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곡면은 고래가 춤을 추고넓은 평야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서쪽은 태백산맥줄기 속한 칠보산, 등운산 등이위치해 험준한 산지를 이룬다남동부 지역은 평야 지대로송천 하구에는 비교적 넓은충적지가 펼쳐져 있어농업에 유리한 환경이다해안선은 단조롭고 수심이 깊어항구 발달에는 불리하다       영덕군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병곡면(柄谷面)은 고래가 춤을 추고, 넓디넓은 평야에서 생명의 기운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병곡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해군 북초면과 북이면이 병합되면서 탄생한 지역으로, 지형적 특성과 마을 이름에서 비롯된 독특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송천 하구에 펼쳐진 넓은 평야는 동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농업지대로, 예로부터 지역민들의 중요한 생활 기반이 되어왔다. 이곳은 경북 북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으로, 산과 평야가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지형을 이룬다. 동해와 맞닿은 해안 지역은 맑은 바다와 모래해변이 길게 펼쳐져 있어 여름철이면 전국 각지에서 피서객들이 찾는 명소로 손꼽힌다.   병곡면의 면적은 약 65.98㎢, 인구는 2025년 9월 현재 2,482명이다. 행정구역은 14개 법정리와 25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은 푸른 동해와 접하고 서쪽은 태백산맥의 줄기에 속한 칠보산(811m)과 등운산(767.8m)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험준한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남동부 지역은 평야 지대로, 송천 하구의 충적지는 농업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하며 벼농사를 비롯한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해안선은 비교적 단조롭고 수심이 깊어 항구 발달에는 불리하지만, 병곡리와 백석리 연안에서는 미역과 전복을 비롯한 해조류 양식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또한 인근의 산에서는 가을철 송이버섯이 생산되어 지역민들의 부수입원 역할을 하고 있다. 경지는 주로 송천 연안에 집중되어 있으며, 농업과 어업이 병행되는 복합 생태형 지역으로 손꼽힌다.   면내에는 병곡초등학교, 병곡중학교, 원황초등학교(원황리)가 운영되고 있으며, 한때 학생들의 배움터였던 금곡초등학교는 폐교되어 그 자취만 남아있다. 지역 주민의 문화와 학습을 위한 작은 도서관과 마을회관이 마을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마을 문화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지역 축제나 농촌 체험행사는 세대 간의 소통과 공동체 문화를 지켜가는 계기가 되고 있다.   병곡면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도시의 번잡함을 벗어나 한적한 시골의 평온함과 따뜻한 정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특히 송천 하구의 넓은 평야는 예로부터 이 지역의 생활 터전이자 생명의 원천으로 기능해 왔다. 동해안에서도 보기 드문 넓은 농경지를 품고 있는 병곡면은, 영덕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동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인 고래불해수욕장, 영리해수욕장, 덕천해수욕장을 비롯해 칠보산자연휴양림, 청소년야영장, 영리온천, 칠보산수목원 등이 있어 국내 최적의 관광휴양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병곡면은 어떤 곳    병곡면은 영덕군의 북동쪽에 자리한 고장으로, 동해의 맑은 바다와 송천 하구의 넓은 평야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행정구역은 삼읍 · 금곡 · 백석 · 병곡 · 영리 · 거무역 · 아곡 · 원황 · 이천 · 각리 · 사천 · 신평 · 송천 · 덕천 등 14개 법정리와, 삼읍리 · 금곡1리 · 금곡2리 · 금곡3리 · 백석1리 · 백석2리 · 병곡1리 · 병곡2리 · 영1리 · 영2리 · 영3리 · 영4리 · 거무역리 · 아곡리 · 원황1리 · 원황2리 · 이천리 · 각리1리 · 각리2리 · 각리3리 · 사천리 · 신평리 · 송천1리 · 송천2리 · 덕천리 등 25개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자연마을은 38개, 반(班)은 107개로 이루어져 있다.   ‘병곡(柄谷)’이라는 이름은 마을 지형이 자루처럼 생긴 데서 비롯되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를 ‘자리’, ‘자래’, ‘자라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병곡면은 본래 영해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해군이 영덕군에 편입되면서, 당시 영해군의 북초면과 북이면이 통합되어 현재의 병곡면이 되었다. 이후 1988년 군 조례 개정으로 병곡면의 ‘동(洞)’은 모두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90년 1월 3일에는 ‘휘리리’가 ‘덕천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병곡면은 영덕군 9개 면 중 면적이 여섯 번째로 넓으며, 군 내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에는 태백산맥의 칠보산(811m)과 등운산(767.8m)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그 줄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있다. 남동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지만, 송천 하구를 중심으로 한 남동부는 동해안 최대 규모의 평야 지대를 형성한다. 지질적으로 서북쪽 지역은 화강암 지대로, 오랜 침식작용을 거치며 완만한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칠보산과 등운산 외에 유금치(781m), 신선봉(751m) 등이 있다. 하천은 유금천, 백록천을 포함한 9개의 하천이 면내를 흐르며, 이 물줄기들이 비옥한 평야를 만들었다.   지리적으로 병곡면의 동쪽에는 고래불대교, 서쪽에는 창수면 미곡리, 남쪽에는 영해면 영평리, 북쪽에는 울진군 후포리와 금음리가 위치해 있다. 이러한 위치 덕분에 병곡면은 영덕과 울진을 잇는 교통의 관문이자 지역 간 물류 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보물로 지정된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을 비롯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7호 ‘각리언곡재(角里彦谷齋)’, 운산서원(雲山書院), 운계서원(雲溪書院), 병곡리 포성(柄谷里 浦城), 영리 미륵불(榮里 彌勒佛)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또한 병곡면은 영덕꿀배, 영덕 심층수 온천, 칠보산자연휴양림, 영덕군청소년야영장 등 다양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농업과 어업이 함께 발달한 지역답게 산과 바다, 들이 어우러진 복합 생태 환경을 자랑하며, 사계절 내내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병곡면을 가로지르는 국도 제7호선은 부산에서 포항, 울진, 강릉으로 이어지는 동해안의 주요 간선도로로, 병곡면은 그 교통의 요지이자 동해안 북부 해안 관광벨트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병곡면 마을 유래       삼읍리(三邑里)    병곡면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삼읍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산촌 마을이다. 행정리는 삼읍리 하나이며, 자연마을로는 홈내미(홈니미)가 있다.   ‘삼읍리’라는 이름은 세 개의 개울이 흐르는 지형에서 비롯되었다. 예전에는 ‘삼가울’, ‘삼가올’, ‘삼가을’ 등으로 불렸으며, 이를 한자로 표기해 삼계(三溪)라 했다. 또 다른 설로는 세 고을의 수령이 이곳에 모였다 하여 삼읍(三邑)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마을은 등운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17세기 광해군 연간, 당시 평해군수였던 윤한보(尹漢輔)가 경기도 파주에 있던 선조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와 마을 근처 ‘깨밭’이라 불린 곳에 안장했다. 이후 벼슬에서 물러난 윤한보는 이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고, 당시 이 지역이 영양 · 평해 · 영해 세 고을의 경계를 이루어 ‘삼읍’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17세기 후반에는 권도인이라는 인물이 들어와 세 고을로 흘러드는 물의 근원이 된다 하여 삼계(三溪, 삼개울)라 불렀다. 이어 17세기 말경인 1690년에는 노은(魯隱) 김명남이라는 인물이 입주하여 샘터를 발견하고 마을 이름을 명곡(椧谷, 홈내미)이라 지었다. 그의 후손 김복만은 1730년 마을 동쪽 바위에 ‘서남대(西南臺) 금능동(金陵洞)’이라 새겼으며, 이후 사람들은 마을을 ‘홈내미’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삼읍리가 영해부 북이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병곡면에 편입되었고, 1988년 5월 1일 군 조례 제972호에 따라 ‘삼읍동’이 ‘삼읍리’로 개칭되었다.   지리적으로 삼읍리는 서쪽에 칠보산, 북쪽에 마룡산이 자리한 산촌으로, 칠보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마을 남쪽으로 흘러 금곡지로 이어진다. 마을 주변에는 가부장골, 감나뭇골, 배밭이골 등 여러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으며, 마을은 이 골짜기들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울진군 후포면 금음리, 서쪽으로는 칠보산, 북쪽으로는 울진군 온정면 덕산리, 남쪽으로는 금곡리와 접한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덕분에 과거에는 금과 철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광산 활동도 있었다. 마을에는 약 9만㎡(약 2만7천 평)의 수리안전답이 있어 농업 기반도 탄탄하다.   홈내미(홈니미)= 삼읍리 동남쪽에 위치한 자연마을로, 김씨 문중이 처음으로 터를 잡고 형성했다.           금곡리(金谷里)    금곡리는 병곡면의 동북부, 동해를 마주한 해안 마을이다. 마을 이름은 여러 설이 전해지는데, 예전에는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던 곳이라 하여 ‘그무실’, ‘망곡(網谷)’이라 불렸고, 이후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금곡(金谷)’이 되었다고 한다.   금곡1리(그무실)는 15세기 전기, 태종 연간(1410년경)에 윤판공이라는 인물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형세가 마치 어선이 그물을 싣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망곡(網谷)’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15세기 중기 세조가 등극하자 화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한 김한중(金漢中)이 우거(寓居=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임시로 몸을 부쳐 삶. 또는 그런 집) 하면서 김씨 세거지가 되었고, 그의 후손이 번성해 김씨의 골짜기(金谷)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승도 있다. 또한 마을을 흐르는 유금천(有金川)에서 사금(沙金)이 채취되었다 하여 금곡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금곡2리(지경 마을)는 15세기 초 안씨가 처음 마을을 열었고, 뒤이어 이씨가 입주했다. 영해와 평해의 경계가 되는 곳이라 하여 ‘지경(地境)’이라 불린다.   금곡3리(유금 마을)는 6세기경 금이 발견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신라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이곳에 유금사(有金寺)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18세기에는 김영진이라는 인물이 이곳에 꿩이 많다 하여 아치곡(雅雉谷)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마을은 그 이전에는 백석동에 속해 ‘백륙동(白陸洞)’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고, 대한제국 시기에는 영덕군 북이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지경동과 백륙동 일부를 합쳐 금곡동으로 개편되어 병곡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고칠 때 현재의 금곡리가 되었다.   금곡리의 위치는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칠보산, 남쪽으로 백석리, 북쪽으로 삼읍리와 접한다. 산과 바다가 가까워 농업과 어업이 함께 이루어지며, 마을 곳곳에는 예로부터 불린 자연마을 이름이 지금도 남아있다.   아릿모치= 금곡 동남쪽 아래에 있는 마을아치골= 금곡 북서쪽 마을로 꿩이 많아 붙은 이름양지모치= 금곡 북쪽, 햇볕이 잘 드는 마을용바우구석= 큰 바위 ‘용바우’ 옆에 있는 마을유금(有金)= 아치골 서쪽, 유금사가 있던 마을음지모치= 금곡 남쪽, 그늘진 곳에 있는 마을종지뱅이(宗地方, 鍾地方, 宗地邊)= 금곡 서북쪽 골짜기 마을지경(地境)= 금곡 동북쪽, 울진과 군계가 되는 경계 마을           백석리(白石里)    영덕군 병곡면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백석리는 동해를 마주한 해안마을이다. 행정구역은 백석1리와 백석2리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을 따라 국도 제7호선이 지나고 있다. 도로 주변에는 백석항, 백석해변, 마을회관, 그리고 여러 펜션들이 줄지어 있어 관광과 어업이 공존하는 지역의 특색을 보여준다.   백석리의 이름은 마을 선착장 인근에 있는 커다란 흰빛 바위, 용바우(龍巖)에서 유래했다. 이 돌의 흰 빛깔 때문에 ‘백석(白石)’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예전에는 백륙(白陸) 또는 백진(白津)으로도 불렸다.   조선시대 이곳은 왜구의 침입이 잦은 해안 방어 거점이었다. 성종 10년(1479), 석주 안이현(安履鉉)이 이곳에 방어진(防禦陣)을 구축하고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후 16세기 초, 장택곤(張澤坤)과 맹문호(孟文浩)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의 기틀이 마련됐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북이면 소속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륙동, 백진동, 병륙동의 일부를 합쳐 ‘백석동’이라 하고 병곡면에 편입됐다. 1988년에는 군 조례 제972호에 따라 ‘백석리’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 서쪽에는 백록저수지가, 남쪽에는 병곡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편뚝이 있다. 또한, 마을 중앙에는 ‘쇠바우’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 철암산(184m)이 솟아 있으며, 북쪽으로는 금곡리와 맞닿아 있다.   현재 백석리에는 백석항과 백석해변이 지역의 주요 관광지로 자리하며, 전통 문화로는 마을 제사인 백석리 동제와 열녀 김윤악 비(碑)가 전해지고 있다.   백륙동=백석리에 있는 마을새전(射亭洞)= 백석리 동남쪽 마을로, 조선시대 군사 훈련장이 있던 곳         병곡리(柄谷里)    병곡면의 중심에 해당하는 병곡리는 면의 동쪽에 위치한 대표 해안 마을이다. 행정구역은 병곡1리와 병곡2리로 나뉘며, 자연마을로는 구렁모태, 종달리(종다리끝), 두둘마, 용머리 등이 있다.   ‘병곡(柄谷)’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자루처럼 생겼다 하여 ‘자래’, ‘자라’, ‘자리’, ‘자루’라 부르던 것에서 비롯됐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병륙(柄陸), 병진(柄津), 포성(浦城) 등으로도 불렸다.   조선 명종 5년(1550), 영해부사 장응두(張應斗)가 마을 이름을 ‘병곡’이라 명명했다. 당시 병곡은 영해도호부 북면에 속했으며, 병곡육리 또는 병곡진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포성동(浦城洞)’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부족국가 시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우시국(于尸國)의 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자연 마을인 구렁모태는 신라시대 한 승려가 구렁이에 감겨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하고 종달리는 팔각정 북쪽에 종을 달아 놓고 왜구가 침입하거나 마을에 급한 일이 생기면 종을 쳐서 주민에게 알려 붙여진 지명이다. 용머리는 마을 동쪽 바닷가에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의 바위인 용머리바위(혹은 용두각(龍頭角)) 근처에 있어 명명됐다.   병곡의 남쪽에는 이름난 고래불해수욕장이 자리한다. 예전에는 경정(鯨汀) 또는 장정(長汀)이라 불렸는데, ‘고래가 보인다’ 하여 ‘경정’, ‘긴 백사장이 있다’ 하여 ‘장정’이라 했다. 이 지명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기록되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합 시 병진동과 병륙동 일부를 합쳐 병곡동이 되었으며, 1988년 군 조례 제972호로 ‘병곡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병곡리는 백록천이 마을 아래로 흘러 영리와 경계를 이루며, 평지와 해안을 모두 끼고 있어 농업과 어업이 공존한다. 국도 제7호선이 마을 뒤편을 통과하며, 병곡항 일대에는 축항이 조성돼 다양한 해산물이 생산된다.   마을 남쪽의 고래불해수욕장은 길이 약 20리(약 8km)의 백사장과 울창한 송림으로 유명하다. 병곡의 풍경은 산과 바다, 그리고 사람의 삶이 한데 어우러진 동해안 특유의 자연과 문화의 조화를 잘 보여준다.   구렁모태=병곡 북쪽 구릉진 곳의 마을두둘마=종다리끝 가운데 둔덕의 마을용머리=용바위 인근의 마을종달리(종다리끝)=자라실 동쪽에 있는 마을           영리(榮里)    병곡면 동쪽 끝에 자리한 영리(榮里)는 산과 바다, 그리고 오랜 전통이 어우러진 마을이다. 행정 구역은 영1리 · 영2리 · 영3리 · 영4리 네 개로 나뉘며, 각 리마다 독자적인 마을 공동체와 자연환경을 품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교회모태, 범흥, 부엉바우, 썩은바우마을, 아릿마, 아릿모태, 영동보곡, 웃말(웃연골), 주막거리, 중간마 등이 있다.   영리는 마을 지형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연화부수형국(蓮花浮水形局)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과거에는 영곡리(寧谷里), 연곡(蓮谷), 또는 영동(榮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숙종 14년(1688), 명고(明皐) 장효일(張孝一)이 이곳에 정착해 학문을 닦으며 마을을 개척했다. 그는 연못 위에 피어나는 연꽃을 보고 이곳을 ‘연곡(蓮谷)’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건너편 마을이 생기자 상연곡(上蓮谷)이라 부르던 것이 영동(榮洞)으로 바뀌었다.   자연 마을인 범바우마을(범흥)은 마을 뒷산의 큰 바위에 부엉이가 서식해 ‘부엉바우’라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며 ‘범바우’로 변했다. ‘범흥사(凡興寺)’라는 사찰이 있어 ‘범흥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썩은바우마을(휴암동·朽岩洞)은 서편 산마루까지 바닷물이 차오르던 저지대가 육지가 되면서 생긴 마을이다. 구멍이 많은 흑색 바위에서 문어나 조개를 캐던 곳이라 하여 ‘썩은바우’라 불렸으며, 최근에는 ‘생금바우’로도 불린다.   영리는 조선시대에 영곡리 · 영동리로 불리며 영해부 북면에 속했다. 1896년 8도제가 13도제로 개편되면서 영상동(永上洞)이 되어 영해군 북이면에 편입됐다. 1914년 3월 1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영상 · 영하 · 보곡 · 백륙 · 백진동의 일부를 통합해 ‘영동(榮洞)’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면서 오늘날의 영리(榮里)가 되었다.   영리는 서쪽에는 등운산(767.8m), 동쪽에는 철암산(187m)이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칠보산(811m)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싼다. 마을 중앙에는 칠보산자연휴양림이 자리해, 영덕의 생태관광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각 리는 서로 떨어져 있으며, 각각 독립된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다.   영1리는 병곡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산굽이 아래의 골짜기 마을로, 옛 연골(蓮谷)의 중심지다.   영2리는 영1리 남쪽 산기슭에 있으며, 고려시대 원씨, 수안김씨, 춘천박씨가 정착했다.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많아 ‘연곡’이라 했다.   영3리는 칠보산 자락에 자리한 보곡(미륵골) 마을로, 15세기인 나씨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동구에 각을 지어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미륵골로 불렀다.   영4리는 고래불해수욕장이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영1 · 영2 · 영3리에 비해 평지에 걸쳐 있으며 영리해수욕장을 끼고 있다. 영4리인 썩은바우(朽岩) 마을은 17세기 후기에 김해배씨(金海裵氏) 배학수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영리는 동쪽으로 백석리, 동남쪽으로는 병곡리, 남서쪽으로 아곡리 · 거무역리, 북쪽으로 금곡리와 접해 있다. 영리해수욕장과 영덕군청소년야영장이 있다.   영4리 해안은 예로부터 연안어업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1900년대 초부터 멸치잡이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1920년대에는 일본인들이 들어와 예망어업(曳網漁業=얕은 바다에 사는 도미 · 가오리 · 상어 따위를 배의 힘으로 그물을 당기면서 잡는 어업))을 도입하면서 어업 기반이 크게 확장됐다. 교회모태=주막거리 남쪽에 천주교회당이 있는 마을백록동(白鹿洞)=연동 서북에 있는 마을(현재 폐동)범흥(凡興)=연동 서북쪽에 있는 마을부엉바우=부엉바우가 있는 마을썩은 바우마을(휴암동,朽岩)=연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썩은 바위가 있다.아릿마(하영, 하련, 아릿연골)=연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 아릿모태=휴암 아래에 있는 마을영동-보곡(미칫골, 미륵집골)=연동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미륵당이 있다.웃말(上榮, 上蓮, 웃연골)=연골 북쪽 위에 있는 마을주막거리=썩은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 있었다.중간마=부엉바우와 아릿마 사이에 있는 마을           거무역리(居無役里)    영덕군 병곡면 동부에 자리한 거무역리는 행정리로는 단일 리이며, 바닷마 · 안모치 · 천방모치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마을 이름인 ‘거무역(居無役)’은 부역과 병역이 면제된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됐다. 13세기 중기인 고려 원종(1260∼1274)때 안렴사 박세통(영해박씨)이 지방을 순시 중 이 마을에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큰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아놓고 매질도 하고 온갖 희롱을 해 거북이가 곧 죽을 것 같았다. 안렴사가 살펴보니 거북이 등에 임금 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안렴사는 후한 재물을 주고 거북을 사서 바다로 보내 주었는데, 거북은 몇 차례 뒤돌아보고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객사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용왕이라 하면서 정중히 읍을 하고 “오늘 내 아들이 나들이를 하다가 뭍 사람들에게 잡혀 죽을 것을 공(公)이 살려 주셨으니 그 은혜 잊을 수 없으며 다만 귀댁에 누대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요”하고 사라졌다. 그 후 박세통은 문하시중 평장사로, 아들 홍무는 시중으로, 손자 함은 복야를 거쳐 시중에 올라 삼대가 연이어 정승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마을에 부역을 면제해 주었고, 마을 이름도 ‘거무역(居無役)’이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 영조(1724~1776) 때에는 묵산 남기만이 이곳에 거주하며 잠시 ‘거묵리’라 부르기도 했다. 1896년 영해군 북이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8년 군 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洞)에서 리(里)로 개칭되었다.   마을은 동쪽으로 동해안과 해안송림이 펼쳐지고, 서쪽은 산에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는 아곡천 건너 원황리가, 북쪽으로는 영리가 접해 있다. 서쪽 산과 평지가 만나는 지점에는 거무역못이 있고, 마을 동쪽 해안에는 경상북도수산자원개발연구소가 자리한다. 병곡면 소재지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남쪽으로 약 2km 거리다.   바닷마(바다마을, 바다못, 바디모치)=거무역 동북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안모치(안못)=거무역 안쪽에 있는 마을천방모치(천방모퉁이, 천방못)=거무역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천방의 모퉁이가 되는 마을           아곡리(牙谷里)    아곡리는 병곡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마을로, 행정리로는 하나이며 건네모치 · 고란모치 · 논뚝모치 · 새논골(보곡)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아곡(牙谷)’은 골짜기가 방(房)처럼 아담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됐다. 예로는 ‘아실(雅室)’ · ‘애실’ · ‘애곡’ 등으로도 불렸다. 또 다른 설에는 안성 이씨 이귀천(李貴天)이 입주해 마을을 재개발하며 ‘아곡동’이라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마을의 역사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손씨 성을 가진 이들이 거주했다는 구전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1896년 영해군 북이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덕군 병곡면 아곡동이 되었다. 이후 1988년 군 조례 제972호에 따라 현재의 아곡리로 명칭이 바뀌었다.   아곡리는 북쪽에 등운산(767.8m)이 있어 마을의 3분의 1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산줄기의 끝자락이 두 갈래로 나뉘며, 아곡지와 각락지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서남쪽으로는 칠보산의 주맥인 도봉(道峰, 500m)이 뻗어 있고, 동쪽은 거무역리, 서쪽은 창수면과 접한다. 남쪽은 이천리, 북쪽은 영리와 맞닿아 있다.   마을 내에는 각락지 · 아곡지 · 신답지 세 곳의 보(洑)가 있으며, 풍부한 수자원 덕분에 농업이 발달했다. 특산물로는 송이버섯 · 고추 · 참깨가 있으며, 주민들은 양봉과 한우 사육을 부업으로 한다.   건네모치=아실 동쪽 건너에 있는 마을고란모치=아실 북쪽 골안에 있는 마을논뚝모치=아실 서쪽 논둑 옆에 있는 마을 새논골(保谷, 牙谷洞保谷)=아곡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영동에 딸린 보곡과 한 구역이었다. 1914년 구역 변경 때 갈라서 아곡동에 딸린 마을과 영동에 딸린 마을을 구분하기 위해 아곡동 보곡이라 하고 그 동명을 머리에 붙여 부르기도 했다.         원황리(遠黃里)    영덕군 병곡면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원황리는 칠보산의 한 줄기가 뻗은 등운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이곳은 대나무숲이 울창했던 마을로, 영해부(寧海府)에서 바라보면 마을 일대가 누렇게 보여 ‘황죽(黃竹)’이라 불렸으며, 이후 ‘멀리 누렇다’는 뜻의 원황(遠黃) 또는 원앙(遠仰)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 말기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영해부 동헌에서 이곳을 바라보며 ‘누렇다’ 하여 황죽리라 명명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원황리는 14세기경 밀양박씨 박명인과 김치우가 개척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행정구역상 원황리는 원황1리와 원황2리로 분동돼 있는데 대포동, 서실막, 운산, 아릿모치 등이 있다.원황1리 북쪽 이천 제방 아래에는 서실막(書室幕)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조선 영조 때 정언(正言)을 지낸 묵산(默山) 남기만(南基萬, 1730~1796)이 벼슬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막을 짓고 학문을 닦았다. 이후 제자들과 후학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며 마을이 형성되었다.   원황2리는 ‘대포(大浦)’ 혹은 ‘한개’로 불린다. 18세기 초 경주이씨 이석범이 입주하면서 큰 개울가 마을이라 하여 대포라 이름 붙였으며, 이후 장씨와 임씨 등이 들어왔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기에는 영해군 북이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무역동과 북초면 송하동 일부를 병합해 원황동이라 하였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형적으로 원황1리는 칠보산의 한 맥이 동남으로 뻗은 등운산 아래에 자리하며, 원황2리는 들 가운데 있어 동쪽에는 소나무숲과 고래불이 해풍을 막아주고 있고, 남쪽에는 덕천(德川)의 넓은 들과 연결된 평야를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일대가 바다에 잠겨 있었으며, 지금도 백모래와 백합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 1960년대 이전에는 이천천(伊川川)과 아곡천(牙谷川)이 합류하면서 마을 부근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갈대밭과 웅덩이가 생겼다. 현재는 하천이 직선화되어 직강천(直江川)으로 불린다.   원황리 동쪽은 동해, 서쪽은 각리리, 남쪽은 덕천 · 신평 · 송천리, 북쪽은 거무역리와 접한다. 특산물로는 배, 부추, 양파가 있으며, 부업으로 양봉과 소 사육을 겸하고 있다. 주민의 80%가 농업에 종사하지만 대부분 임차농이며, 여성들은 후포나 강구 등지의 홍게 가공공장으로 출퇴근하기도 한다.   또한 이곳에는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영덕출장소가 위치해 있어 지역 농업 연구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대포동(大浦洞, 한개)=원황 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개가 있었다.서실막(書室幕)=원황 북쪽 이천제방 아래에 있는 마을운산(雲山)=원황 서북쪽에 있는 마을아릿모치=운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천리(伊川里)    이천리는 병곡면 서부에 자리한 마을로, 행정리로는 하나이며 가매골, 아릿이래실(아릿마), 양지모치, 텃골모치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마을 중앙을 따라 하천이 길게 흐르고 있어 이천(伊川)이라 이름 붙여졌다. 고려 말 이씨가 입주해 마을이 번영하길 바란다는 뜻으로 이래실(伊來室) 또는 이리실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1896년 13도제 실시로 영해군 북초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이천동과 북이면 원황동 일부를 병합해 이천동이라 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이천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천리는 서북쪽 계곡을 따라 길게 형성된 마을로, 주요 하천은 이천지(伊川池)를 지나 마을 중앙을 흐른다. 외골지를 따라 농지가 펼쳐져 있으며, 중심에는 양암(良岩)라 불리는 바위가 있어 이를 기준으로 웃이래실과 아래이래실로 나뉜다.   동쪽은 원황1리, 서쪽은 등운산 줄기, 남쪽은 각리1리, 북쪽은 아곡리와 접한다. 마을 입구에서 골짜기를 따라 펼쳐진 농지는 대부분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주민들은 전통적인 벼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가매골(釜谷)=아릿이래실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가마솥처럼 됐다.아릿이래실(아릿마)=이래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양지모치=아릿이래실 양지쪽에 있는 마을텃골모치=텃골 옆에 있는 마을         각리리(角里里)     병곡면 남서부에 위치한 각리리는 각리1리, 각리2리, 각리3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대장수, 발새재, 다릿골, 어느실 등이 있다. 마을은 칠보산 산맥과 주변 하천의 형상이 마치 용의 뿔처럼 보여 ‘각실(角室)’ 또는 ‘각리(角里)’라 불렸으며, 이로부터 지금의 이름이 유래됐다.   조선 후기에는 각리 · 월의 · 언곡리(彦谷里)로 나뉘어 있었으며, 1896년 당시에는 영해군 북초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월의와 언곡리가 각리에 편입되어 영덕군 병곡면 각리동이 되었고,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각리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리리는 등운산의 크고 작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세가 완만하고 평야가 넓다.   각리1리는 남동쪽 평야지대에 위치하며 농경지가 잘 발달해 있다. 각리3리는 칠보산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옥녀봉(玉女峰)과 백호등(白虎嶝)을 이루며 사천리와 경계를 이룬다. 맞은편의 금반산(金盤山)은 각리1리와 마주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각리1리는 고려 말 대흥백씨(大興白氏=水原白氏)가 처음 개척했으나, 임오년 대홍수로 용두천이 범람하면서 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이후 남씨, 권씨, 김씨 등이 정착했다.   각리2리는 고려 말 주씨와 우씨 등이 들어와 다래넝쿨을 헤치며 마을을 열었다 하여 ‘다릿골’로 불렸으며, 조선 초기에 단종의 폐위 후 세조의 즉위로 혼란한 시기 호조판서 명은 윤황(溟隱 尹煌)이 이곳으로 은거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는 “달은 볼 수 있다”하여 마을 이름이 월의(月宜)로 불리게 되었다.   각리3리는 고려 말 왕삼이라는 인물이 개척했다. 정직한 사람들이 살아 어느실(彦谷)이라 불렸고, 황토물이 흐른다 하여 주니곡(朱泥谷)이라고도 했다.   각리리는 동쪽으로 덕천 · 이천리, 서쪽으로 창수면 미곡리, 남쪽으로 사천 · 신평리, 북쪽으로 원황리와 접한다. 마을 동쪽에는 국도 제7호선과 동해선 철도가 나란히 지나며, 각리1리 마을회관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논농사가 주를 이룬다.   대장수(大長水)= 발새재에서 발원하는 개울의 이름에서 유래발새재= 발재 아래에 있는 마을다릿골(月宜)= 각리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달(月)을 볼 수 있다 하여 붙은 이름어느실(彦谷)= 각리 서쪽의 마을, ‘정직한 사람들의 고을’이라는 뜻     신평리(新坪里)    병곡면 남부에 자리한 신평리는 평산신씨의 선조들이 처음 터를 잡은 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아릿모태, 우물모태, 웃모태가 있다.   ‘신평(新坪)’이라는 이름은 갈대밭을 새로 개간한 들판에서 유래했으며, ‘새들’이라 불리기도 했다. 비가 자주 오지 않아 ‘나우내(難雨內, 蘿雨內)’라 불렀고, 사천에서 송천천이 흘러들며 아침저녁으로 노을이 곱게 비쳐 ‘하천(霞川)’이라 부르기도 했다.   1481년(성종 12) 평산신씨 신대지(申大地)가 처음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제방을 쌓고 하천을 정리했으며, 갈대밭을 개간해 논을 조성하였다. 당시 마을 이름은 ‘나우내’였다.   조선시대에는 ‘하천리’로서 영해부에 속했고, 1896년 13도제 실시 때 영해군 북초면에 편입되어 ‘신평동’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신평동과 각리 일부를 병합해 ‘신평동’으로 편성, 영덕군 병곡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신평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신평리는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로 국도 제7호선이 통과한다. 남동쪽으로는 송천이 흐르고, 마을 안에는 동서 내륙순환로가 지나 동쪽의 송천리, 서쪽의 사천리와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송천천을 건너 영해면 벌영리와 성내리, 북쪽으로는 각리리, 동쪽으로는 송천리와 접하고 있다.   주업은 논농사이며, 그다음으로 보리 재배가 많다. 부업으로 일부 농가에서는 소 사육을 하고 있다.   아릿모태= 신평 동쪽 아래에 있는 마을우물모태 1= 아릿모태에 있는 웅글(우물) 주변 마을.우물모태 2= 웃모태 웅굴 근처에 형성된 마을.웃모태= 신평 서쪽 위쪽에 위치한 마을.         송천리(松川里)    영덕군 병곡면 남부에 자리한 송천리는 행정동을 송천1 · 2리로 나누고 있으며, 개양모태와 서당모태 같은 자연마을을 품고 있는 법정리다.   마을은 솔안(松內) 들판에 위치해 있고, 해안에는 울창한 송림이 펼쳐져 있으며, 그 앞을 냇물이 흐르는 지형이어서 예로부터 솔안 또는 소란이라 불렸다가 ‘송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마을의 조성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5세기 조선 초기부터 양씨와 장씨가 거주했고, 당시 마을에는 작은 역촌과 주막이 있었다고 전한다. 인조 시기인 1600년경 송천자 권득여가 입촌해 역촌을 새터(연평리)로 옮기고 동명을 송천이라 하며 정착했다. 이후 그 자손들이 세거해 왔다. 풍수지리상 송천리는 기러기가 알을 품은 형국(雌雁抱卵形)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송천리에 속했다. 1896년 13도제 실시 당시에는 송상 · 하동으로 나뉘어 영해군 북초면 소속이 됐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송상동과 송하동을 병합하여 송천동으로 정리되면서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송천리가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형적으로 송천리는 남쪽에서 송천이 ‘S’자 곡류를 이루며 동해로 흘러들고, 동쪽에는 상천들이 펼쳐져 있으며 영덕로를 기준으로 서쪽에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동쪽으로 덕천리, 서쪽으로 신평리, 남쪽으로는 송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 연평리가 위치하며, 북쪽에는 각리리가 자리 잡고 있다.   특산물은 배이며, 주민들은 부업으로 소 사육과 채소 재배, 보리 생산도 병행한다.   개양모태= 송천리 북쪽 마을로 개양(물구덩이)이 있었던 데서 유래서당모태= 송천리 서쪽 마을로 서당이 있던 곳   덕천리(德川里)    영덕군 병곡면 남동부에 위치한 덕천리는 송천 물줄기가 관어대 앞에서 직류해 마을 앞으로 들어오는 지형이 ‘덕(德)을 몰고 온다’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 과거에는 휘리(揮里)라 불렸고, 후리 · 잿뒤 · 잣두 · 잣디 · 자두 등 다양한 지명으로 전해졌다. ‘떨치다 · 빛나다’의 의미를 담은 휘리는 조선 후기 공식 동명으로 자리 잡았으며,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는다’는 뜻도 함께 전승된다.   잿뒤라는 명칭은 ‘상대산 뒤’라는 의미로, 조선 숙종 시기 김해김씨 김선장이라는 인물이 은둔을 위해 상대산 북쪽 산기슭 공수개(현 영해면 대진리)에 거주하면서 불리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소속이었고, 대한제국기에는 영해군 북초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서는 휘리동과 송하동 일부를 병합해 휘리동으로 정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됐다. 이후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휘리리가 되었으나, 1989년 말 당시 병곡면사무소 부면장이자 휘리리 출신이던 김현무가 동명 개정을 신청했다. 1990년 1월 3일 영덕군 조례 제1146호가 시행되면서 덕천리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른다.   덕천리는 남동쪽에 송천 하류가 동해로 이어지는 지점이 있으며, 덕천해수욕장이 바로 이 자리에 있다. 덕천해수욕장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약 8㎞ 구간은 모두 백사장이 이어지고, 해안에는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송천과 동해가 만나는 모서리 지역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뒤로는 방울·휘리들 같은 넓은 평야가 자리한다.   행정적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서쪽으로 송천리, 남쪽 하천 너머로 영해면 대진리와 면계를 이루며, 북쪽으로 원황리 대포마을과 이웃한다.   특산물은 송천 재첩이며, 부업으로 쪽파 · 시금치 · 얼갈이배추 재배가 활발하다. 1980년 덕천해수욕장이 개장한 이후, 남쪽 송천 변과 동쪽 해변에는 펜션과 캠핑장이 들어섰고, 방울들·휘리들에서는 여전히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천리(沙川里)    영덕군 병곡면 남서부에 자리한 사천리는 골마, 단바우, 모개(項里), 아랫마(아랫모태), 중간마(중간모태) 등 여러 자연마을을 품은 지역이다. 송천천(松川川)이 이곳을 지나며 모래언덕을 만들자 ‘사천’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마을 곁을 흐르는 송천거랑(개울)에서는 어살을 놓아 고기를 잡던 풍습 때문에 살면 또는 미면이라 불리다가 이후 사천으로 고쳐졌다.   사천리는 15세기 조선 태종(1415년) 연간에 신안주씨가 처음 개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영해박씨가 입주했고,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경주김씨 김진섭의 입주를 계기로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이 크게 번성했다. 400여 호가 모여 살 만큼 규모가 커지며 제방을 쌓고 하천을 정비하는 공동체 기반이 조성되었고, 특히 아랫마을(아랫마)이 가장 큰 중심 마을로 자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천 · 용암동 · 항리로 나뉘어 영해부에 속했고,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해군 북초면으로 재편되었다. 1914년에는 사천동으로 통합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하면서 현재의 사천리가 되었다. 지형적으로는 서쪽에 인량대산(15 7.5m)에서 이어지는 동산(東山 · 95.8 m) 또는 용암산(踴岩山 · 용추마루)이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송천이 흐른다. 산지 끝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내륙순환길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내륙순환길 동쪽으로는 사천들이 넓게 펼쳐져 대규모 논농사가 이어지고 있다.   사천리 동쪽으로 신평리, 서쪽으로는 창수면 인량리관련항목 보기와 면계를 이루며, 남쪽은 송천내 건너편으로 영해면 벌영리가 있다. 북쪽에는 각리리가 맞닿아 있다. 사천리의 남쪽 송천 변에서 동쪽 경계까지 이어지는 사천들에서는 지금도 광활한 논농사가 지속되고 있다.   골마= 사천 위 골짜기에 있는 마을단바우= 사천 동남쪽 뒷산에 큰 바위가 있는 마을모개(項里)= 사천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산목이 끊어진 지형아릿마(아랫모태)= 사천 아래쪽에 자리한 마을중간모태(중간마)= 아릿마와 골마 사이 중간에 있는 마을           병곡들 조선시대 곡창지대  병곡들은 조선시대부터 영덕군 북동쪽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다. 수도작(벼) 중심의 영덕군내 최대 곡창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병곡면은 동쪽으로 동해에 면하고, 서쪽으로는 태백산맥 줄기의 칠보산과 등운산이 솟아 있는 지형이다. 이 산지에서 동쪽으로 점차 낮아지며 동해안으로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형성된 하천들이 곡창지대를 만들어 낸다.   아곡천과 송천 하류 이 두 하천의 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펼쳐져 있어 농경에 적합한 토양을 제공한다. 송천 연안에 따른 병곡면의 경지는 대부분 이 지역에 집중돼 있다. 병곡면은 영덕군 내에서도 농업 비중이 높은 지역으로, 곡창지대는 지역 경제의 기반 역할을 했다. 이 지역의 풍부한 농산물은 영덕·영해 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다.   병곡면은 해안과 인접해 있어 해산물, 소금(제염), 곡물 등 다양한 물산이 교역됐다. 해로를 통해 함경·강원도 등 북부 지역의 조세 곡물을 운반하는 경유지로, 동해안 내륙과 해안 지역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병곡면은 내륙 곡창지대와 해안 교역 거점으로서, 조선시대 영덕 지역의 경제와 교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곡창지대는 국가 재정의 근간이자 백성의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핵심 경제 구역이었다. 조운선(관청 소속 운반선)을 통해 생산된 곡식이 수도 한양 등 전국 각지로 운송되어 국가 운영의 핵심 자원이 됐다. 주요 곡창지대는 교통과 방어의 요충지로서, 외적의 침입이나 약탈 시 국가 기능이 마비될 수 있어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오늘날에도 병곡면은 군내 최대 곡창지대로, 벼농사와 함께 관광휴양지로도 개발되고 있다.         고래불 이름에 얽힌 전설    드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바로 고래불해수욕장이다. 상대산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펼쳐지는 대진해수욕장에서 병곡까지 동해안에서 백사장이 가장 긴 명사이십리의 하이얀 모래사장이 푸른 송림과 함께 가없이 펼쳐진다.   예부터 영덕군의 고래불해면은 병곡면의 6개 마을 앞 해변 전체를 지칭한다. 병곡면 북쪽의 백석해변부터 남쪽의 대진해변까지 약 8㎞의 길이다. 고운 모래가 20리길로 펼쳐져 명사이십리길이라고도 불린다.고래불이라는 이름은 바다에서 물줄기를 뿜는 고래 모습을 뜻한다. 고려 후기 목은 이색 선생이 해안에 인접한 상대산에 올라 바다를 유영하는 고래를 보고 ‘경정(鯨汀)’이라 이름 지은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순우리말로 물기둥을 뿜는 고래를 뜻하는 고래불이 됐다.   해변 곳곳에서 고래 벽화와 조형물을 쉽게 볼 수 있다. 고래불해수욕장 북쪽 끝 방파제에는 고래가 바다 위로 뛰어오르는 모양의 전망대가 자리한다. 여러 고래 벽화도 구경하고 전망대에 올라 바닷가 풍경을 바라보기 좋다. 해변 방향으로는 고래불 조각 공원이 있다. 포토존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형물도 여럿이다. 해변 솔숲에는 나무 데크 산책로를 조성해 걷기 편하고 중간마다 쉼터가 마련, 쉬기 좋다.   고래불해수욕장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2㎞ 이동하면 고래불 봉송정을 볼 수 있다. 고래불이라는 이름의 발생지인 상대산 아래 자리한 팔각정이다. 고래불해수욕장 끝자락인 대진 해변에 팔각정인 봉송정이 있었다는 옛 문헌에 따라 조성됐다.   영덕 병곡면 고래불해수욕장은 그 이름부터 특별한 전설을 품고 있다. 고래불해수욕장에는 용머리 바위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옛날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이 용머리 바위가 가진 영험한 기운을 끊기 위해 말뚝을 박으려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이를 막아냈다. 아직도 용머리 바위는 그 자리를 지키며 고래불 해수욕장을 수호하고 있다는 믿음이 전해진다. 이 때문에 용의 기상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찾아온다.   고래불해수욕장의 모래는 곱고 몸에 잘 붙지 않아 예로부터 모래찜질을 하면 심장 및 순환기 계통 질환에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런 특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 고래불해수욕장을 찾는다. 고래불해수욕장은 단순히 아름다운 바닷가를 넘어, 선조들의 지혜와 자연의 신비가 깃든 이야기들로 가득한 곳이다.     칠보산 전설    영덕 땅의 80%가 산이다.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칠보산이다. 이름 그대로 ‘일곱 가지 보물’을 품었다는 산. 소나무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품 있는 금강송이 깊고 빼곡한 숲을 이루고, 그 사이로 동해의 푸른 물결이 펼쳐진다.   칠보산길에 접어드는 순간 풍경은 완전히 달라진다. 굽은 길이 끝이 날 듯 이어지고, 양옆으로는 우람한 소나무가 터널처럼 드리워진다. 길이 점점 더 좁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숲은 촘촘하고, 공기를 가득 채운 소나무 향은 걷는 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는다.   해발 810m 지점에 자리한 칠보산자연휴양림은 산의 부드러운 능선과 동해의 드넓은 시야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명소다. 오늘날 칠보산으로 불리는 이 산의 옛 이름은 등운산이었다. 산 이름의 유래를 전하는 이야기로는 ‘칠보산과 화인지감’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조선을 도운 무장 두사충이다. 전쟁 이후 조선에 귀화한 그는 병곡면 금곡의 샘물을 마시고 “이 산에는 반드시 일곱 가지 보배가 있으리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2009년 영덕문화원이 간행한 『창수면지』와 2010년 한국학술정보의 『내고향의 전설 경북 편』에 수록돼 있다.   이에 따라 등운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칠보산’으로 불리게 됐다. 전해 내려오는 일곱 가지 보배는 △돌옷 △더덕 △산삼 △황기 △구리 △철 △멧돼지이며, 모든 보배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소나무다. 칠보산의 소나무는 ‘금강송’이라 불린다. 동해 가까운 백두대간 낙동정맥 상부에서 자란 금강송은 곧고 높이 뻗으며, 붉은 빛의 몸통에서 맑고 은은한 향을 내뿜는다. 뒤틀림이 거의 없어 목재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며, 조선 왕실의 궁궐을 짓는 데 쓰일 만큼 귀한 자재였다.   산 정상 아래에는 ‘용제’라는 천연 제단이 자리하고, 그 주변은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가 장엄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제 옆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흐르며, 과거에는 이곳에서 기우제가 열리기도 했다.   용지제 전설    칠보산에는 신비로운 샘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전설이 있다. ‘용지제’라 불린 이 이야기는 칠보산 중턱의 용지터와 그곳에서 행해진 기우제의 유래를 담고 있다. 용지터는 아기장수를 잃은 용마가 죽어 묻힌 자리라고 전해지며, 그곳의 샘은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신령한 샘으로 알려졌다.용지제 전설은 2002년 발행된 『영덕군지』와 2010년 한국학술정보의 『내 고향의 전설 경북편』에 수록돼 있다. 두 기록 모두 채록 경위는 남아있지 않지만, 지역에서 오랫동안 구전돼 온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설의 발단은 영해면 괴시리, 옛 호지말의 한 가난한 집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태어난 아기는 보통 아이와 달리 기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막 태어나자마자 천장으로 뛰어오르고, 선반 위에 올라앉는 등 상식을 벗어난 힘을 보였다. 이러한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기가 자라면 대역죄인이 되어 마을 전체를 화에 빠뜨릴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퍼진 것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아기를 빨랫돌로 눌러 죽였다. 아기는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 순간 겨드랑이 아래에는 날개가 돋아 있었다고 전한다. 아기의 죽음과 동시에 용마가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와 마을을 돌며 열흘 넘게 울부짖었다. 그 슬픔이 극에 달했을 무렵, 용마는 칠보산 용지터에서 쓰러져 죽었다. 사람들은 죽은 용마를 그 자리에 묻어 주었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용마가 묻힌 자리에서 샘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후 사람들은 이 샘을 ‘용지터’라고 불렀으며, 샘은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다.   병곡면과 창수면 주민들은 여름에 가뭄이 심해지면 이 용지터에 모여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올렸다. 그 의례가 바로 용지제다. 용지제는 단순한 고사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자연과 전설에 기대어 삶을 이어온 방식이자 칠보산이 지닌 신령성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병곡리 용머리 공원 미륵의 전설    병곡리 해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륵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영덕군향토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이 지역에서 비장 벼슬을 지낸 성씨가 ‘한’인 인물이 근해 어업권을 모두 장악하며 살고 있었다.   평소 바다를 터전 삼아 지내던 그는 어느 날 꿈에서 기이한 장면을 보게 된다. 필조불이 나타나 “뒷바다 오리바위 아래에 걸려 온몸이 해초에 감긴 채 묶여 있으니, 나를 구해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 모셔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다음 날 한 비장은 꿈에서 본 장소를 찾아갔다. 평소 지나치던 그 자리에서 해초를 헤쳐 보니, 실제로 필근불상이 해초에 걸려 있었다. 그는 불상을 건져 올린 뒤 용바위에서 북쪽으로 약 50m 떨어진 넓은 바위 위에 정성껏 모셨다. 제를 올린 뒤 한 비장의 삶은 꿈에서 예고된 듯 부귀와 영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미륵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설에 따르면, 지나가던 상선의 선원이 몰래 훔쳐갔지만, 배는 바다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몰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한 비장의 집안 역시 급격히 쇠락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주민들은 이것을 미륵불의 영험함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미륵불을 모셨던 그 바위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농어제가 열릴 때면 먼저 이 바위를 찾아 고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용머리공원이 조성돼 정자와 함께 용머리공원의 전설을 기록한 비문이 세워져 있다. 용머리의 신령스러운 기운을 의지하며 5년마다 열리는 풍어제 역시 이곳에서 시작된다. 전국의 무속인들과 관광객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그 신령함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정자 비문에는 “새천년을 기리며, 병곡 2리 주민 일동”이라는 문구가 남아있으며, 전설과 신앙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서 병곡리 용머리공원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석(神石)      영덕군 병곡면 덕천리에는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의 신앙과 함께 전해 내려오는 신석(神石)과 노송 전설이 자리하고 있다. 『영덕군지』(2002)에 수록된 이 이야기는 채록 경위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덕천리 주민들에게는 오랫동안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믿음의 대상이 되어 왔다.   덕천리에는 신비한 기운을 지녔다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다. 주민들은 이 바위를 동신(洞神)으로 모시며 각별히 신령스럽게 여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 바위에 백지를 글씨를 연습하면 글씨가 놀랄 만큼 빨리 늘고, 바위에 차렸던 제수 음식을 먹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총명해진다고 한다. 학업과 재주가 향상된다고 믿어 예로부터 아이와 어른 모두가 바위를 찾아 정성을 올렸다.   신석 옆에는 또 하나의 신비로운 존재인 노송(老松)이 서 있다. 수백 년 세월을 견뎌온 듯한 이 노송은 마을의 위기 앞에서 울음을 터트린다고 전해진다. 특히 가뭄이 들었을 때 노송이 세 차례 울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려 농사 걱정이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을 때마다 노송은 울음으로 징조를 알렸고, 이는 곧 마을을 구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흥미로운 것은 노송이 평상시에도 간혹 울음을 터트리는 경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 덕천리 사람들은 바다에서 고기가 유독 많이 잡혀 풍어를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주민들은 노송의 울음이 재앙뿐 아니라 풍요의 신호가 되기도 한다고 여겼다.   신석과 노송은 덕천리 사람들에게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마을의 수호자로 자리한다. 동신을 섬기듯 신석에 제를 올리고 노송을 지켜보는 전통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왔으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믿음 속에서 공동체의 신앙이 자연스럽게 뿌리내렸다.     영리 유적    영덕군 병곡면 영리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남아있다. 이곳 영리 유적에는 고인돌, 주거지, 제의 유적과 조선시대 분묘유적 및 생활유적 등 총 21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유적의 위치는 국도 제7호선을 따라 영해면에서 병곡면 방면으로 이동할 때 나타나는 ‘고래불교차로’ 좌측 북동쪽, 해발 20m 내외의 가지능선 정상부와 동사면에 형성되어 있다. 정상부는 평탄하며, 동 · 서사면은 경사가 급한 지형이다. 청동기시대 유구는 주로 정상부 평탄면과 동쪽 사면에 분포하고, 조선시대 유구는 북 · 남 사면에 위치한다.   영리 유적은 한국철도시설공단 영남본부의 포항~삼척 철도 노반 건설공사 7공구 사업 과정에서 기호문화재연구원에 의해 2016~2017년 정밀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이전에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대구대학교 박물관이 지표조사를 실시하며, 문화재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발굴 결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주거지 2기, 성혈 암괴 2기, 주혈군 1기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대부분 유실된 상태였으나,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내부 시설로는 1호 주거지에서 수혈 2기, 주혈 3기가 확인됐다. 1호 성혈 암괴는 부정형 평면과 말각장방형 단면을 갖추고 있으며, 최대 길이 156㎝, 최대 너비 92㎝, 최대 두께 66㎝이다. 상면에는 직경 5~8㎝, 깊이 5㎝ 내외의 성혈 9개가 남아 있고 하부구조는 확인되지 않았다. 2호 성혈 암괴는 장방형 평 · 단면 구조로, 최대 길이 191㎝, 최대 너비 140㎝, 최대 두께 62㎝이며, 상면에 직경 6~11㎝, 깊이 5~10㎝의 성혈 9개가 확인됐다.   조선시대 유적으로는 토광묘 6기, 구상유구 1기, 수혈유구 8기, 석렬유구 1기 등 총 16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1호 토광묘는 등고선과 직교하게 조성됐으며, 묘광 최대 길이 164㎝, 최대 너비 50㎝, 최대 깊이 16㎝로 발치에서 유물이 확인됐다.   영리 유적의 특징 중 하나는 ‘영리 지석묘군’으로 알려진 2기의 성혈 암괴가 지석묘와 관련 없는 청동기시대 성혈 암괴로 확인된 점이다. 이 성혈 암괴는 주변에 넓은 평야가 펼쳐지고, 해안에서 약 700m 떨어진 지점에서 해안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다.   영리 유적은 영덕군의 청동기시대 생활상과 조선시대 장묘문화를 연구하는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주거와 제의 생활, 조선시대 묘제와 생활유적이 한 공간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영리 유적을 통해 우리는 고대부터 근세까지 이어진 영덕 지역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해안과 평야를 조망할 수 있는 입지적 특성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제의 활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운계서원      영덕군 병곡면 거무역리에는 조선 후기의 운계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운계서원은 1824년(순조 24) 영해 도호부 유림들의 발의로 건립되었으며, 조선시대 영해박씨 가문을 대표하는 박제상, 박세통, 박응천을 제향하고 있다.   운계서원의 처음 터는 현재 병곡면 영리 보곡이었다. 거무역리에서 북쪽으로 약 2㎞ 떨어진 보곡에는 박세통, 박홍무, 박감의 묘소가 있다. 1818년(순조 18), 영해박씨 후손들은 선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고, 이 사당이 운계서원의 모체가 되었다. 이후 도내 유림들은 기존 건물을 주사로 활용하고, 마을 가옥을 개조하여 강당을 마련한 뒤, 박제상 · 박세통 · 박응천 3인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당시 이 건물은 ‘운계정사’로 불렸다.   그러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운계서원은 철폐되었다. 이후 1887년 후손들이 현장에 추원재라는 재실을 지었고, 1987년 현재의 위치에 사당과 봉송정을 갖춘 운계서원이 새롭게 건립되었다.   철폐 전 운계서원은 묘호가 ‘상현사’, 사호는 ‘운계사’인 3칸의 사당을 비롯해, 8칸의 강당, 3칸의 외삼문, 10칸의 주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사당과 봉송정뿐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봉송정은 2칸 규모의 사각 정자이다. 사당 옆에는 ‘삼대시중신도비(三代侍中神道碑)’가 세워져 있다.   운계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7일 향사가 봉행되며, 조상들의 덕을 기리고 지역 유림과 주민들이 함께 예를 올린다. 오늘날 운계서원은 영해박씨 가문의 역사와 조선 후기 서원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덕운산서원강당(盈德雲山書院講堂)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등운산 자락에는 조선 후기 서원의 부속 건물인 ‘영덕운산서원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운산서원은 1812년(순조12), 고려 말 · 조선 중기 인물인 백문보(白文寶, 1303 ~1374)와 그의 8대손 백현룡(白見龍, 1543~1622)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강당 건물은 1899년(광무 3) 후손 백순지 등에 의해 복설된 것으로, 당시 강당 건물만 남아 오늘날 ‘운산서원강당’으로 알려져 있다.   백문보는 고려 말 밀직제학과 정당문학을 지낸 학자이며, 본관은 대흥, 호는 담암, 시호는 충간이다. 백현룡은 백문보의 8대손으로 이황에게 학문을 배웠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운산서원은 등운산 자락, 원황마을 서북쪽에 위치하며, 마을 남쪽과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운산서원의 전신은 백현룡이 1567년(선조 즉위) 무렵 건립한 누정 ‘집승정(集勝亭)’으로, 이후 ‘남승정(攬勝亭)’이라 불렸다. 1804년 영해도호부사 김희주의 지원으로 강당·주사·대문을 새로 건립했으며, 1810년에는 묘우 6칸을 마련하고 1812년 백문보·백현룡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강당이 함께 지어졌다.   1868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운산서원은 철폐되었으나, 1899년 강당만 복설되어 ‘운산서당(雲山書堂)’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상량문은 김도화(金道和)가 지었다. 운산서원이 존립할 당시 묘우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묘문(廟門)은 3칸의 입도문(入道文), 동재와 서재는 각 3칸의 직방재(直方齋)와 박약재(博約齋)였으며, 강당은 8칸 규모로 편액은 ‘운산서원’이었다. 그 외에도 문루(門樓) 6칸, 경각(經閣) 2칸, 주사 12칸을 갖춘 비교적 큰 규모였다.   복설된 영덕운산서원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 구조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으로,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과 난간을 설치했다. 건물 내부에는 ‘운산서원’과 ‘보인당(輔仁堂)’ 편액이 걸려 있으며, 주위에는 방형 블록 담장과 철대문이 설치돼 있다.   2005년 6월 20일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영덕운산서원강당은 옛 영해 지역 대흥백씨 가문의 향촌사회 활동과 서원 문화 전승 양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각리리 유적(角里里遺蹟)      영덕군 병곡면 각리리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형성된 각리리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총 48기의 유구가 분포하며, 이는 당시 지역 주민들의 생활과 농업 활동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각리리 유적은 국도 제7호선 각리리 교차로와 북쪽 거무역리 아곡천 사이 철도 공사 구간 1~15지점 내에 위치한다. 2003~2005년 대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이후, 2016~2017년 기호문화재연구원이 포항~삼척 철도 노반 건설공사 7공구 구간 내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발굴은 사업의 시급성에 따라 두 차례로 나뉘어 시행됐다.   1차 조사(2016년 8월 11일~2017년 4월 12일)에서는 고려~조선시대 소성유구 10기, 구상유구 2기, 수혈유구 1기 등 총 13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시굴 조사 중에는 적석유구 1기와 경작유구 1기가 수습됐다. 2차 조사(2016년 8월 26일~11월 23일)에서는 경작유구 3기, 수혈유구 16기, 구상유구 6기, 소성유구 4기, 적석유구 1기, 주혈군 1기, 차륜흔 2기 등 총 33기의 유구가 발견됐다.   잔존 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경작유구는 주로 이랑 밭의 평휴법(이랑을 평평하게 하여 이랑과 고랑의 높이가 같게 하는 방식) 방식으로 조성됐다. 두둑과 고랑의 높이 차이가 크지 않고, 단면은 파상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고랑 단면은 완만한 ‘U’자형이다. 이를 통해 조상들이 토지를 효율적으로 경작하기 위해 체계적인 농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도기편, 청자편, 분청사기편, 백자편, 기와편 등 총 44점이다. 1호에서는 시유도기(施釉陶器) 동체부편 1점, 2호에서는 도기 호 구연부편(口緣部片) 1점, 도기 동체부편 1점, 분청사기 접시 구연부편 1점 등이 확인됐다. 3호와 4호에서는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8호 구상유구에서는 수키와편 3점, 암키와편 18점 등 총 21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각리리 유적은 영덕 지역 청동기 이후 생활상과 조선시대 농업 구조, 마을 공동체 활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철도 공사 구간 내 발굴을 통해 보존과 연구의 필요성이 재확인되었다.         유금사(有金寺)      병곡면 금곡3리 유금 마을, 칠보산(810m) 동쪽 자락에 자리한 유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로서 오랜 역사와 전설을 품고 있다. 고서 『여지도서』에는 유금사가 영해부 북쪽 등운산에 있다고 적혀 있으며, 『범우고』 역시 영해부 북쪽 삼십 리 지점이라 기록해 옛날에는 등운산이라는 지명이 널리 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금사는 신라 637년(선덕여왕 6년, 혹은 573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왕의 명을 받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금이 손으로 주울 만큼 많이 났다는 유금마을의 특성에 따라 사찰 이름도 유금사(有金寺)라 붙여졌다고 한다. 창건 이후 조선 전기까지의 역사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대웅전 · 종각 · 장화부인 신령각 등이 자리했고 승려들도 수십 명 머물렀다.   전언 속에는 기이한 이야기도 전한다. 어느 날 주지가 불국사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절 앞 용소에서 두 마리 용이 교미하는 장면을 보고 요괴 망측하다 꾸짖었다고 한다. 그가 절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우가 쏟아지고 산사태가 나 절이 무너졌다고 하며, 이후 중건했으나 다시 소실됐다고 한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중건은 1627년(인조 5년)이며, 1858년(철종 9년) 우인이 중수했다. 1908년(융희 2년)에는 법당만 남기고 모두 소실된 뒤 주지 김화한이 다시 일으켰다. 이후 1973년 대웅전과 여러 전각을 중수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늘날 유금사에는 서운루, 요사채, 향로전, 대웅전, 삼성각 등의 당우가 남아 있다.   유금사는 문화재가 특히 풍부하다. 대표적으로 유금사 삼층석탑(보물 제674호)과 금동여래입상, 금동주악천인상이 있다. 1973년 대웅전 중수 당시 천장 속에서 발견된 금서(金書)는 대웅전이 1627년 인조 5년에 건립되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대웅전 뒤편에 자리한 삼층석탑은 2021년부터 해체 · 보존 작업이 진행됐는데, 과정에서 일부 파손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통일신라 후기 양식을 보이는 이 탑은 원래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무렵 뒤쪽으로 옮겨졌다. 탑에서는 금동 주악천인상이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2017년에는 유금사 삼층석탑 및 사적지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탑 북쪽에서 유금사 초창기의 금당지가 발굴되었고, 남서쪽 가장자리에서는 9세기경 제작된 금동여래입상 2구가 출토되어 국보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층석탑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제작으로 추정되는 장방형 배례석도 남아 사찰의 오랜 역사와 예불의 흔적을 전한다. 오랜 세월 속에서 수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듭해온 유금사는 칠보산 자락에서 지역의 신앙과 전통을 묵묵히 이어오며, 발굴과 보존을 통해 그 가치가 재확인되고 있는 영덕의 대표 사찰로 자리하고 있다.         유금사 전설 및 개구리바위      유금사 주변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여럿 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금곡(金谷) 유금사에서 스님이 계속 죽어나가던 기이한 사건이다. 유금사에 새로 온 스님은 꼭 이튿날에 목숨을 잃는 일이 반복되자, 어느 도승이 그 이유를 밝히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 이야기를 들은 뒤 절 안팎을 샅샅이 살피다가 절에서 약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석굴 하나를 발견했다. 목욕재계 후 저녁 법당에 정좌한 도승은 마음을 가다듬고 합장한 채 자시(23시~01시)를 기다렸다. 시각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밖에서 벼락 치는 굉음이 이어졌고, 한동안 계속되다 이내 조용해졌다. 이튿날 석굴을 찾은 도승은 그 안에서 돌에 맞아 죽어 있는 거대한 지네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 일을 계기로 유금사에서 스님들이 죽어 나가던 기이한 불상사는 멈추었다고 한다.   유금사에는 신라 말기 장화부인과 관련한 설화도 전한다. 장화부인은 마의태자를 깊이 사랑했으나 신분의 차이로 인해 이룰 수 없는 인연이었다. 실연의 아픔을 안고 속세를 떠난 장화부인은 유금사로 향해 출가했고, 유금사에서 마의태자가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어느 날 신라의 패망 소식이 전해졌고, 마의태자가 유랑을 거듭하다 비명횡사했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장화부인은 마음을 태우며 그의 극락왕생을 기도하다 끝내 생을 마감했다. 당시 신도들이 장화부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고 장례를 치러주었는데, 지금도 유금사 주변에는 장화부인의 묘가 남아 전설의 흔적을 전한다.   유금사로 향하는 유금마을 입구에는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수호신처럼 아끼는 ‘개구리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칠보산 동쪽 능선에서 광산을 하던 사람들이 차량 운행을 위해 능선 끝자락의 바위를 깨던 중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과 폭우가 쏟아지자, 사람들은 황급히 깨어진 바위를 시멘트로 이어 붙였고 그 흔적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옛날 읍내에서 장을 보고 밤늦게 귀가할 때 산짐승들이 위협하곤 했는데, 이 바위만 돌아서면 어찌된 일인지 짐승들이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고 한다. 남동쪽 정면에서 바라보면 개구리의 입 모양을 닮아 ‘개구리 바위’라 불리며, 유금마을을 지키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            김성용 기자   <이 기사는 영덕군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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