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특집기사는 영덕군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 영덕군은     영덕군은 조선시대 영덕현과 영해도호부의 영역에 해당하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영해군이 영덕군에 합병되어 형성되었다. 영덕읍,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면은 구 영덕현,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 축산면은 구 영해도호부 지역이다.   특이하게도 읍면마다 각자의 깃발들이 존재한다.   □ 영덕읍 역사1896년 : 영덕군 읍내면, 중남면1914년 : 영덕군 읍내면과 중남면이 합쳐져 영덕면으로 개칭.1934년 4월 1일 : 오보면 8개 동을 영덕면으로 이관.1979년 8월 1일 :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하여 영덕면이 영덕읍으로 승격.   □ 영덕읍     영덕읍은 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청을 비릇한 군내의 행정· 교육· 사법· 체신 등의 공공기관들이 밀접하여 있어 자치행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영덕읍의 발족은 일제 강압기인 1914년에 조선시대의 영덕현의 읍내면(邑內面)과 중남면, 그리고 동면의 화수리가 합쳐서 새로이 생긴 읍(邑)이다.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영덕현의 읍내면은 우곡리, 덕천리, 곡내리(谷內里), 장기리, 남문리, 동상리, 삼구리(三丘里), 천전리, 구마리(仇麻里)의 9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이렇게 구성된 읍내면의 동리는 거의 백여년 뒤에 편찬된 1899년의 「경상북도 영덕군읍지(盈德郡邑誌)」에 의하면 우곡(右谷), 덕천(德川), 내곡(內谷), 외곡(外谷), 비석(碑石), 남부(南部), 상장기(上場基), 하장기(下場基), 상남문(上南門), 하남문(下南門), 동상리(東上里) , 서상리(西上里), 삼근리(三近里), 수정(藪亭), 구마(九麻), 천전(川前)의 17개 동리가 되며 무려 8개의 동리가 늘어난다. 이러한 것은 인구의 증가에 의한 것인지 단순히 행정적 편의에 의한 것인지는 오늘날에 와서 확인할바가 없지만 대체적으로 그 이후의 인구증가 추세로 보아 인구증가에 의한 동리의 증가로 볼수 있다. 일제시대 영덕면의 일부가 된 조선시대의 중남면의 구성을 위의 「호구총수」에 의하여 살펴보면 죽산리, 거산리, 소월천리, 지곡리, 이동리, 상·하·외직천리(上·下·外直川里), 장전동리, 눌우미리, 오포리, 구강구육· 해리(舊江口陸· 海里), 삼사랑육· 해리(三思浪陸· 海里), 피전리(皮田里)의 18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도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죽산리(竹山里), 둔리(屯里), 지곡(枝谷), 소월천(素月川), 금리(今里), 직천리(直川里), 이산리(梨山里), 장전리(長田里), 눌우미리(訥于味里), 오포리(烏浦里), 강구리(江口里), 삼시랑리(三侍郞里), 피전리(皮田里)의 13개리로 오히려 5개의 동리 명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호구총수 작성시에는 육리와 해리를 구분하여 기록한 것을 「경상북도영덕군읍지」작성시에 이들의 구분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갑오경장 이후 반상의 구분이 철페되어 육리와 해리를 구분해야 할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의 동면(오보면)은 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주등리, 삼거리, 성황당리, 기곡리, 매령리, 양장리(羊腸里), 돌면리, 예진육·해리(芮津陸·海里), 노물내동·내육·해리(老勿內洞·內陸·海里), 오보육·해리(烏保陸·海里), 대탄리, 창포육·해리(菖蒲陸·海里), 당사동리(堂詞洞里), 대부육·해리(大夫陸·海里), 하저육·해리(下渚陸·海里), 임리(林里), 도라리(悼羅里), 금진육·해리(金津陸·海里), 소하육·해리(小下陸·海里)의 28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주등역, 삼거리, 성황당, 양전리, 기곡, 매령리, 돌면리, 예진리, 노물, 창포리, 대탄리, 대부리, 하저리,금진리, 오보리, 소하리, 임리, 노내동의 18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어 10개의 동리 명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육리와 해리의 구분이 없어지고 하나의지명으로 나온 것이 동리가 감소된 주요한 원인이다. 이와 같이 영덕현을 구성하고 있던 각 면들의 동리들은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다시 변경되어 읍내면은 구미(九美 : 구마), 화개(華開 : 동상리, 삼근리, 서상리), 남석(南石 : 남부, 상남문, 중남문, 하남문, 비석, 상장기, 하장기), 덕곡(德谷: 덕천, 내곡, 외곡), 천전(川前), 우곡(右谷 : 수정)의 6개 동으로 변경되었으며, 중남면은 남산(南山: 죽산리, 둔리, 지곡), 소월(素月 : 소월천, 금리), 상직(上直: 이산리), 하직(下直), 오포(烏浦), 화전(花田: 장전리, 눌우미리), 삼사(三思: 삼시랑리, 피전), 강구(江口), 금호(錦湖: 상검(上劍))의 9개 동으로 바뀌었다.한편 동면은 주등, 미동, 삼거, 성황당, 기곡, 양장, 매령, 돌면, 예진, 노물, 오보, 대탄, 창포, 대부, 하저, 금진, 소하의 17개 리가 되었다.현재 영덕읍 구성의 골격이 갖추어진 것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원할히 하고자 1914년 3월 1일에 전국의 부군면을 통폐합하여 새로이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는데, 이때 우리 지역에서도 이의 영향으로 조선조 후기까지 부(府)로 존속하던 영해가 1895년에 영해군으로 개칭되어 북부 7개 면을 통합하던 영해군과 조선시대의 영덕현으로 존속하며 남부 6개 면을 통할하다가 1895년에 영덕군으로 개칭된 영덕군에 합쳐져 새로이 영덕면,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면, 축산면,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의 9개 면으로 축소 통합되어 통합된 영덕군이 구성되게 되었다.이렇게 하여 새로이 구성된 통합영덕군의 1면으로써 영덕면의 구성을 살펴보면 1914년 3월 1일 통합전 영덕군 읍내면의 6개 동과 중남면의 9개 동, 동면의 화수리(華水里: 주등, 미동)가 새로이 추가되어 16개 동으로 개편되면서 면명을 영덕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1934년 4월 1일에 이르러 다시 군의 행정구역 변경으로 중남면의 소월, 상직, 하직, 오포, 화전, 삼사, 강구, 금호의 8개 동이 강구면으로 이속(移屬)되어 가고, 대신 동면(東面)인 오보면(烏保面)의 창포(菖浦), 대부(大夫), 대탄(大灘), 노물(老勿), 오보(烏保), 매정(梅亭: 매령, 성황당, 기곡, 양장), 석동(石洞: 돌면, 예진), 삼계(三溪: 삼거)등의 8개의 동을 영덕면으로 이관시켜 영덕면을 새로이 구성하였다.광복 이후에는 영덕면의 행정구역은 크게 변경된 것이 없었으나, 1979년 8월 1일에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하여 영덕면이 영덕읍으로 지위가 승격되어 명실공히 영덕을 대표할수 있는 군 행정의 중심지로써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6월 29일에는 군조례 제1293호에 의하여 축산면 화천리를 영덕읍 화천리로 이속(移屬) 개편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1995년 12월 29일에는 군조례 제1375호에 의해 덕곡리가 덕곡1·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청(栢靑)리백청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잣나무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초인 성종(成宗) 연간에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초인 선조(宣祖) 연간에 수안김씨(遂安金氏)의 진사(進士) 김필경(金必慶)이 입주하여 흘리(屹里)라 했으며, 함창김씨(咸昌金氏)가 입주하여 잣나뭇골이라 했으며, 또 망상골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박경룡(朴景龍)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서리가 오지 않는 곳이라 하여 망상골(望霜谷, 忘霜谷, 忘星洞)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 지역으로 잣나뭇골 또는 백목동(栢木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백청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변경할 때 백청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백청리의 위치는 동은 수리, 서는 영양군(英陽郡), 남은 보림리, 북은 울진군(蔚珍郡)으로, 삼승령 등 수봉(秀峰)으로 둘러싸여 있다.망상골 : 잣나뭇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서리가 오지 않음.큰새골 : 백청리 남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허릿골(屹里) : 백청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임.○ 보림(寶林)리보림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원씨(元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버임이라 했다 하며, 그 뒤 무안박씨(務安朴氏)가 들어와 옷재(烏峴)라 하다가 보림으로 개칭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烏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중동(寶中洞, 중말)을 병합하여 보림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보림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보림리의 위치는 동은 인천리, 서는 옷재(烏峴) 넘어 영양군, 남은 독경산(讀經山) 맥을 넘어 멀리 인천리, 갈천리가 있으며 북은 백청리가 있다.거릿마 : 웃버임 앞길 옆에 있는 마을임.중말(중마, 寶中洞) : 웃버임과 아릿버임 중간에 있는 마을임.아릿버임 : 버임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웃버임(寶上洞) : 버임 위쪽에 있는 마을임.○ 구미(九美)리구미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의 위치가 구비구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안쪽에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때(661~681)에 한 선비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당시 마을 앞의 삼밭(麻田)을 이용하여 화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구마동(仇麻洞)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읍내면(邑內面)에 소속되어 「구미마(仇尾麻)」「구마(仇麻)」등으로 불렀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에 의해 종전의 현(縣)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구미리는 영덕군에 속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부령(府令) 제111호(1913.12.29 公布)로 부군면(府郡面)을 자의로 폐합할 때 구미동이라 하여 영덕면(盈德面)에 편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9409호(1979.04.07 公布)에 의해 영덕면이 읍(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구미리는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1988.04.30 公布)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구미동은 구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리의 위치는 동쪽은 화수리와 이웃하며, 남쪽은 오십천과 무릉산이 있고, 서쪽은 지품면과 경계하고 북쪽은 화림산(華林山)이 있다.새마을 (新村) : 구미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임재궁마·재삿마·수정동(水晶洞) : 15세기말(成宗 22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영덕 입향조 (入鄕祖)인 신희(申禧)의 재실(齋室)인 수정재(水晶齋)가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주막거리(거릿마을) : 구미리 남쪽 길가에 옛날 주막(酒幕)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개닥골 : 굴깨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행교골 : 중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남강서원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임.○ 화개(華開)리화개리 동명의 유래는 화림산(華林山)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동상동, 삼근동, 서상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화개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소속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화개리는 읍 소재지에 위치하는 마을로 동은 덕곡리, 서는 천전리와 지품면 오천리, 남은 남석리와 덕곡리, 북은 화수리와 구미리가 있다.동문밖(東門外) : 화개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성의 동문 밖이 되는 마을로 10세기 후기인 고려(高麗)시대에 주씨(朱氏)와 윤씨(尹氏)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동상동(東上洞) : 동문 밖 동쪽에 있는 마을임.삼근동(三近洞) : 동문 밖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읍(장터)이 가깝고(邑), 산이 가깝고(華林山), 물이 가깝다(五十川)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약 16세기경 안씨(安氏)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 하였다고하며, 그 뒤 온양방씨(溫陽方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서상동(西上洞) : 동문 밖 서쪽에 있는 마을임.너더미골(미더미골) : 무덤골이 변해서 미더미골로 불려졌다.너더미골(미더미골) : 당시 불교식 장례의식(화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뼈가루를 담은 골호가 많이 매장된 곳이다.○ 남석(南石)리남석리 동명의 유래는 남부동(南部洞)의 「남(南)」자와 비석동(碑石洞)의 「석(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읍내면 지역으로 상장동(上場洞), 하장동(下場洞), 남부동(南部洞), 상남동(上南洞)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부,군,면(府郡面)을 통폐합할 때 상장동, 하장동, 남부동, 상남동, 하남동, 중남동과 비석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남석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시켰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남석리가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남석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남부동(남문거리, 남부) : 남석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 영덕읍성(盈德邑城)의 남문(南門)이 있었는데 상남문, 중남문, 하남문의 세 마을로 나누어 있었음. 비석동 : 조선시대 영덕 현령(縣令)의 치적불망비(治蹟不忘碑)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임. 상남문(上南門, 두들목) : 남문거리 위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에서 지대가 높은 곳이므로 일명 두들목이라 하였음. 장터(場基) : 중남문에 딸렸던 마을로 현재 학원(學院)이 있는 전방 3거리에는 4일장이 섰으며 양조장 앞에는 9일장이 섰다. 이 시장은 어물전이 이동하는 데 따라 곡류(穀類)와 잡화 등이 반대쪽에 서게 되었 다고 한다. 또 남문거리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남문(下南門)이라 했으며 장터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장 (下場 : 하장기)이라 하였다.○ 덕곡(德谷)리덕곡리 동명의 유래는 덕천리(德川里)의 덕(德)자와 우곡리(右谷里)의 곡(谷)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내곡리(內谷里)의 곡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연간인 7세기 후반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개척하였고, 덕천(德川)이라 하였다. 덕이 많은 곳과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른다 하여 이렇게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내곡동, 외곡동, 덕천동, 우곡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덕곡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덕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곡리의 위치는 동은 덕곡천(德谷川)이 있으며, 서남은 남석리, 동남은 우곡리, 북은 화수리와 접해 있는 영덕읍 소재지의 중심마을이다.   골안(谷內) : 덕내(德川) 안쪽에 있는 마을.덕내(德川) : 도매두들과 골안 사이에 있는 마을로 덕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임.도매두들 : 덕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해일(海溢) 때 도마만큼 남았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천전(川前)리천전리 동명의 유래는 내(川)가 앞(前)에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7세기 중기인 현종(顯宗) 연간에 야성김씨(野城金氏) 김취린(金就隣)의 후손들이 마을을 개척,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천전동이라 하여 영덕면의 관할로 하였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천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0.7km 떨어진 마을로 동은 오십천, 남석리, 서는 칠령산, 강구면 상직리, 남은 남산리, 북은 화개리가 있다.아룻내(아릿내피, 下川前) : 내앞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웃내(웃내피, 上川前) : 내앞 윗쪽에 있는 마을임.수운산 : 무릉산적은 덤배기 : 아룻내 서쪽에 있는 고개.○ 남산(南山)리남산리 동명의 유래는 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산 1리는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안씨(安氏)라는 분이 개척했으며 그뒤 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남산 2리는 밀양손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일제(日帝)가 부,군,면(府郡面)을 통폐합 할 때 우곡동(右谷洞)의 일부와 중남면(中南面) 둔리(屯里) 일부, 지곡동(枝谷洞)을 병합하여 남산(南山) 아래에 위치한다 하여 남산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시켰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남산리의 위치는 오십천 건너 강구면 금호리와 마주 보고 있으며, 뒤로는 칠령산(七嶺山)이 둘러싸고 있다. 남은 강구면과 경계인 입내산(入來山)이 있으며 북은 영덕대교가 있다.가짓골(枝谷, 가죽골) : 마을 형태가 나무가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두일(둔호) 서북쪽 골짜기에 있음. 조선시대에 갓바치들이 살았다고 하여 가죽골이라고도 함.대밭골(竹山里, 절마) : 둔호 남쪽 두런산(입래산) 아래에 있는 마을임.둔호(屯湖, 두일 屯里) : 남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마을 앞에 호수가 있음숲숲지 : 남산 1리로 마을 앞에 숲이 무성하다고 붙은 이름으로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숲이 유실되었음.○ 우곡(右谷)리우곡리 동명의 유래는 읍 남쪽 오른쪽 골짜기라 하여 우루실 또는 우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어느 때인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 읍내면 지역으로서 마을 남쪽에 강이 흐르므로 남강(南江)이라 불러오다가 남강서원(南江書院)이 창건되자 서원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비석동 일부를 병합하여 우곡동이라 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우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곡리의 위치는 동은 고불봉과 강구면 하저리, 서는 오십천과 남석리, 남은 강구면 금호리, 북은 덕곡리와 연해 있으며 현 영덕읍 사무소에서 6백m 동쪽에 있다.남강서원 터 : 우곡리 169번지 일대에 있었던 남강서원의 터임.댓대대 : 동리 동쪽 뒤에 있는 대나무 밭으로 고종 때 남강서원이 훼철될 때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양 선생의 위패를 묻었다고 함.금산 삐알 : 남강서원이 있던 동쪽 뒤산 비탈로 금을 캤다고 하여 붙은 이름임.호호대(浩浩臺) : 경관이 아름답고 이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일어난다고 한다.망월봉(望月峯) : 모양이 望月(보름달)과 같다 하여 붙인 이름.○ 화수(華水)리화수리는 조선시대 영덕현의 동면 주등과 미동이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통폐합 때에 영덕면이 생기면서 동면에서 이속하여 오면서 생긴 이름이다. 화수 1리인 주등은 15세기경 파평윤씨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화수 2리인 미동은 약 400여년 전에 강릉유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마을 주변의 산과 내의 전경이 아름다워 미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등이란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주등역이 있어 주점과 숙박시설이 많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밋대골 : 주등 남서쪽에 있는 마을.삼거리 : 주등 북동쪽에 있는 마을.자부티 골 : 삼거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홍둣골(紅圖院) : 조선시대 역원이 있던 곳으로 경치가 좋으며, 약수가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온 곳으로 유명함.반달산 : 마을 앞산으로 인해서 이 마을에는 옛부터 미인이 많다고 한다.○ 삼계(三溪)리삼계리 동명의 유래는 흰댕잇골, 땟골, 웃골 등 세 골짜기의 물이 합하는 곳이므로 시거랑, 시걸이 변하여 시거리 또는 삼계라 하였다. 이 마을은 류유(柳)가 문종(文宗), 단종(端宗) 때에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재임하다가 단종 폐위 소식을 듣고 사직하여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하였다고 하며, 삼구당(三龜堂) 신공망(申公望)이 들어와 평산신씨 입향조가 되었으며, 야성김씨 김수문(金秀文)도 이곳에 정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계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종전의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삼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계리의 위치는 동은 대탄리, 창포리, 서는 화수리, 남은 덕곡리와 강구면 하저리, 북은 오보리, 매정리가 있다.아릿모치 : 삼계 아래에 있는 마을임.웃 모치 : 삼계 위에 있는 마을임.○ 매정(梅亭)리매정리 이명(里名)의 유래는 매정(梅亭)의 매(梅)자와 양정(良亭)의 정(亭)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이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기곡동, 성황동, 신리동, 매령동, 양정동을 병합하여 매정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에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매정리는 영덕읍에 소속되었으며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매정동은 매정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行政洞)으로는 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매정리의 위치는 동은 노물리, 오보리, 서는 화수리, 남은 삼계리, 북은 석리가 있다.맷재(梅嶺) : 매정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祖) 연간에 순흥안씨가 개척했다고 함.○ 석(石)리석리 동명의 유래는 돌이 많은 곳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7세기경인 인조(仁祖) 연간 병자호란때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이곳에 피난하여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 이었으나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예진동 돌면동을 병합하여 석리라 하고 오보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12km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로 동은 동해, 서는 등달골산과 매정리가 있으며 남은 노물리, 북은 축산면 경정리가 있다.돌면(乭面) : 석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임.예진(芮津) : 석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아 돌미역이 많이 생산됨.○ 노물(老勿)리노물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노물(老勿)」이란 늙지 말라는 뜻으로써 늙지않는 즉 장수(長壽)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노물이란 이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도 나오며, 물(勿)자는 고구려 계통의 언어로 아마 4~5세기 경 고구려가 남하하여 청하와 흥해를 경계로 할 때, 영덕의 지명인 야시홀이란 이름이 붙을 당시에 같이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13세기경에 안씨(安氏), 정씨(鄭氏), 박씨(朴氏) 등이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으로 노물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부,군,면(府郡面)을 폐합할 때 노내리(老內里)를 병합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되어 오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될 때 영덕읍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매정리, 남은 오보리, 북은 석리가 있다.노내리(老內里 : 골마) : 노물 안쪽에 있는 마을임.섬(성)뚝마 : 섬(성)뚝 남쪽에 있는 마을임.섬뚝새 : 섬뚝 동쪽에 있는 마을임.○ 대탄(大灘)리대탄리 동명의 유래는 동해 바닷가 큰 여울 옆이 되므로 해여울, 해월, 또는 대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6세기경에 정영용(鄭英用)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향월(香月)이라 하였는데 19세기 중기에 강씨(姜氏)라는 분이 들어와 마을에 큰 여울이 있다 하여 대탄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대탄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삼계리, 남은 창포리, 북은 오보리가 있다.약물내기 : 동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약물이 남.노고지리 콧잔등 바우 : 동리 남서쪽에 있는 노고지리 봉에 있는 등성이로 노고지리의 콧등처럼 뽀족 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임○ 오보(烏保)리오보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烏)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올치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오보(烏保)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15세기경 유씨(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본래 오보부곡(烏保部曲)이 있던 곳으로써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으로 오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보동이라 하여 오보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들을 사이에 두고 매정리와 연해 있고 남은 대탄리, 북은 노물리가 있다.아릿맛골 : 오보 아래에 있는 마을임.웃 맛골 : 오보 윗쪽에 있는 마을임.○ 창포(菖浦)리창포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은 붓꽃이 많이 피는 갯가가 되므로 「붓개」 또는 창포라 하였다. 이 마을은 통일신라시기인 7세기경에 임씨(林氏)가 개척했다 하며, 그 뒤 조선 후기 인조(仁祖) 연간인 17세기경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후예가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창포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속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창포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 해안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별반산(別畔山), 남은 대부리(大夫里), 북은 대탄리가 있다.웃마(웃모치, 상창포) : 창포 윗쪽에 있는 마을임.중간마(중간모치) : 웃마와 아릿마 중간에 있는 마을임.아릿마(아릿모치, 하창포) : 창포 아래에 있는 마을임.봉의뜨미(별반산) : 웃마 북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별반산 봉수대가 있어 남으로는 황석산, 북으로는 대소산 봉수대와 연결하였다.○ 대부(大夫)리대부리 동명의 유래는 16세기경 안씨(安氏)가 터를 잡았으며 그 뒤 송씨(宋氏)가 들어와서 제당(祭堂)을 짓고 동명을 태고진(太古津)이라 했으며 김씨(金氏)가 들어와 태부(太夫)로 개명하였다가 다시 대부(大夫)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지역으로 태부(太夫)라 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日帝)는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의로 통폐합 할 때 태부동으로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소속시켰다가 193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대부동(大夫洞)으로 하여 영덕면에 편입시켰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에 의하여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소속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부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부리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 해안쪽으로 7km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로 동은 동해에 임해 있고, 서는 삼계리와 남은 강구면 하저리, 북은 창포리가 있다.샛것마을 : 대부리 동쪽에 있는 마을.아릿것마을 : 대부리 아래에 있는 마을임.웃것마을 : 대부리 위에 있는 마을임.○ 화천(華川)리화천리 동명의 유래는 화개동의 화(華)자와 금천동(琴川洞)의 천(川)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덕군 축산면(丑山面)에 속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천리라 했으며 1993년도에 영덕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화천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면 기암리, 서는 지품면 삼화리, 남은 화수리, 북은 축산면 대곡리가 있다. 거릿마 : 길골 동쪽에 있는 마을임. 곰창(態倉) : 화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웃곰창과 아랫곰창이 있다. 곰창이란 명칭은 옛날 화림산과 국사봉에 곰이 많았는데 사냥꾼들이 곰을 잡아 가둔 흔적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6세기 중기인 명종(明宗) 연간에 충의공(忠義公) 김문기(金文起) 선생의 4세손인 김영철(金永哲)이 몸을 숨기기 위해 이곳을 찾아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광싱이(廣山) : 화천리에 있는 마을임.길골(道谷洞) : 금천 서쪽에 있는 마을로 16세기 중기인 중종(中宗) 연간에 함양박씨의 진사(進士) 박성규(朴聖奎)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김해김씨와 영양남씨가 들어왔다고 하였다.너말(너매말) : 금천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임.무징(武徵) : 화천리 서쪽에 있는 마을임.싯집마 : 거릿마 동쪽에 있는 마을임.아랫곰창(琴川) : 곰창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금천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주위 경치가 아름답고 또 수석 (水石)이 좋아 붙여진 이름으로 16세기 중기인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에 강릉함씨(江陵咸氏) 만호(萬戶) 함득선(咸得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양지마 : 음지마 북쪽에 있는 마을임.웃곰창(華溪洞 : 감촌) : 곰창 윗쪽에 있는 마을임.음지마 : 화천리 음달쪽에 있는 마을임.     ** 이 기사는 영덕군의 지원을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김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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