪詩) ‘청산가’가 눈에 띈다. 탐욕도, 성냄도, 번뇌도 욕심도 모두 벗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고 한다.     대웅전을 보물로! 장육사   임진왜란 전 장육사 중창 불사를 할 때의 일이다.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던 목수가 대웅전 공사 일을 지원하고 나섰다. 어머니의 쾌유를 위해 불사금을 내고 싶었지만 가난해 엄두도 못냈다. 목수일로 부처님일에 힘을 보태고자 했다.   공사가 거의 끝나 마지막 기둥 네 개만을 남겨놓았을 때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그 목수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 어머니가 소생하지 못했다며 종적을 감추었다.   그 뒤 다른 목수를 기용, 남은 공사를 완공했지만 기술 부족으로 뱃머리 집으로 만들고 말았다. 장육사 대웅전에 남겨진 이야기이다. 지금은 잊혀진 전설처럼 그 뱃머리집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채 명맥만을 이어오던 것을 1900년에 이현규(李鉉圭)가 가산을 모두 바쳐 중수했다. 최근에는 주지 권성기가 폐찰이 된 평해 광암사의 유물을 옮겨와서 산신각과 금당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중한 흥원루   운서산 깊은 골짜기에 나옹왕사 기념관과 힐링센터 ‘여명’을 좌우에 두고 중간에 장육사가 자리 잡고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운서교를 넘어 출입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 흥원루(興遠樓)를 지나면 대웅전(경북도 유형문화재 138호)이 나온다. 육중한 흥원루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듯 색바랜 목재의 색감이 도드라진다.   절에는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대웅전과 관음전, 그리고 산신을 모시는 산령각, 범종각과 산내 암자인 홍련암이 있다. 템플스테이 숙소로 활용되는 탐진당과 육화당까지 여러 건물이 오밀조밀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탐진당(探眞堂)은 진리를 탐구해 온 지공, 나옹, 무학, 임제, 평산 등 고승들로 방 이름을 붙였다. 육화당(六和堂)은 신화, 구화, 의화, 계화, 이화로 이름 붙여 있다. 꽃 이름일까 싶어서 찾아봤더니 ‘불교 진리를 깨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섯 가지 도리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이 육화(六和)였다.   몸으로 화합하는 신화공주(身和共住), 입으로 화합하는 구화무쟁(口和無諍), 뜻으로 화합하는 의화동사(義和同事) 계율로 화합하는 계화동수(戒和同修), 이익을 나누는 이화동균(利和同均) 바른 견해로 해탈하라는 견화동해(見和同解)가 육화(六和)이고 그 앞 글자를 딴 것이다.   대웅전은 조선 세종 때 산불로 소실된 후 재건, 임진왜란때 폐찰, 중건된 조선 중기 건물이다.     영산회상도 대웅전 내부 삼존불 뒤 탱화 영산회상도(영취산에서 석가여래의 설법 모습)와 우측의 지장보살도는 경북도 등록문화재다.   우측의 또 다른 탱화, 좌우 벽면의 문수보살, 보현보살 벽화 그리고 천장의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 하늘나는 선녀를 그린 형상) 등도 오랜 역사를 견뎌온 듯 빛바랬지만 매우 아름답고 화려하다. 대웅전 전체가 장엄한 미술관이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방식으로 건축됐다. 조선 중기 사찰 건축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전의 단청은 금단청으로 색상이나 무늬가 장엄하고 거룩하다. 대웅전의 주불(主佛)은 ‘아미타불’이다. 아마타불은 주로 극락정토를 재현한 극락전의 주불이다.   삼존불 뒤에 모셔져 있는 영산회상도 후불탱화(보물 2263호)와 지장탱화(보물2264호)는 조선 영조 1764년에 그려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와 미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영산회상도의 꽃광배는 흔히 볼 수 없는 광배의 형태로 매우 수려하다.   법당 내 그려진 주악비천상과 좌우벽면의 문수보살벽화, 보현보살벽화는 동적인 화려함이 잘 표현돼 예술적 가치가 높다.      대웅전 뒤편 계단을 오르면 나옹왕사의 첫 수행지로 알려진 홍련암이 있다. 지공대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영정이 각각 모셔져 있다. 대나무 숲에서 홍련암으로 부는 바람이 빗소리와 부딪히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관음전의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993호)은 태조 4년 1395년에 만들어졌다. 한지로 여러 겹 덧붙인 종이 불상 위에 금물을 올려서 조성된 것으로 건칠로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장신구와 보관을 하고 있다. 얼굴은 사각형이고, 표정은 완고하다. 아름다우면서도 건장하고 힘이 있는 모습이다.           충효당종택(忠孝堂宗宅)    창수면 인량6길 48에 위치한 충효당(忠孝堂)은 조선 성종(成宗) 때 재령 이씨 이애(李)선생이 처음 세운 유서 깊은 살림집으로, 퇴계 이황 선생의 성리학을 계승·발전시킨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태어난 유서 깊은 곳이다.   현재 이 건물은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넓은 대지 위에 안채, 사랑채, 마구간, 사당, 정자 등을 고루 갖춘 대규모 양반 주택의 면모를 보여준다.   충효당 일곽은 넓은 대지 위에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뒤편에는 넓은 대밭이 조성된 후원이 있어 대규모 집의 위용을 자랑한다. 건물 배치는 안채와 사랑채가 어울려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사랑채가 마주 놓여 있는데, 특히 사랑채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앞쪽 들판을 내려다볼 수 있는 좋은 자리에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사랑채 건물인 충효당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현재도 후학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안채 뒤쪽에는 담장으로 구획된 사당이 별도로 자리하고 있어,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충효당은 안채, 사랑채, 사당 등 조선시대 양반집의 필수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다. 비록 현재의 건물은 후대에 본래의 위치에서 뒷쪽으로 옮겨 지어진 것이지만, 그 가치는 매우 높다. 특히 안채의 경우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시기를 조선 중기로 짐작하고 있으며, 비록 다소 변형된 부분이 있으나 조선시대 주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 초에 창건되어 퇴계 학맥의 거유를 배출하고 임진왜란을 거치며 보존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대규모의 폐쇄적인 공간 구성과 건물 배치를 통해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생활상과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국가민속문화유산이다.         오봉종택(五峯宗宅)    창수면 인량5길 45-6에 위치한 오봉종택(五峯宗宅)은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이자 안동 권씨 인량리 입향조인 권책(權策, 1444~?)이 거주했던 종택이다. 권책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오봉(五峯)이다.   인량리 마을 중앙 북쪽 산 밑에 자리한 오봉종택은 재령 이씨, 영천 이씨 등 여러 성씨가 번성한 영덕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마을, 인량리의 유서 깊은 건물 중 하나다.   오봉종택은 입향조 권책이 타계한 지 200여 년이 지난 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으며, 2002년에 다시 중수되어 현재에 이른다. 건물이 경사지에 터를 닦아 3단 정도로 조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좌향은 남향이다.   제일 높은 지대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중간 지대에 사당 앞으로 정침(안채 및 사랑채)과 오봉헌(별당)이 자리하며, 가장 앞쪽에 솟을대문이 있다. 정침보다 한 단 낮은 하단지대의 서쪽에는 정자인 벽산정이 위치한다.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4칸규모로, ‘┘’자형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결합된 `ㅁ자형`을 이루는 완결형 뜰집이다. 특히 사랑마루 1칸을 안채 밖으로 돌출시킨 행간확장형구조를 채택하여 지역의 전통 건축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안채는 2칸 안마당에 면하여 안대청이 있으며, 좌측에는 도장(다락)과 안방, 우측에는 상방이 배치되었다. 안방과 정지 2칸이 좌익사를, 상방과 반칸 통래칸, 도장, 사랑방이 우익사를 이룬다.   사랑채는 중문간 우측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가 일렬로 이어지며, 사랑마루 전면에 분합문을 달아 내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고, 후면에는 반 칸을 덧대어 내었다.   오봉헌(별당)은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방 4칸과 마루방 2칸이 배열된 좌실우당형이며, 전면에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네모기둥에 전면 툇칸에만 직절익공형식을 쓴 5량가 팔작기와집이다.   벽산정(정자)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로 마루방양측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다. 전면에 툇마루와 함께 계자각 헌함을 둘러 격식을 갖추었으며, 네모기둥에 이익공 형식을 사용한 5량가 팔작기와집이다.   오봉종택은 2008년 6월 16일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근년에 재건되었음에도 과거의 평면형과 형태는 유지하고 있어 영덕 지역 안동 권씨 가문의 정신적 구심적 기능을 해왔다.   다만, 화재와 중수 과정을 거치면서 본래의 흔적은 손상되어 초기 건축적 특성은 거의 소멸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택은 영덕 인량리 다성씨 마을의 전통과 역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용암종택(龍巖宗宅)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 위치한 인량리 용암종택은 선산(善山) 김씨 용암 김익중(金益重)의 고택으로, 영조 4년(1728년) 7월 15일에 상량했다는 가전(家傳) 기록이 전해진다. 이 집은 조선시대 사대부 저택 양식을 따르면서도 유례없이 많은 수장(저장) 공간을 갖추고 있어 당시 가문의 경제적 능력과 지역적 특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1985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용암종택은 솟을대문 3칸이 우뚝하게 서 있는 대문간채를 통해 들어서게 되며, 대문 좌우 협간에는 고직이방과 마구간이 배치된 통상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본채인 안채는 `ㅁ자형`구조이며, 원래는 대문간과 안채 사이 마당 좌우에 부속 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정침 본당은 겹집 평면이며 좌우 날개는 단칸통, 사랑방은 간반통(間半通)으로 구성되어 지붕의 크기와 높낮이가 다채롭다. 특히 본당의 기둥 간격(주간, 柱間)이 서로 맞지 않게 설비된 점 등 독특한 건축적 특징을 보인다.   용암종택의 가장 큰 특징은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수장 공간의 배치다.   본당 향 좌측의 귓방에서 시작하여 4칸의 넓은 대청이 이어지고, 다시 마루를 깐 고방(庫房)으로 연결된다. 고방 앞쪽도 마루로 대청이 계속 이어진다.   안방 뒤편에 해당하는 고방에 이어 우측 칸에도 마루를 깐 수장 공간인 `도장`이 자리한다. 이는 안방 윗칸이 본당에 이어지고 아래 칸은 우측 날개에 자리 잡는 독특한 평면 구조에서 비롯된다.   부엌은 2칸 반이나 되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남쪽의 외양간은 원래 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양간부터가 중문 칸에 해당하며, 외양간, 중문을 지나 아궁이가 설치되어 사랑방에 불을 때게 되어 있다. 이어서 2칸 사랑방과 `ㄴ`자로 꺾이며 좌측 날개가 되는 마루방, 중방, 곳간을 거쳐 본당의 귓방 앞 대청으로 연결되는 복잡한 동선 구조를 보인다.   용암종택은 일반 사대부 주택에 비해 수장 공간이 매우 많은 편이다. 이는 장군이나 지방 호족의 사병을 관리하던 부곡(部曲) 책임자의 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비록 이 지역이 부곡과 인연이 없으나, 혹시 바다와 연관된 생산(生産)을 관리하던 집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가전(家傳)에는 김익중에게 삼척부(三陟府)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가 상당한 부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창건 당초의 정확한 생업은 알 수 없으나, 용암종택은 다양한 수장 공간과 독특하게 절충된 평면 구성을 통해 조선 후기 영덕 지역 재력가 살림집의 형태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갈암종택(葛菴宗宅)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전통테마마을 내에 자리한 갈암종택은 조선 후기 퇴계 학맥을 이어받아 17세기 중후반 영남학파를 통합한 거두, 갈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종가의 종택이다.   이현일은 1689년 기사환국 이후 남인 정권에서 영남 남인의 대표적인 산림(山林)으로 등용되었으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실각하여 홍원, 광양 등지로 유배되는 등 정치적 역경을 겪었다. 하지만 그의 학문은 이재, 이상정 등으로 계승되어 영남학파의 주맥을 이루었다.   원래 청송군 진보면에 거주하던 이현일의 후손 이회발이 아들 이철호를 시켜 종택을 건립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해 1992년 갈암태실(葛菴胎室)이 있던 창수면 인량리로 종택을 옮겨 지었다. 원래 정침(正寢)만 있었으나, 이건 시 사당 등을 새로 지으며 규모를 확장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갈암종택이 자리한 인량리는 자시봉-인량대산-동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넓은 들이 펼쳐지며 송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길지(吉地)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갈암종택은 경북 북부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 가옥으로, 조선 후기 경상도 양반집(班家)의 전형적인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4칸 반 규모로,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돌출되어 있다. 안채는 가운데 2칸이 대청이며, 그 좌측으로 안방과 고방 등이 배열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규모로, 2칸의 사랑방과 마루,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사랑방 뒤에는 신주(神主)를 모시기 위해 벽감(壁龕)을 설치해 두었던 감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종택 오른쪽 뒤편에는 이건 시 새로 지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이 별도로 자리한다. 대문채는 정면 5칸의 규모이다.   비록 건물 자체는 근대에 건축되었지만, 종가의 이주와 건립과정 자체가 영남학파의 종장인 이현일의 위상과 갑술환국 이후 영남 남인이 처했던 상황을 대변해 준다는 점에서 인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된다.   종택 건물은 역사적 ·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종가에서는 매년 10월 3일에 이현일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지내며 그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고 있다.     우계종택(愚溪宗宅)    인량2리 마을 산 밑에 자리한 우계종택은 조선 선조(宣祖) 때 재령 이씨 영해 입향조인 이애(李 )가 건립했던 옛집 터에 이시형(李時亨, 1586~1612)이 새롭게 건립한 살림집이다. 이시형 선생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태숙(泰叔), 호는 우계(愚溪)이며, 효도와 우애가 극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 집은 재령 이씨 우계파의 종가로 이어지고 있다.   우계종택은 마을길에 면하여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평삼문을 들어서면 넓은 바깥마당 뒤로 정침(안채 및 사랑채)과 그 서쪽의 방앗간채가 한 일곽을 이룬다. 정침 일곽 앞 동쪽에는 별곽 내에 별당 누정인 우계정이 따로 자리하고 있다.   정침은 정면 5칸, 측면 4칸 반규모로,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가 작은 안마당을 완전히 에워싼 폐쇄적인 완결형 구조를 보인다. 특히 전면의 사랑마루 1칸이 돌출된 행간 확장형 뜰집형태를 취하고 있어, 영덕 지역 살림집의 건축적 특성을 잘 나타낸다.   안채는 2칸 안마당에 면하여 안대청이 있으며, 그 좌측에는 귓방, 우측에는 마룻바닥의 고방을 배치했다. 고방 앞으로는 안방, 정지(부엌), 큰고방이 배치되어 우익사를 이루었다. 귓방 앞의 마룻바닥 통래칸은 사랑채와 함께 좌익사를 구성했다.   사랑채는 중문간을 기준으로 좌측에 위치하며, 사랑방과 사랑마루 1칸이 전면에 돌출되었고 사랑방 뒤로 뒷방이 배열되어 있다.   현재는 정지, 큰고방, 마루를 한 공간으로 개조하거나, 귓방 앞 마루를 방으로 변경하고 사랑방 내부를 고치는 등 일부 공간의 기능과 형태가 바뀌어 옛 원형에 변형이 가해졌다.   건물 구조는 평지에 자연석 기단을 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주상부는 민도리 형식으로 꾸며 처마 하중을 받는다. 지붕 가구는 안대청이 2량가, 그 외는 3량가 구조이며 지붕은 홑처마의 서산각형태다.   별도로 자리한 우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방과 마루방을 배열한 홑처마 팔작 기와집이며, 방앗간채는 3칸 규모의 ‘一’자형 민도리 초가집으로 지어져 종택 일곽을 구성하고 있다.   우계종택은 조선 후기 사족 살림집의 평면 구성과 배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받으며, 2013년 7월 11일에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재령 이씨 영해파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이 종택은 비록 일부 내부 변형이 있으나, 당시 지역 양반 가옥의 생활 문화와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소호종택    인량리에 위치한 소택정(小澤亭)은 일제강점기에 중건된 정자로,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인량리에 세거한 함양 박씨가문의 문화유산이자 당시 사족들의 향촌 사회활동의 일면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소택정은 박신지(朴身之, 1629~ 1705)선생이 말년을 보낸 장소이다. 박신지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이경(履卿)이며, 호는 소호(小湖)또는 택옹(澤翁)이다. 그는 1675년(숙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사헌부감찰, 예조정랑, 성균관사예, 보령현감, 울산부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문집으로 『소호집(小湖集)』이 전해진다. 소택정은 1918년에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인량리 인량마을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북쪽과 동쪽은 인량대산(仁良大山)과 동산(東山)이 병풍처럼 감싸고, 남쪽으로는 송천(松川)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에 위치한다. 주변에는 영덕 충효당 종택, 영해 인량리 주씨 종택, 영덕만괴헌(盈德晩槐軒)등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소택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소로수장(小爐修裝) 홑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내부 공간은 왼쪽 1칸에 통칸 대청을 두었고, 오른쪽 2칸에는 온돌방을 연접시켰다. 특히 온돌방 전면에 4짝 문을 달아 마루방의 기능을 겸하도록 설계한 점이 눈에 띈다.   또한, 건물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으며, 툇간 주위에는 헌함(軒檻)을 달고 계자난간을 둘러 마루의 기능을 확장함과 동시에 미적 요소를 더했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 구조로 견고함을 갖추고 있다.   현재 소택정 뒤쪽에는 안채가, 왼쪽에는 창고가 자리하며 담을 둘러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으며, 전반적인 관리는 양호한 편이다. 소택정은 영덕 인량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중요한 건축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벽당    인량리에 자리한 삼벽당(三碧堂)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살림집으로, 인량리에 정착한 **영천 이씨 하연공파(賀淵公派)의 종택이다. 이곳은 이중량(李仲樑, 1504~ 1582)의 종택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아버지는 퇴계 이황의 동문으로 유명한 이현보(李賢輔)이고, 본관은 영천, 호는 하연(賀淵)이다.   삼벽당은 인량1리 마을 가장 뒤쪽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인량리는 인량대산이 동서풍을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송천(松川)이 흐르는 수백 정보의 넓은 들판을 감싸고 있어 예로부터 이름난 명당으로 꼽힌다.   삼벽당은 정면 8칸, 측면 7칸 규모의 정침과 그 전방 서쪽에 배치된 사당으로 구성된 일곽이다. 특히 정침은 ‘⊓’`자형 안채와 ‘⊣’자형 사랑채가 방형의 안마당을 완전히 에워싼 폐쇄적인 완결형 구조가 특징이다. 여기에 사랑마루 2칸을 사당 쪽으로 돌출시킨 행간확장형 뜰집형태를 취하고 있어 지역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행간확장형 뜰집은 영덕 지역 내 지족당, 만괴헌 등 여러 살림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다.   안채는 3칸 안마당에 면하여 안대청이 있고, 그 좌우로 윗방과 상방이 배치되었다. 안방은 3칸 규모로 넓고, 동쪽으로 1칸 돌출시킨 정지(부엌)는 찬장을 설치하는 등 영덕 지역의 일반적인 정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또한 안대청과 정지에는 각각 다락이 있는 2층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중문간을 기준으로 우측에 위치하며, 사랑방, 윗방, 사랑마루를 일렬로 배열했다.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1칸 돌출시키고 쪽마루를 설치하여 개방감을 더했다.   삼벽당은 각 실의 기능과 용도에 맞춰 벽체와 창호를 구분해 설치하였다. 특히 안채 우익사 아랫방의 되돈고래는 안마당 쪽 기단에 난방 아궁이와 굴뚝을 나란히 설치한 흔치 않은 사례로 지역 내 살림집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 기법이다.   구조적으로는 지대가 낮은 사랑채 부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직절익공 형식으로 꾸며 권위를 나타낸 반면, 그 외 부분은 네모기둥에 민도리 형식으로 처리하여 공간의 위계를 구분했다. 안대청은 3고주 5량가, 사랑마루는 3평주 5량가, 그 외는 2평주 3량가 등 공간별 특성에 맞는 지붕 가구를 적용했다.   2004년 3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후,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5월 15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승격 지정되었다.   배치와 평면 구성에서 지역적 건축 특성을 잘 갖추고 있으며, 특히 사랑마루 돌출부(행간확장형), 안대청에 설치된 도장(다락), 그리고 되돈고래와 같은 독특하고 희소한 건축적 요소들을 통해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이어져 온 영덕 지역 사족 살림집의 중요한 전형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처인당    창수면 인량2길 36에 위치한 처인당(處仁堂)은 약 600년 동안 인량리에 세거해 온 영양 남씨 종가에 딸린 누정이다. 영양 남씨의 인량리 입향조인 남수(南須)는 1395년(태조 4)에 태어나 울진에서 인량리로 이거했으며, 인량리 토착 성씨인 대흥 백씨와의 혼인을 통해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처인당은 인량리 동북쪽 산 밑, 영천 이씨 종택인 삼벽당 서쪽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인량리는 인량대산과 동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앞에는 송천과 넓은 들판이 펼쳐진 영덕의 대표적인 전통 마을 중 하나다.   처인당은 영양 남씨 일족인 참봉공 남필대(南必大)가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이후 남달만(南達萬, 1713~1784)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처럼 수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의 안채와 사당은 6 · 25 전쟁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마을 복판에서 산 쪽으로 난 골목 끝에 남향하여, 전방의 마을과 멀리 송천을 향하고 있는 처인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一’자형이다.   평면은 중앙에 2칸통 마루를 두고 그 양옆에 온돌방 1칸씩을 배치한 전퇴 중당협실형(前退 中堂挾室形)구조다. 전면 전체에는 툇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전면 툇간에는 누하주(아래층 기둥)와 누상주(위층 기둥)의 별주를 세우고 계자각 헌함(난간)을 설치하여 마치 누마루처럼 꾸민 점이 독특하다.   본체는 높게 쌓은 기단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주상부는 툇기둥에만 직절익공 형식을, 그 외는 민도리 형식을 사용해 공간의 위계를 구분했다.   지붕 가구는 삼분변작법에 제형판대공의 종대공을 둔 5량가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에 한식 기와를 이었다.   마루는 전방으로 개방되어 시원한 조망을 확보하고 있으며, 출입은 후면 마루를 통해 이루어지는 후면 진입 방식을 취하고 있다. 뒷벽은 판벽에 쌍여닫이 울거미띠장널문을 달았으며, 방 앞의 툇간에는 퇴천장이 설치되어 있다. 영덕 인량리 처인당은 영양 남씨 가문의 역사와 함께해 온 건물로, 경사 지형을 활용하여 누마루의 기능을 구현한 전퇴 중당협실형 누정이라는 점에서 건축사적으로 주목된다. 주변의 안채, 사당과 함께 종택 일곽을 이루며, 2018년 8월 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강파헌정침(江波軒正寢)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마을 가운데(인량5길 38)에 자리한 강파헌정침(江坡軒正寢)은 조선 후기 문신인 강파 권상임(權尙任, 1622~1700)의 살림집이다.   권상임은 인량리 출생으로 1669년(현종 10)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어머니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는 효심을 보였으며, 복귀 후 고성현감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푼 목민관이었다. 문집으로는 『강파문집(江坡文集)』이 전한다.   강파헌정침은 원래 중문과 사랑채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후 사랑채를 작고 소박하게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파헌정침 일곽은 안채인 정침과 후대에 재건된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집은 이 지역 상류 주택의 특징인 남녀 공간의 분리 및 공간 구성의 특성을 잘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 규모다. 평면은 안마당 뒤로 2칸 마루방을 배치하고, 그 우측으로 상방 2칸통, 좌측으로 안방 2칸통과 뒤쪽으로 고방 1칸을 두었다. 안방 앞으로는 정지 2칸통이 좌익사를 이루는데, 1칸은 원래 마구였다.   안채의 안대청 전면에 창호를 설치한 점이 마을 내 다른 정침들과 비교되는 특징이다. 또한 정지문은 하인방에 둔테가 같이 만들어진 통둔테구조, 상인방에는 장둔테에 문널의 장부를 끼운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상방 난방을 위한 아궁이와 굴뚝이 아궁이 옆에 나란히 설치된 되돈고래 형식을 취하고 있어 지역 건축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례다. 지붕 가구는 안대청은 3고주 3량가이고, 그 외 좌익사는 평주에 3량가로 간결하게 구성됐다.   사랑채는 화재 후 재건된 정면 3칸, 측면 1칸의 ‘一’자형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소박하다.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측에 사랑방과 건너방을 배치한 평면 형식이다. 사랑방 뒤에는 반침이 있으며, 안마당을 등지고 서향하고 있다.   안마당 쪽으로 짧은 토석담을 두어 안채 공간과 명확하게 구분 지었다. 사랑마루 앞뒤로는 판벽에 쌍여닫이 굽널살문을 달아 내부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좌측 박공면의 대들보에 `강파헌`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강파헌정침은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된 상류 주택의 전형적인 공간구성을 보여주며, 특히 되돈고래와 통둔테 정지문과 같은 독특한 건축 기술적 요소를 담고 있어 조선 후기 영덕 지역 양반 가옥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강파헌정침은 1999년 3월 1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웰니스의 고장 영덕, 인문힐링센터 ‘여명’    창수면 나옹왕사 체험지구 내에 자리한 인문힐링센터 여명(黎明)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20 웰니스 관광지`에 경상북도 최초로 이름을 올리며 힐링·명상의 새로운 명소로 주목받고 있다. ‘여명’은 ‘여행과 명상’의 합성어이자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 ‘어둠이 가시고 밝음으로 가는 중간 단계’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여명은 2019년 5월부터 조성된 영덕군 직영 마음 충전소로, 참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 안온하게 자리 잡은 한옥 시설이다. 특히 이곳은 완벽한 `디지털 디톡스`를 지향하며 객실에 TV를 두지 않은 독특한 운영 방침으로, 현대인들이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인문힐링센터 여명은 단순한 숙박 시설을 넘어, 인문학을 기반으로 삶의 지혜를 밝히고 웰니스(Wellness)를 지향하는 전문 힐링센터다.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 사회인의 마음단련과 늘어나는 웰니스 관광 수요에 맞춰, 각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들이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여명은 명상(마인드케어), 오행 기공 운동, 자연 건강 음식, 문화 힐링의 4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방문객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힐링을 전달한다.         ▲명상(마인드케어) : 깊은 산속 케렌시아(안식처)에서 앉기 명상, 걷기 명상, 숲 걷기 명상, 잠자기 명상 등 다양한 명상을 통해 온전한 쉼을 얻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도록 돕는다.   ▲오행기공운동 : 천천히 원을 그리며 기운을 생기게 하는 동양의 전통 운동법이다. 상허하실(上虛下實)을 통한 수승화강(水昇火降)을 유도하여 원활한 혈액 순환과 마음의 힘을 키우며, 장부별 활력 기공 및 계절별 기공 등 전문가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자연건강음식 : 황제내경을 근거로 제철 로컬푸드를 기반으로 한 오행(五行) 음식을 디자인하여 제공한다. 오미(五味: 신, 쓴, 단, 매, 짠맛)와 신체 장부의 관계에 따라 체질별, 건강 상태별 음식 관리 방법을 공유하여 식생활을 통한 몸 건강 관리를 돕는다. ▲문화 힐링 : 어울림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뮤지컬 넘버를 중심으로 하는 뮤지컬 힐링, 자연 속에서 차가 주는 여유를 느끼는 다예 힐링, 송휴길을 거닐며 폐 정화 및 활력 증진을 꾀하는 숲 힐링 등으로 구성된다.   인문힐링센터 여명은 영덕군 창수면 갈천리 122번지 나옹왕사 역사문화체험지구내에 위치하며, 대지면적 5,09㎡, 건축면적 764.94㎡ 규모의 한옥시설이다.   영덕군은 여명 센터를 통해 힐링·명상 등 정신 · 육체적 건강 증진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제공하며 웰니스 관광객 유치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어진 이`들이 사는 600년 양반 마을, 인량전통테마마을    창수면에 위치한 인량리는 ‘어질고 인자한 사람이 많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전통 마을이다. 1610년(광해군 2)부터 ‘어진 인(仁)’, ‘어질 량(良)’자를 사용하며 어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8성씨 12종가가 모여 사는 영덕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로, 500년이 넘는 고택부터 200년 남짓 된 전통가옥 20여 채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 9채가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인량리는 다른 농촌 마을에서 보기 힘든 자연과 한옥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곳이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 송천강(반변천)이 흐르면서 동쪽으로 넓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나지막한 산세와 넉넉한 들판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택들의 모습은 바라보는 이에게 평온함을 선사하며, 풍수적으로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임을 절로 느끼게 한다. 이곳의 양질의 사질토는 품질이 우수한 농작물을 생산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인량리는 2004년 농촌전통체험마을로 선정된 후, 폐교로 방치되었던 인량초등학교를 주민들이 단장하여 농촌체험형 여행거점으로 새롭게 조성했다.   이곳에는 숙박 시설, 강당, 식당, 체험장 등이 완비되어 있다. 숙박 시설은 가족용(최대 60명)과 단체용(최대 100명)으로 나뉘어 있으며, 워크숍, 동창회, 수련회, 산악회 등 각종 단체 행사장소로 활용 가능하다.   방문객들은 다양한 농촌 체험 활동을 비롯해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전통과 자연을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다.   인량전통테마마을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간직한 고택 집성촌의 품격에 현대적인 체험 시설을 더해, 힐링과 인문학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여행객들에게 최적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선비의 숨결 흐르는 농촌 체험 휴양마을, 나라골 보리말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 위치한 ‘나라골 보리말’이 전통과 자연, 체험이 어우러진 힐링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경북 최대의 보리 생산지이자 `어진이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뜻의 유서 깊은 양반 마을인 인량리는, 예로부터 선비의 숨결과 문(文)의 향기가 도도히 흐르는 곳이다.   2004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선정되었으며,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농촌체험 휴양마을’ 1등급 으뜸촌으로 인정받았다.   인량마을은 2005년 주민 자부담과 행정 지원을 통해 폐교된 인량초등학교를 매입, 콘도형 시설로 새롭게 단장하며 도시민들을 위한 체험 여행 거점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가족 여행객은 물론 수련회, 워크숍, 동창회 등 다양한 단체 행사를 진행하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고 있다.   나라골 보리말은 도시민들이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황토방, 회의실, 식당, 야외무대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완비하고 있다.   30평 규모의 회의실 및 체험학교와 공동 화장실, 단체 식당, 방앗간, 캠프파이어장, 냉난방 시설 등 공용시설을 갖추었다.   원룸형(4~10인)과 단체실(15~20인) 등 다양한 타입의 숙소를 제공하며, 여름철에는 물놀이장을 무료로 개방하며, 야외 바비큐장, 모래놀이터, 그네 등 가족 단위 여행객을 위한 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인량리 나라골 보리말은 주변에 고래불·대진 해수욕장이 가까이 있어 여름철에는 피서지로도 각광받고 있으며, 역사적인 고택과 푸른 보리밭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 속에서 아이들의 인성 함양과 가족의 힐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창수면에 내려오는 설화     ▲독경산의 신비한 구덩이, ‘등은기(嶝圻基)’전설   창수면 독경산(讀經山)기슭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한 선비 가족이 목숨을 건진 신비한 구덩이에 얽힌 이야기다. 이 구덩이는 ‘아이의 울음 덕분에 목숨을 건진 곳’이라 해서 등은기(嶝圻基)라 불리며, 2009년 영덕문화원에서 간행한『창수면지』와 2010년 한국학술정보에서 간행한『내고향의 전설 경북군 편』에 수록돼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 석계 이시명(李時明)이라는 선비가 어린 아들을 업고 노모를 모시고 피난을 가고 있었다. 해가 저물 무렵 한 두메마을에 도착하여 하룻밤 묵어가려던 찰나, 등에 업은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자, 이시명은 다른 피난민들에게 피해를 줄까 염려하여 날이 저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시명 가족이 우는 아이를 업은 채 독경산 기슭에 도착하자, 신기하게도 아이가 울음을 그쳤다. 이시명은 산허리에 오목하게 생긴 구덩이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놀랍게도, 그날 밤 이시명의 가족이 떠나온 두메마을에 머물렀던 피난민들은 모두 왜적에게 학살당하는 참사를 겪었다. 이시명의 가족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인도한 신이한 장소 덕분에 목숨을 건진 곳이라 해서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등은기라 부르게 되었다.   등은기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등은기 이름의 유래’, ‘아이의 울음소리로 건진 목숨’, 그리고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신이한 구덩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설화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는 사람들을 어떤 장소로 이끄는 역할을 하지만, 등은기의 경우는 그 역할이 ‘재앙의 경고 장치’**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즉, 재앙이 닥칠 장소를 벗어나자 아이가 울음을 그침으로써 재앙으로부터 안전한 장소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등은기 이야기는 영덕 지역 사람들이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특정 장소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민속자료로 남아 있다.     ▲팔령신과 역동 선생(八鈴神-易東先生) 인량리 마을 입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는 ‘팔풍정(八風亭)’이라는 정자 터가 있다. 이곳에는 고려 시대 문신인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이 마을을 괴롭히던 여덟 요괴, 즉 `팔령신(八鈴神)`을 물리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이야기는 2002년 영덕군에서 발행한 『영덕군지』에도 수록되어 영덕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 설화로 꼽힌다. 영덕군지에는 채록 경위가 밝혀져 있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약 800여 년 전 이 느티나무 위에는 팔령신이라 불리는 여덟 요괴가 살고 있었다. 이 요괴들은 형체는 보이지 않고 오직 방울 소리만 냈는데, 지붕 위에서 방울 소리가 나면 그 집은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오서면(현재 미곡리, 오촌리 쪽)과 서면(현재 신리 쪽) 마을들이 큰 피해를 입어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고 마을 분위기는 흉흉했다.   이에 따라 영해부사(寧海府使)나 사록(司錄)이 부임할 때면, 부임 일주일 전부터 팔풍정 앞에서 큰 소를 눕히고 술과 음식을 갖춰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새로운 수령이 재직 기간 무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성껏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믿었다.   약 800여 년 전, 문희공 역동 우탁이 영해 사록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여느 때처럼 굿과 치성을 준비하려던 영해부 벼슬아치들의 요청에 우탁은 굿 드리기를 거절했다. 대신 사자를 시켜 두서너 줄의 문자를 써서 팔령신들에게 보냈다.   우탁은 이 문자로 팔령신들을 제압하고 임무를 부여했다. 한 신은 영양에서 울티재(泣嶺)로 넘어오는 잡귀를 막게 하고, 한 신은 인량리 팔풍정을 수호하게 했으며, 한 신은 동해에서 들어오는 잡귀를 막기 위해 관어대(觀魚臺) 입구를 지키게 했다.   나머지 다섯 요귀는 모두 바다에 던져 없애 버렸다. 이후 팔령신의 행패는 완전히 사라졌고, 마을 주민들은 비로소 무사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일설에는 단 한 요귀만 살려 동해에서 들어오는 잡귀를 막도록 관어대 입구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일곱 요귀를 수장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전설 속의 팔풍정과 느티나무는 요귀를 물리친 역동 우탁의 뛰어난 지혜와 덕을 기리는 상징물이 되었다. 현재도 팔풍정의 느티나무는 무성하게 자라며 마을 사람들에게 평화로운 그늘을 선사하는 동신목(洞神木)으로 받들고 있다.         ▲정장군과 장군수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지역에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정담(鄭湛, ?~1592)장군이 청년 시절, 위장사(葦長寺)라는 절에 머물며 힘을 얻고 횡포를 부리던 악승(惡僧)을 물리쳤다는 정장군과 장군수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 이야기는 특정 샘물을 마시면 힘이 세어진다는 장군수(將軍水) 설화의 변이형으로, 2002년 영덕군에서 편찬한『영덕군지』에 수록되어 있으나 채록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정담 장군이 위장사에서 학문을 닦고 있을 때, 절에는 가개도치라는 이름의 중이 있었다. 가개도치는 기운이 장사였는데, 그 힘을 믿고 마을 사람들에게 약탈과 횡포를 일삼아 주민들의 고통이 컸다.정 장군은 가개도치의 힘의 원천을 궁금해 했고, 이 중이 법당 뒤 샘물을 마시고 힘이 세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개도치는 이 샘물을 혼자 차지하기 위해 큰 돌로 샘터를 덮어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 장군은 지혜를 발휘했다. 돌 틈 사이로 붓대롱을 넣어 몰래 샘물을 빨아 마시기 시작했고, 점점 힘이 강해졌다. 결국 정 장군은 그 큰 돌 문을 열고 마음껏 샘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가개도치가 상좌 중을 때리는 등 횡포가 극에 달하자, 힘이 세어진 정 장군은 마침내 가개도치와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싸움할 마음을 잃고 자신의 마을인 비익동(현 인량리)으로 쫓겨 왔으나, 가개도치가 마을까지 쫓아오자 정 장군은 더 이상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정 장군은 가개도치의 무기인 철퇴 방망이를 빼앗아 그를 응징했다. 이 사건 이후 위장사에서 약탈과 횡포가 사라지면서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가개도치와 정 장군이 마셨던 이 샘물을 장군수라 부르며 정담 장군의 기상과 연관 지어 기억했다. 현재는 샘터마저 사라졌지만, 당시 가개도치가 샘 웅덩이에 띄워 두었던 놋잔 소리가 가끔 들렸다고 하여 신비함을 더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얽힌 위장사는 한때 형제봉 아래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왕암(왕바위) 창수면 인량리 뒷골에는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에 대한 충절이 깃든 커다란 바위, 왕암(王巖)에 얽힌 애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바위는 여섯 개의 바위가 둘러싸 마치 육신(六臣)이 엎드려 읍(揖)을 하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왕바위로 불렸다.   이 왕암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단종 폐위 후 충절을 지킨 인량리 입향조 오봉(五峯) 권책(權策, 1444~?)의 지극한 충심을 기리는 인물 전설이다. 2002년 영덕군에서 발행한 ‘영덕군지’에 수록, 채록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세조(世祖)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당시 13세였던 오봉 권책은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참형은 면했으나 영해로 유배되어 귀양살이를 했다.   이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결국 단종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오봉 권책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그는 죽령 고개에서 대성통곡한 후, 고향인 인량리로 돌아와 왕바위를 끌어안고 피맺힌 호곡(號哭)을 하다가 여러 번 실신했다.   오봉은 이후 두문불출(杜門不出)하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왕암을 찾아 분향하고 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는 세월을 보냈다. 분함을 이기지 못해 읊은 그의 시에는 “분호천지노(憤號天地怒, 분해 울부짖음에 하늘과 땅이 노하고), 원읍귀신비(寃泣鬼神悲, 원통한 울음소리에 귀신이 슬퍼한다)”라는 구절이 남아 있어 그의 충절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1885년, 그의 후손과 향인(鄕人)들은 선생의 충절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호곡했던 그 바위에 ‘왕암(王巖)’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 당시 원근의 명현거유(名賢巨儒)들이 이곳에 모여 추모시를 읊기도 했다.   오봉 권책은 1847년에 종부(從父) 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대봉서원(大峯書院)에 향사(享祀)되었으나, 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자래실 창수면에는 옛 이름 ‘자루실’에서 유래한 ‘자래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자루만 들고 와서 살아도 어려움 없이 잘 살았다’고 하여 처음에는 ‘자루실’이라 불렸고, 이후 발음이 변해 현재의 ‘자루실’이 되었다는 지명 유래담이 전해 내려온다.   이 이야기는 2010년 한국학술정보에서 간행한 『내고향의 전설 경북편』과 2011년 영덕문화원에서 간행한 ‘창수면지’에 등에 수록되어 있으나 채록 경위는 밝히지 않았다.   자래실 마을 유래담의 핵심은 마을의 독특한 지형과 관련된 풍수 사상에 있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용(龍)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마을 바다 쪽의 큰 바위는 용머리를, 마을 한가운데는 용의 배를, 마을 뒷산인 불밋골은 용의 꼬리를 닮았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이처럼 마을이 용의 형국을 하고 있는 풍수지리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는 곧 옛 영덕 사람들이 인간의 길흉화복이 사는 곳과 깊이 관련된다고 여겼던 풍수 사상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무심한 행동은 명당의 기운을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용의 배 위치에 해당하는 땅에 우물을 팠다. 마을 사람들은 이 우물을 ‘용의 배에 구멍을 낸 것’과 같다 하여 ‘용의 배 구멍’이라고 불렀다. 용의 배를 훼손했기 때문인지, 이 마을에는 옛날에 불치병이 돌았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이 잘 살았던 이유를 `명당의 기운`으로 설명하고, 마을에 재앙이 닥쳤던 이유를 `명당을 훼손했기 때문`으로 설명함으로써, 명당의 땅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풍수 사상을 담고 있다.           창수면 3 . 1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3 · 1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영덕에서도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영덕에서는 1919년 3월 18일 영해면에서 3 · 1독립운동이 처음 일어났다. 창수면에서는 3월 19일 약 200명의 면민이 참여한 가운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창수면의 거사에는 창수동의 이수각, 신리동의 이현설 ·권재형, 인량동의 이현우 등이 주도적으로 동지를 규합했다. 이들은 창수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당일 인근 영양군의 이종구가 오촌·삼계동 주민들을 이끌고 합류했으며, 갈상 · 신리동 주민들도 가세했다. 군중들은 영해면까지 이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창수동에서 시위를 열기로 결의했다. 창수동에서는 이수각과 그의 아들 이학술, 김금석 등이 주민들을 불러 모으며 참여를 독려했다.   창수 경찰관주재소도 3 · 1운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창수 경찰관주재소 경찰들은 3월 18일 일어난 영해면 3 · 1독립운동의 상황을 접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했다. 경찰과 순사보 소유물을 인근 민가에 숨겼다.   오후 4시께, 약 200명의 군중은 태극기와 나무 몽둥이를 들고 주재소로 행진했다. 김재수 · 권덕명이 큰 태극기를 흔들며 선창했고, 권재형 · 이현우 · 이현설 · 이현석 · 김용이 등이 주재소에 진입해 공문서를 찢고 시설을 파괴했다. 군중은 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이어갔고, 경찰 소유물이 숨겨진 사실을 확인한 뒤 이를 파괴하기도 했다. 시위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오후 7시경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주동자와 주민 다수가 체포됐다. 이들은 영덕경찰에 연행된 뒤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과 경주지청을 거쳐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재판에서 총 157명이 기소됐으며, 이 가운데 다수에게 실형이 선고됐다.   6월 5일 열린 1차 재판에서 4명이 징역 4년, 32명이 징역 1년 6월, 5명이 징역 6월(집행유예 3년), 4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7월 11일 2차 재판에서는 1명이 징역 1년 6월, 20명이 징역 1년, 8명이 징역 1년(집행유예 3년), 2명이 징역 6월(집행유예 3년), 2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 판결에서는 2명이 징역 4년, 18명이 징역 1년 6월, 13명이 징역 1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창수면 3 · 1독립운동은 면민들이 합심해 일으킨 대규모 만세시위로, 지역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된다.         창수면 인민위원회 좌우익의 대립    1945년 8월 해방 직후 한반도는 정치 권력의 공백 상태에 놓였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다. 건준은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두며 세력을 확장했으나, 9월 6일 해산하고 조선공산당과 합작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각 지방에는 인민위원회와 치안대가 조직됐다.   영덕 지역에도 1945년 12월, 이경석 · 이부암 · 권병술·이양우 · 권병희 등이 주도해 인민위원회가 설립됐다. 인민위원회 산하에는 농민조합 · 부녀동맹 · 청년동맹 등이 결성돼 지역 정치 활동을 주도했다.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인사들도 다수 참여해 조직 기반을 다졌다.   영덕군 인민위원회에는 위원장 이경석, 치안대장 권병술, 총무부장 권병화 등이 활동했으며, 각 면 단위에도 권병희(영해), 이태석(영덕), 서창구·정해봉(강구), 이병화(남정), 이기양(달산), 신수형 · 김수영 · 이응춘(지품), 배금함 · 박명옥(축산), 권삼달 · 주순술 · 김혁동(병곡), 남영희(창수) 등이 면 위원장을 맡았다. 또 부녀동맹에는 임익선 위원장을 비롯해 이종생 · 이용해 · 주덕희 · 이수연 · 정영익 · 김을선 등이 간부로 활동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17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처음에는 모든 정치 세력이 반대했으나, 1946년에 들어 좌익 진영이 신탁통치에 찬성 입장으로 선회하자 우익 진영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맞섰다. 이에 맞서 좌익 진영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며 대립이 본격화됐다.   영덕에서도 우익 진영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영덕지부’, ‘영덕청년연맹’, ‘애국부인회’ 등을 조직했다. 반면 좌익 진영은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세력을 재정비했다. 이처럼 양 진영은 지역 정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대립은 갈수록 격화됐다. 1946년 10월 4일에는 좌익 세력 주도로 달산사건이 발생했으며, 6 · 25전쟁 시기에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영덕 지역의 좌우익 충돌은 1946년부터 1947년까지 극심하게 이어졌고, 1948년 2월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또 한 차례 큰 충돌로 치달았다. 이처럼 해방 이후 영덕 지역은 전국적 좌우 대립의 흐름 속에서 깊은 정치적 갈등과 비극을 경험했다.   김성용 기자      <이 기사는 영덕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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