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게의 고장 영덕군의 중심도시 영덕읍해동지도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읍치는 성채로 둘러싸여 있고 오십천이읍치를 서쪽으로 휘감아 흐르고 있다개항기 영덕 하수리 출신 신운석 의병장청심분파소서 문초 받자 혀 깨물고 불응1896년 8월 초 3일 총살당해 장렬히 순국       영덕은 충절의 선비 정신과 애국 정신이 깃든 호국의 고장이다. 바다에는 풍어가가 울려 퍼지고 들녘에는 풍년가를 부르는 풍요의 땅이다. 이뿐인가. 영덕은 고려말 불교계의 고승이며 왕사였던 나옹 선사와 함께 고려말 문신이자 대학자로서 성리학과 불사이군의 충절사상으로 학문과 정치에 큰 업적을 남긴 목은 이색 선생의 출생지이다. 700년 전통 문화를 자랑한다. 한말의 평민 의병장인 신돌석 장군, 화개리 출신의 신운석 장군이 태어나 역사적 항일 정신을 후세에 남겼다. 영덕은 동학혁명의 시발지이다. 그래서 인지 고을마다 타는 저녁노을은 보기만 해도 아름답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풍금가가 절로 나온다. 인심도 넉넉하다.   영덕은 많은 유적이 각지에 산재해 있듯 곳곳에 유구한 역사와 문화적 풍부함이 살아있는 고장이다. 다른 어느 지역에 뒤지지 않는 훌륭하고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2023년 12월 기준 지정유산은 94건(보물 2점, 명승 1, 천연기념물 1, 국가민속유산 6, 등록문화유산 13, 유형문화유산 3, 기념물 4, 민속문화유산 13, 문화유산자료 43)을 보유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 동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사람들의 이름에도 그 뜻이 담겨있듯이 우리가 사는 동에도 그 의미와 뜻이 있다. 슬프기도, 아름답기도 한 그 유래를 찾아본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와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이 바로 영덕이다. 때문에 월간 정치와 사람은 영덕지역 마을이 간직한 이야기와 설화, 공동체 정신 등을 찾아 새로운 문화관광 마을을 만드는데 한몫한다.   말 그대로 영덕 마실 이야기이다. 영덕군의 1읍 8면의 마을 이야기를 연재한다.       ● ● 영덕은 어떤 곳   영덕군은 경북 동북부에 위치, 영남지방에 속한다. 포항시와 울진군, 영양군, 청송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태백산맥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리고, 칠보산과 팔각산이 형성돼 있다. 병곡 영해평야를 이루고 향토의 젖줄인 오십천이 흐르고 있다. 대체로 온후한 편이다. 여름 최고온도는 섭씨 38도, 겨울 최저온도는 영하 13.8도이다. 봄철은 동남풍, 겨울철은 서북풍이 심하게 불며 가을이 길고 봄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영덕군은 태백의 지맥으로 신비스러운 팔각산과 칠보산, 옥계계곡 등 명산 절경과 동해안 64㎞의 물 맑고 바다 푸른 청정해역이 어우러져 있다. 가는 곳마다 일출을 볼 수 있다.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천혜의 관광 자원과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순박한 민심과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고 대게, 복숭아를 비롯한 특산물이 풍요로운 곳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야시홀(也尸忽)이라 했다. 통일신라대 경덕왕(景德王) 정유년(서기 757년)에 전국을 9주(州)로 나눌 때 주(州)로 개칭(改稱), 주장(州長)을 두면서 유린 군으로(有隣郡) 고쳐졌다.    고려시대에는 태조(太祖)가 처음 순시(巡視)했을 때 주민들이 예의(禮儀) 바르고 서로 사양(辭讓)하는 미풍(美風)이 있다고 해서 예주(禮州)라 칭했다. 조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태조(太祖) 6년(서기 1397년)에 진(鎭)으로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겸 부사(府使)를 뒀다. 태종(太宗) 13년(서기 1413년)에 도호부(都護府)로 됐다가 고종(高宗) 32년(서기 1895년)에 영해군(寧海郡)이 됐다. 서기 1914년에 영덕에 합병됐다.     ● ● 영덕 군화 복숭아꽃 영덕군(盈德郡)은 대한민국 경북도 동해안에 있는 군이다. 어업이 발달해 특산물로 대게가 유명하다. 기타 복숭아, 송이, 물가자미, 황금 은어 등의 특산물이 있고, 해수욕장으로 고래불, 장사, 대진해수욕장이 있다. 유원지로는 달산 옥계계곡, 지품 오천 솔밭 등이 있다. 주요 관광지로 강구항, 삼사해상공원, 영덕어촌민속전시관, 영덕 풍력발전단지, 영덕 신재생에너지전시관, 신돌석 장군유적지, 영해 괴시 전통마을, 영덕향교 등이 있다. 군청 소재지는 영덕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8면이다.   마을에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가 깃들여 있다. 이 때문에 마을의 이야기는 문화·관광·역사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영덕의 군화는 복숭아꽃이다. 영덕의 명산물로 매년 만개 시점에 복사꽃 큰잔치를 개최, 영덕인의 순박한 심성을 상징한다. 군조는 갈매기다. 갈매기는 95.12Km 해안 전역에 서식한다. 꿈을 향한 쉼 없는 비상과 영덕인의 진취성과 높은 이상을 상징한다. 군목은 곰솔이다. 곰솔은 해풍에 견디는 강인성과 척박한 땅에 사는 강한 생명력과 영덕인의 굳센 기상을 상징한다. 군어는 황금은어다. 황금은어는 영덕군 전역에 서식하며 아가미 밑에 진한 황금색 띠가 있어 다른 은어와는 구별할 수 있다. 회로 먹었을 때 수박 향 또는 오이 향이 나며, 예로부터 수중군자, 청류의 귀공자로 불리며 임금님 수라상에 진상되던 진귀한 특산물로 오랜 세월 영덕을 대표하는 어종이다. ● ● 자연환경  태백산맥의 동사면에 위치해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져 동해에 이른다. 북동쪽에는 태백산맥의 분수령인 칠보산(七寶山, 810m) · 등운산(騰雲山, 767m) 등이 솟아 있고, 곳곳에 봉우리를 남기며 동해에 다다른다. 북서쪽 영양군과의 경계에 독경산(讀經山, 564m)· 독경산(獨慶山, 683m)· 울치재(泣嶺, 527m)· 맹동산(808 m)· 명동산(明童山, 812m)이 있다. 남서쪽 청송군과의 경계에 대둔산(大遯山, 905m)· 벽구등(846m)· 대궐령(大闕嶺, 740m)이 있다. 중앙부에는 형제봉(兄弟峰, 704 m)· 국사당산(國祠堂山, 511m)· 화림산(花林山, 347m) 등이 솟아 있다. 망월봉(望月峰, 230m)· 망일봉(望日峰, 152m)· 봉화산(278m)· 별학산(別鶴山, 236m)· 중구봉· 무둔산(蕪芚山, 208m)· 관어대(觀魚臺, 183m)· 면현(眠峴, 115m)· 목골재(일명 송현) 등이 있다.   하천은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가로질러 큰 것은 없고, 동해로 직류(直流) 하는 독립수계(獨立水系)로서 서부 산지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松川)과 오십천(五十川)이 있다. 이 하천이 영덕과 영해(寧海)를 형성하고 있고 그 외는 대부분이 소하천들이다. 송천은 창수면 울치재에서 발원해 작연(鵲淵)에서 울릉천(蔚陵川)을 합한다. 송천은 다시 영해면 원구리 용당(龍塘) 앞에서 남천(南川)을 합해 대진해수욕장에서 동해로 흘러든다.   연안에는 소규모의 충적지가 발달해 경지로 이용되고, 하구에는 해안사구가 발달해 있다. 대둔산에서 발원해 지품면을 동쪽으로 흐르다가 신안리에서 신안 천을 합류한 뒤 동남류해 지품면 산양리 부근에서, 대둔산에서 흘러내려 달산면을 북쪽으로 흐르는 대서천(大西川)과 팔각산(580m)에서 흘러내려 달산면을 북쪽으로 흐르는 소서천(小西川)을 합류하고 영덕읍· 강구면을 관통해 동해로 흘러든다. 이들 하천의 하류에는 각각 영해평야와 영덕평야· 금호평야가 형성되어 경지와 촌락이 집중해 있다. 이 지방 하천들의 특색은 유역(流域)이 짧고 격류(激流)이며 홍수 때에는 범람하고 가뭄이 심할 때는 건천(乾川)이 되기도 한다. 해안선은 53㎞로 단조로우며 암애(岩崖)가 많아 해안 경지가 거의 없고, 하구부에 사구가 발달해 해수욕장이 개발돼 있다. 바다는 수심이 깊고 급경사이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해 연평균기온 12.7℃, 1월 평균기온 -0.4℃, 8월 평균기온 27.1℃이며, 연 강수량은 1,016㎜이다.   ● ● 유물 · 유적선사 유적으로 병곡면에 석관묘, 영덕읍 화수리에 세형동검이 출토된 고인돌이 있으며, 창수면에서는 간돌칼· 간돌화살촉 등의 석기가 출토됐다. 고대의 성곽으로는 영덕읍의 오보리성터(일명 烏保鎭城址), 달산면의 주응리 성터(일명 達老山城址), 축산면의 축산리 성터 등이 있다.봉수로는 영덕읍 창포리의 별반산봉수대(別畔山烽燧臺)와 축산면 도곡리의 영덕 대소산 봉수대(경상북도 기념물, 1982년 지정)가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병곡면 금곡리의 유금사 삼층석탑(보물, 1980년 지정),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창수면 갈천리의 장육사 대웅전· 영덕장륙사건칠보살좌상(보물, 1989년 지정)과 보림리탑(寶林里塔), 남정면 남호리의 이층석탑과 석불좌상 등이 있다. 사찰로는 옥천사(玉泉寺)· 용천사(龍泉寺)· 용운사(龍雲寺)· 범흥사(梵興寺)· 사자갑사(獅子岬寺) 등이 있다. 유교 유산으로는 영덕읍 화개리에 영덕향교, 영해면 성내리에 1529년(중종 24) 옮겨 세워진 영해향교(寧海鄕校)가 있다. 누대와 정자로는 1693년(숙종 19)에 건립돼 현재도 원형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 창수면 갈천리의 화수루(경북도 유형문화재, 1975년 지정)와 수리의 덕후루(경북도 유형문화재, 1987년 지정)가 있다. 창수면 수리에는 조선 중기의 무관이며 임진왜란 때 전공을 올린 박의장 묘소가 있다. 돌비로는 신돌석 유허비 · 박겸호기념비와 이 곡· 이색부자 유허비 등이 있다. 영해면 원구리에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남경생(南慶生)의 관련 유물인 영해난고종가문서(경북도 유형문화재, 1982년 지정)· 영해난고종가정침(경상북도 민속자료, 1982년 지정)과 난고정(蘭皐亭)이 있다.   고가로는 창수면 인량리에 영덕 충효당· 인양리 용암 종택· 갈암종택(경북도 기념물, 1991년 지정)· 우계 종택, 축산면 도곡리에 무안박씨무의공파종택· 영덕 도곡동 충효당· 박원대고가· 신돌석 장군 생가지(경북도 기념물, 1993년 지정)와 약 300여 년 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박 의장 생가가 있다. 영덕 충효당은 1984년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인양리 용암 종택은 1985년 경북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우계 종택은 1995년 경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무안박씨 무의공 파 종택은 1987년 경북도 민속자료로, 영덕 도곡동 충효당은 1988년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영해면 괴시리의 영양남씨괴시파종택(경북도 민속자료, 1987년 지정)· 괴시동태남택(경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괴시동물소와고택(경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괴시동해촌고택(경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대은종택(경북도 문화재자료, 1993년 지정), 창수면 오촌리의 면운재고택(경북도 민속자료, 1991년 지정) 등이 있다.   존재종택 및 명서암· 우헌정(경북도 문화재자료, 1994년 지정), 병곡면 송천리의 송천 세려 고택(경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창수면 인량리의 영덕만괴헌(경북도 문화재자료, 1988년 지정)· 사암재(경북도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 지족당(경북도 문화재자료, 1993년 지정), 영덕읍 구미리의 영덕수정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8년 지정)가 있다. 창수면 갈천리에는 167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특한 건축양식과 기법의 갈천동 초가 까치구멍집(경북도 민속자료, 1975년 지정)이 있다. 영해면 성내리에는 1980년 경북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된 영덕별신굿이 전승되고 있다. 달산면 옥계리의 침수정계곡일원(경북도 기념물, 1983년 지정), 강구면 소월리 입래산(入來山)과 영덕읍 구미리 공북정(拱北亭)에서 피는 거제화(巨濟花)가 유명하다. 이 꽃은 붉은색으로 크기가 매화와 비슷하고 늦은 봄철에 핀다. 조선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한 이곳 출신 신종부(申從溥)가 한성판윤· 거제군수 등을 역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올 때 거제에서 가져온 꽃이라 하여 거제화라고 불렀다 한다.       ● ● 영덕의 중심도시 영덕읍 영덕읍은 영덕의 중심지이다. 영덕군의 중앙에 위치하는 읍이다. 17개 법정리로 구성돼 있다. 읍사무소는 우곡리에 있다.   영덕 읍기는 다양한 색상으로 이뤄져 있다. 녹색은 수려한 산천과 영덕읍의 희망을, 숫자 27은 영덕읍 27개리의 화합을 상징한다. 붉은색 큰원은 영덕군은 1개읍 8개 면으로 형성돼 영덕읍이 중추적 역할을 한다. 노랑색 글씨는 청렴을 의미하고, 청색 오선은 영덕읍을 상징하는 오십천이다. 노랑색 원(8개)은 영덕을 중심으로 북부 5개면 남부 3개 면을 표시한다. 영덕 오십천이 남서쪽으로 통과하고 있고, 영덕해맞이공원이 대탄리에 해안가 있다. 지금의 영덕읍 지역은 조선 시대에는 읍내면(邑內面)과 동면(東面)으로 구분돼 있었다. 대체로 화수리를 포함한 동쪽 지역은 동면 땅이었고, 덕곡리를 포함한 서쪽 지역은 읍내면 땅이었다. 해동지도(영덕), 1872년지방지도(영덕)를 보면, 읍치(군아(郡衙)가 있던 곳)는 성채로 둘러싸여 있고 오십천이 읍치를 서쪽으로 휘감아 흐르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임경대(臨鏡臺)가 빠짐없이 표시돼 있다. 읍치 북쪽의 주요한 경계표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이 임경대는 화개리 무둔산 서쪽 기슭에 있는 너른 바위로 현재는 면경대(面鏡臺)라고 일컬어진다. 신라 시대에는 야성현에 속했다. 고려 초기에 영덕으로 개칭됐다. 읍의 소재지이므로 읍내면이라 해 우곡· 독펀 등 17개 이를 관할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중남면(中南面)과 외남면을 병합해, 영덕면이 됐다가 1979년 읍으로 승격됐다. 1993년 6월에는 축산면 화천리를 영덕읍 화천리로 개편했다. 1995년 12월 29일에는 덕곡리가 덕곡리 1· 2리로 분리됐다.전 지역은 태백산맥의 동쪽 사면으로 읍의 경계에 화림산, 남쪽에 삿갓봉(206m) 등의 낮은 산이 있다.     ● ● 일반현황현재의 영덕읍 구성은 구미리, 화개1· 2리, 남석1· 2· 3리, 덕곡1· 2리, 천전리, 남산1· 2리, 우곡리, 화수1· 2리, 삼계리, 매정1· 2· 3리, 석리, 노물리, 오보리, 대탄리, 창포리, 대부리, 화천1· 2· 3리 27개의 행정리와 17개의 법정리, 37개의 자연부락, 189개의 반으로 구성돼 있다. 1981년 6월 2일 군 조례 제585호에 의해 읍 소재지를 덕곡리 301에서 우곡리 310으로 이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읍의 면적은 6만 6072㎢이다. 면적 6만 6010㎢, 5396세대로 인구 1만 129명(2025년 3월 현재)이다. 남자는 4874명, 여자는 5255명이다. 서쪽에서 오십천이 남쪽으로 흘러 동해로 흘러든다. 오십천 연안에는 소규모의 충적 지인 영덕평야가 형성돼 있다. 총 경지면적 9.15㎢로 13.8%, 임야면적 48.65㎢로 73.6%, 기타 12.6%로 이뤄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79㎢로 52.3%를 차지한다. 밭이 4.36㎢로 47.7%를 차지, 논농사가 높은 비율로 행해진다. 쌀· 보리 등의 주곡 생산 중심의 전통적인 농업을 경영한다. 하천부지에는 사과원의 과원과 야산지의 개간으로 복숭아 등 과실 생산이 증가하고 있다. 대추· 도토리· 송이버섯· 산나물· 토석류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한우· 돼지· 개· 산양· 닭· 꿀벌 등이 사육된다.   동해안에 면해 있으나 어항의 발달이 불리해 어업기능은 미약하다. 상업 활동으로 남석리에 4· 9일장인 영덕장이 개장, 동해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과 채소 등이 거래된다.   최근 상업 기능이 발달해 시가지 내에 상가의 형성과 행정기관의 집결로 도시경관을 조성해 가고 있다. 남북 간의 동해 고속화도로의 개통과 영덕~안동간의 국도가 포장돼 물자교류 및 동해안과 경북 북부 지방간의 관광산업개발에 큰 효과를 올리고 있다.   문화유적은 화개리에 영덕향교, 구미리에 수정재· 공북정, 오보리에 성지, 창포리에 별반산봉수대, 우곡리에는 신돌석의 기념비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교 2개 교가 있다.           ● ● 4월 복숭아꽃 만발읍의 지세(地勢)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이 남북으로 길게 동해와 일직선을 이루며 뻗어 내리는 관계로 서쪽은 높고 동쪽은 경사진 형태의 산지(山地)가 많은 지세이다. 읍의 주위로는 화림산(花林山), 입내산(入來山 : 들온산), 삿갓봉(笠峰), 고불봉 등이 펼쳐져 있다. 이들의 산세가 동쪽 해안까지 뻗어 있어 경작지가 적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나 바다의 수심은 매우 깊다.   읍내를 지나는 주요 하천으로는 달산, 지품을 지나오는 오십천이 읍을 서에서 남으로 흘러 강구항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고 있다. 덕곡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덕곡천이 삼각주 공원 앞에서 오십천 본류와 합류, 강구항으로 흐르고 있다. 읍내의 주요한 농경지로는 오십천의 연안을 따라 분포해 있다. 이들 농토는 오십천의 유속에 의해 운반돼 쌓인 충적토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구미평(九美坪)과 천전평(川前坪)이 있다. 이들 지역에는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했다. 토질이 뛰어나 양질의 쌀이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읍의 지계(地界)는 서쪽으로 지품면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축산면,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남쪽은 강구면과 접하고 있다. 읍을 관류하는 오십천에는 메기, 황어, 은어 등의 민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오십천에서 태어나 멀리 태평양까지 갔다. 다시 회귀하는 연어는 오십천의 명물로 유명하다. 오십천 중류와 하류 지역에는 뱀장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오십천 유역와 34번 국도를 따라 복숭아 재배가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다. 복숭아의 주산지로 주목을 받고 있다.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4월이면 일대 장관을 이룬다. 많은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이름나 있다.대부, 창포, 대탄, 노물, 오보, 석동 등 해안에 있는 마을은 예로부터 어업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어촌의 소규모 어항개발을 위한 집중 투자로 어업 활동 여건이 좋아져 어업(漁業) 활동이 활발하다. 수산물의 어획량이 점차 늘어나 어민 소득 증대에 크게 한몫 하고 있다. 이외에도 김, 미역 등의 자연산 해조류와 멍게, 미역 등의 양식어업도 활발하다. 살기 좋은 어촌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읍의 교통은 부산에서 온성까지 연결되는 7번 국도가 읍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지나간다. 서북의 내륙도시인 안동을 연결해 주는 34번 국도가 영덕에서부터 시작, 교통의 요충지이다. 영덕과 청송을 연결해 주는 932번, 914번의 지방도가 읍내를 지나간다. 인근 타 시군과의 교통은 아주 편리하다. 읍내의 교통은 영덕읍과 하저리를 연결해주는 군도 10호와 영덕과 오보를 연결해주는 농어촌 도로가 있다. 해안을 따라서는 지방도인 918번이 강구와 축산, 그리고 영해를 이어주는 해안 도로로써 큰 역할을 하고 있어, 읍의 내륙과 해안을 편리하게 연결해 주고 있다.     ● ● 화개리 출신 신운석 의병장   신운석 장군은 개항기 영덕 출신의 의병이다. 신운석(1839~1896)은 경북도 영덕 영덕읍 화개리 출신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응천(應天), 호는 청헌(淸軒)이다.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申崇謙)의 후예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유리한 기세를 잡은 일본군이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11월에는 개화라는 명분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단행하게 하는 등 노골적인 침략 책동을 드러냈다.   전국 유생들은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국권을 수호하고자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6년 안동(安東)을 비롯, 청송(靑松)· 영양(英陽)은 물론 영덕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1896년 3월 지품면(知品面) 출신 김건(金健)이 창의장이 돼 영덕의진을 일으켰으나 곧 물러났다.신운석이 뒤를 이어 의진을 이끌었다. 영덕의진은 3월 11일 영덕군 남정면 부경동(阜境洞)에 진을 치고 매복했다가 3월 13일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물러나 영덕읍 남천쑤 남천 숲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신운석은 일본군의 파상공세에 불굴의 기상으로 격퇴하면서 전세가 일시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신운석은 5월 24일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남하한 김하락의진(金河洛義陣)에 합세했다. 6월 4일 영덕 오십천의 남천쑤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남천쑤 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신운석은 지품면 신양동(新陽洞)으로 진을 옮겼다가, 6월 20일 일본군과 격전을 치르고 지품면 율곡리(栗谷里)로 피신했다. 그런데 삼종질 신태홍(申泰洪)이 신운석으로 오인돼 관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있었다. 신운석은 자신 때문에 고생한 집안 조카를 생각, 스스로 관군에 출두 자신이 의병장임을 밝히고 신태홍을 석방시켰다. 청심분파소에서 문초를 받자 혀를 깨물고 불응하다가 1896년 8월 초3일 총살당해 순국했다.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1979년 3월 1일 경북도 영덕읍 화개리 208-1 의병장청헌신운석공순국기념비가 건립됐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한편 영덕의진 신운석(申運錫) 등과 함께 연합의진을 결성한 김하락장군도 6월 3~4일 오십천 남천쑤에서 격전을 벌였다. 6월 4일 악천후 속에 관군의 집중 공격을 받고, 의병들은 흩어졌다. 이때 큰 부상을 당한 김하락은 “나는 어복(魚腹)에 장사 지낼지언정 어찌 살아서 견양(犬羊) 같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겠는가!”라 말하고, 폭우로 불어난 오십천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 ● 영덕읍 마을의 유래     ▲구미리(九美里)구미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의 위치가 굽이굽이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안쪽에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661~681)에 한 선비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 당시 마을 앞의 삼밭(麻田)을 이용, 화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구마동(仇麻洞)으로 불렀다고 한다.조선 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읍내면(邑內面)에 소속돼 구미마(仇尾麻), 구마(仇麻) 등으로 불렀다.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에 따라 종전의 현(縣)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구미리는 영덕군에 속했다.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부령(府令) 제111호(1913년 12월 29일 公布)로 부· 군· 면(府郡面)을 스스로 폐합할 때 구미동이라 해 영덕면(盈德面)에 편입돼 오다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9409호(1979.04.07 公布)에 의해 영덕면이 읍(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구미리는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1988.04.30 公布)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구미동은 구미리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리의 위치는 동쪽은 화수리와 이웃한다. 남쪽은 오십천과 무릉산이 있고, 서쪽은 지품면과 경계하고 북쪽은 화림산(華林山)이 있다. 새마을 (新村)은 구미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재궁마· 재삿마· 수정동(水晶洞) : 15세기 말(成宗 22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영덕 입향조(入鄕祖)인 신희(申禧)의 재실(齋室)인 수정재(水晶齋)가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막거리(거릿마을)는 구미리 남쪽 길가에 옛날 주막(酒幕)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고, 개닥골은 굴깨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다. 행교골은 중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남강서원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화개리(華開里)화개리 동명의 유래는 화림산(華林山)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동상동, 삼근동, 서상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해 화개동이라 해 영덕면에 소속됐다.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개리가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리로 분동돼 있다. 화개리는 읍 소재지에 위치하는 마을로 동은 덕곡리, 서는 천전리와 지품면 오천리, 남은 남석리와 덕곡리, 북은 화수리와 구미리가 있다. 동문 밖(東門外) : 화개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영덕 읍성의 동문 밖이 되는 마을로 10세기 후기인 고려(高麗)시대에 주씨(朱氏)와 윤씨(尹氏)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동상동(東上洞)은 동문 밖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삼근동(三近洞)은 동문 밖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읍(장터)이 가깝고(邑), 산이 가깝고(華林山), 물이 가깝다(五十川)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약 16세기경 안씨(安氏)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알려졌다. 그 뒤 온양방씨(溫陽方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입주했다. 서상동(西上洞)은 동문 밖 서쪽에 있는 마을, 너더미골(미더미골)은 무덤 골이 변해서 미더미골로 불렸다. 당시 불교식 장례의식(화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뼛가루를 담은 골호가 많이 매장된 곳이다.   ▲남석리(南石里)남석리 동명의 유래는 남부동(南部洞)의 「남(南)」자와 비석동(碑石洞)의 석(石)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대한제국 때에는 읍내면 지역으로 상장동(上場洞), 하장동(下場洞), 남부동(南部洞), 상남동(上南洞) 등으로 불렸다.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부· 군· 면(府郡面)을 통폐합할 때 상장동, 하장동, 남부동, 상남동, 하남동, 중남동과 비석동의 일부를 병합, 남석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시켰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남석리가 됐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남석1· 2· 3리로 분동돼 있다. 남부동(남문거리, 남부):남석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옛 영덕읍성(盈德邑城)의 남문(南門)이 있었는데 상남문, 중남문, 하남문의 세 마을로 나눠 있었다.비석동:조선 시대 영덕 현령(縣令)의 치적불망비(治蹟不忘碑)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  상남문(上南門, 두들목)=남문 거리 위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에서 지대가 높은 곳이므로 일명 두들목이라 했음. 장터(場基)=중남문에 달렸던 마을로 현재 학원(學院)이 있는 전방 삼거리에는 4일장이 섰다. 양조장 앞에는 9일장이 섰다. 이 시장은 어물전이 이동하는 데 따라 곡류(穀類)와 잡화 등이 반대쪽에 서게 됐다고 한다. 남문 거리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남문(下南門), 장터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장(下場 : 하장기)이라 했다.       ▲덕곡리(德谷里)덕곡리 동명의 유래는 덕천리(德川里)의 덕(德)자와 우곡리(右谷里)의 곡(谷)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내곡리(內谷里)의 곡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연간인 7세기 후반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개척, 덕천(德川)이라 했다. 덕이 많은 곳과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른다 해 이렇게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내곡· 외곡· 덕천· 우곡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 덕곡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됐다.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덕곡리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곡리의 위치는 동은 덕곡천(德谷川)이 있다. 서남은 남석리, 동남은 우곡리, 북은 화수리와 접해 있는 영덕읍 소재지의 중심마을이다.      골안(谷內)=덕내(德川)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덕내(德川)=도매두들과 골안 사이에 있는 마을로 덕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도매두들=덕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해일(海溢) 때 도마만큼 남았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천전리(川前里)천전리 동명의 유래는 내(川)가 앞(前)에 있어 `내앞`또는 천전이라 했다. 이 마을은 17세기 중기인 현종(顯宗) 연간에 야성김씨(野城金氏) 김취린(金就隣)의 후손들이 마을을 개척, 정착했다고 한다.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스스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천전동이라 해 영덕면의 관할로 했다.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천전리가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0.7km 떨어진 마을로 동은 오십천, 남석리, 서는 칠령산, 강구면 상직리, 남은 남산리, 북은 화개리가 있다. 아룻내(아릿내피, 下川前)=내 앞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웃내(웃내피, 上川前)=무릉산이다.수운산=덕 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해일(海溢) 때 도마만큼 남았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적은 덤배기=아룻내 서쪽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남산리(南山里)남산리 동명의 유래는 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산 1리는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안씨(安氏)라는 분이 개척했으며 그 뒤 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남산 2리는 밀양손씨가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일제(日帝)가 부· 군· 면(府郡面)을 통폐합할 때 우곡동(右谷洞)의 일부와 중남면(中南面) 둔리(屯里) 일부, 지곡동(枝谷洞)을 병합했다. 남산(南山) 아래에 위치한다 해 남산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시켰다.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소속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구역으로 1· 2리로 분동돼 있다.   남산리의 위치는 오십천 건너 강구면 금호리와 마주 보고 있다. 뒤로는 칠령산(七嶺山)이 둘러싸고 있다. 남은 강구면과 경계인 입내산(入來山)이 있으며 북은 영덕대교가 있다. 가짓골(枝谷, 가죽골)=마을 형태가 나뭇가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일(둔호) 서북쪽 골짜기에 있다. 조선 시대에 갖바치들이 살았다고 하여 가죽 골이라고도 한다.대밭골(竹山里, 절마)=둔호 남쪽 두런산(입래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둔호(屯湖, 두일 屯里)=남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마을 앞에 호수가 있다.숲지=남산 1리로 마을 앞에 숲이 무성하다고 붙은 이름으로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숲이 유실됐다. ▲우곡리(右谷里)우곡리 동명의 유래는 읍 남쪽 오른쪽 골짜기라 하여 우루실 또는 우곡이라 했다. 이 마을은 어느 때인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 읍내면 지역으로서 마을 남쪽에 강이 흐르므로 남강(南江)이라 불러오다가 남강서원(南江書院)이 창건되자 서원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비석동 일부를 병합, 우곡동이라 했다.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우곡리가 돼 오늘에 이른다. 우곡리의 위치는 동은 고불봉과 강구면 하저리, 서는 오십천과 남석리, 남은 강구면 금호리, 북은 덕곡리와 연해 있으며 현 영덕읍 사무소에서 600m 동쪽에 있다. 남강서원 터=우곡리 169번지 일대에 있었던 남강서원의 터다.댓대대=동리 동쪽 뒤에 있는 대나무밭으로 고종 때 남강서원이 훼철될 때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양 선생의 위패를 묻었다고 한다.금산 삐알=남강서원이 있던 동쪽 뒷산 비탈로 금을 캤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호호대(浩浩臺)=경관이 아름답고 이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일어난다고 한다.망월봉(望月峯)=모양이 望月(보름달)과 같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화수리(華水里)화수리는 조선 시대 영덕현의 동면 주등과 미동이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통폐합 때에 영덕면이 생기면서 동면에서 이속해 오면서 생긴 이름이다. 화수 1리인 주등은 15세기경 파평윤씨가 개척했다고 한다. 화수 2리인 미동은 약 400여 년 전에 강릉유씨가 마을을 개척했다.   마을 주변의 산과 내의 전경이 아름다워 미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등이란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주등역이 있어 주점과 숙박시설이 많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밋대골=주등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삼거리=주등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자부티 골=삼거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홍둣골(紅圖院)=조선시대 역원이 있던 곳으로 경치가 좋다. 약수가 유명해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반달산=마을 앞산으로 인해서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미인이 많다고 한다.   ▲삼계리(三溪里)삼계리 동명의 유래는 흰댕잇골, 땟골, 웃골 등 세 골짜기의 물이 합하는 곳이므로 시거랑, 시걸이 변해 시거리 또는 삼계라 했다. 이 마을은 류유(柳)가 문종(文宗), 단종(端宗) 때에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재임하다가 단종 폐위 소식을 듣고 사직하여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했다. 삼구당(三龜堂) 신공망(申公望)이 들어와 평산신씨 입향조가 됐다. 야성김씨 김수문(金秀文)도 이곳에 정착했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계동이라 해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됐다.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종전의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삼계리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계리의 위치는 동은 대탄리, 창포리, 서는 화수리, 남은 덕곡리와 강구면 하저리, 북은 오보리, 매정리가 있다. 아릿모치=삼계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댓대대=삼계 위에 있는 마을이다.   ▲매정리(梅亭里)매정리 이명(里名)의 유래는 매정(梅亭)의 매(梅) 자와 양정(良亭)의 정(亭)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기곡동, 성황동, 신리동, 매령동, 양정동을 병합, 매정동이라 했다.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덕면에 편입됐다. 1979년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매정리는 영덕읍에 소속됐다.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매정동은 매정리가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行政洞)으로는 1·2·3리로 분동돼 있다. 매정리의 위치는 동은 노물리, 오보리, 서는 화수리, 남은 삼계리, 북은 석리가 있다. 맷재(梅嶺)=매정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祖) 연간에 순흥안씨가 개척했다 한다.새텃골(新里洞)=텃골 북쪽에 새로 된 마을이다.샛골(簡谷)=석리와 맷재 사이에 있는 마을로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祖) 연간에 야성김씨(野城金氏)가 개척했다고 한다.성황동(城隍洞)=양정 남쪽에 서낭당이 있는 마을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조선 시대 만호(萬戶) 벼슬을 가진 분이 개척했다고 한다.양정(良亭·羊暘)=매정리에 있는 마을로 계곡이 정자형(亭字形) 같다 하여 붙은 이름. 15세기 중기인 세조 연간에 대흥백씨(大興白氏)가 개척했다.텃골(基谷)=맷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경주김씨(慶州金氏)가 개척했다.   ▲석리(石里) 석리 동명의 유래는 돌이 많은 곳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7세기경인 인조(仁祖) 연간 병자호란 때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이곳에 피난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그 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정착했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으나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예진동 돌면동을 병합, 석리라 하고 오보면에 편입됐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영덕읍에서 동북쪽으로 12km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로 동은 동해, 서는 등달골산과 매정리가 있으며 남은 노물리, 북은 축산면 경정리가 있다.   돌면(乭面)=석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이다.예진(芮津)=석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아 돌미역이 많이 생산된다.   ▲노물리(老勿里)노물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노물(老勿)이란 늙지 말라는 뜻으로써 늙지 않는 즉 장수(長壽)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 같다. 노물이란 이름은 1789년의 호구 총수에도 나온다. 물(勿)자는 고구려 계통의 언어로 아마 4~5세기경 고구려가 남하해 청하와 흥해를 경계로 할 때, 영덕의 지명인 야시홀이란 이름이 붙을 당시에 같이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13세기경 안씨(安氏), 정씨(鄭氏), 박씨(朴氏) 등이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으로 노물이라 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부·군·면(府郡面)을 폐합할 때 노내리(老內里)를 병합,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돼 오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될 때 영덕읍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매정리, 남은 오보리, 북은 석리가 있다. 노내리(老內里 : 골마)=노물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섬(성)뚝마=섬(성)뚝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섬뚝새=섬뚝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탄리(大灘里)대탄리 동명의 유래는 동해 바닷가 큰 여울 옆이 되므로 해여울, 해월, 또는 대탄이라 했다. 이 마을은 16세기경 정영용(鄭英用)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향월(香月)이라 했다. 19세기 중기에 강씨(姜氏)라는 분이 들어와 마을에 큰 여울이 있어 대탄이라 했다.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대탄동,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탄리가 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삼계리, 남은 창포리, 북은 오보리가 있다. 약물내기=동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약물이 난다.노고지리 콧잔등 바우=동리 남서쪽에 있는 노고지리 봉에 있는 등성이로 노고지리의 콧등처럼 뾰족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보리(烏保里) 오보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烏)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올치미’라고 불렀다. 이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오보(烏保)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15세기경 유씨(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본래 오보부곡(烏保部曲)이 있던 곳으로써 조선 시대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으로 오보라 했다.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보동이라 해서 오보면에 편입됐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됐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들을 사이에 두고 매정리와 연해 있고 남은 대탄리, 북은 노물리가 있다.   아릿맛골=오보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웃 맛골=오보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창포리(菖浦里)창포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은 붓꽃이 많이 피는 갯가가 되므로 `붓개` 또는 창포라 했다. 이 마을은 통일신라 시기인 7세기경에 임씨(林氏)가 개척했다. 그 뒤 조선 후기 인조(仁祖) 연간인 17세기경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후예가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창포동이라 했다. 오보면(烏保面)에 속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됐다.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창포리로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 해안 쪽으로 8km 지점에 있다.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별반산(別畔山), 남은 대부리(大夫里), 북은 대탄리가 있다.   웃마(웃모치, 상창포)=창포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중간마(중간모치)=웃마와 아릿마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아릿마(아릿모치, 하창포)=창포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봉의뜨미(별반산)=웃마 북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 시대에 별반산 봉수대가 있어 남으로는 황석산, 북으로는 대소산 봉수대와 연결했다.   ▲대부리(大夫里)대부리 동명의 유래는 16세기경 안씨(安氏)가 터를 잡았다. 그 뒤 송씨(宋氏)가 들어와서 제당(祭堂)을 짓고 동명을 태고진(太古津)이라 했다. 김씨(金氏)가 들어와 태부(太夫)로 개명했다가 다시 대부(大夫)로 개칭했다. 조선 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지역으로 태부(太夫)라 했다. 1914년 4월 1일 일제(日帝)는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스스로 통폐합할 때 태부 등으로 오보면(烏保面)에 소속시켰다. 193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대부동(大夫洞)으로 영덕면에 편입시켰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에 의해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소속됐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부리가 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부리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 해안 쪽으로 7km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로 동은 동해에 임해 있고, 서는 삼계리와 남은 강구면 하저리, 북은 창포리가 있다.   샛것마을=대부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아릿것마을=대부리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웃것마을=대부리 위에 있는 마을이다.   ▲화천리(華川里)화천리 동명의 유래는 화개동의 화(華)자와 금천동(琴川洞)의 천(川)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다. 대한제국 때에는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덕군 축산면(丑山面)에 속했다.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천리라 했다. 1993년도에 영덕읍에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2 ·3리로 분동돼 있다. 화천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면 기암리, 서는 지품면 삼화리, 남은 화수리, 북은 축산면 대곡리가 있다. 거릿마=길골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곰창(態倉)=화천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웃곰창과 아랫곰창이 있다. 곰창이란 명칭은 옛날 화림산과 국사봉에 곰이 많았는데 사냥꾼들이 곰을 잡아 가둔 흔적이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6세기 중기인 명종(明宗) 연간에 충의공(忠義公) 김문기(金文起) 선생의 4세손인 김영철(金永哲)이 몸을 숨기기 위해 이곳을 찾아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길골(道谷洞)=금천 서쪽에 있는 마을로 16세기 중기인 중종(中宗) 연간에 함양박씨의 진사(進士) 박성규(朴聖奎)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 그 뒤 김해김씨와 영양남씨가 들어왔다. 너말(너매말)=금천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무징(武徵)=화천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싯집마=거릿마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아랫곰창(琴川)=곰창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금천이라고도 했다. 마을 주위 경치가 아름답고 또 수석(水石)이 좋아 붙여진 이름으로 16세기 중기인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에 강릉함씨(江陵咸氏) 만호(萬戶) 함득선(咸得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양지마=음지마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웃곰창(華溪洞 : 감촌)=곰창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음지마=화천리 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다.       ● ● 영덕읍 면경대 전설(面鏡臺傳說)영덕군 영덕읍에서 면경대와 소년 장수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면경대 전설은 뛰어난 장수가 부모의 경솔한 언행으로 인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아기 장수 전설의 변이형이다.그 사연이 면경대(面鏡臺)라는 바위와 함께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물 전설이기도 하다. 면경대 전설은 2002년 영덕군에서 발간한 영덕군지에 수록돼 있으나, 채록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영덕읍 화개리에서 서북쪽으로 2㎞ 정도 가면 무둔산(蕪芚山=일명 무릉산(武陵山)이 있다. 무둔산 서쪽 기슭에 거울처럼 맑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면경대(面鏡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면경대에 얽힌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야시홀(也尸忽) 한 마을에 노부부가 살고 있었다. 부부는 젊어서부터 아기를 갖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할머니는 밤마다 쉰넷 골[五十川] 건너 무둔산 바위에 가서 아기를 얻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너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 너에게 아들을 점지할 터이니 너는 말을 삼가도록 하여라.”라는 신령의 소리가 허공에서 들리고, 곧 뇌성벽력이 얼마 동안 천지를 뒤흔들었다. 놀란 할머니가 잠시 혼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늘 기도를 하던 바위가 면경(面鏡)같이 변해 있었고, 그 위에 투구와 갑옷, 칼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홍안의 소년이 용마를 타고 할머니 앞에 와서 “어머니.”하면서 공손히 절을 했다. 그로부터 할머니는 이 소년과 함께 그곳에서 살게 됐다. 아들은 바위로 공기놀이를 하는 등 힘이 엄청나게 셌고, 날마다 무술을 익혀 훌륭한 장수가 됐다.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조 한 말과 콩 한 되를 구해 달라고 해서 면경 같은 바위 위에 조와 콩을 놓고 경문(經文)을 외었다. 그러자 갑자기 콩은 대장으로 조는 군졸로 변했다. 아들은 “어머니, 나라에 충성할 때가 왔으니 콩 한 말과 조 한 섬을 더 구해 주십시오.” 하고 용마를 타고 북쪽으로 떠났다. 아들이 떠난 후 아들의 부탁대로 조와 콩을 구해 오던 할머니는 쉰넷 골 물을 건널 수 없어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한 청년이 나타나서 할머니를 업어 냇물을 건너게 해 주고 조와 콩도 집까지 옮겨 주었다. 청년이 할머니에게 아들에 대해서 묻자 할머니는 자기 아들의 능력을 자랑삼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청년은 주위를 두루 살피더니 무둔산을 타고 서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 후 아들이 돌아왔고, 아들이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남쪽 나라와 북쪽 나라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아들은 조와 콩을 앞에 놓고 경문을 외었는데, 이번에는 조와 콩이 군사로 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아들이 조와 콩이 담긴 자루를 풀어 보았더니 조와 콩이 물에 젖어 모조리 썩어 있었다. 이때 얼마 전 할머니를 도와준 그 청년이 군사를 앞세우고 쳐들어 왔다. 군사가 없어 크게 패한 아들은 할머니에게 연유를 물었다. 할머니는 아들의 패배가 자기 때문임을 알고, 낯선 청년에게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경솔하게 한 것을 크게 후회하면서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어진 소년 장수는 용마를 타고 북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 바위가 면경같이 맑아 면경대라 하고, 어떤 이들은 마귀(마고)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바위 옆에 용마의 자취와 바구니 자국이 있고, 장수가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라 하여 작은 바위가 놓여 있다. 면경대 전설의 주요 주제는 ‘아기 장수 전설’과 ‘어머니의 실수’이다. ‘아기 장수 전설’은 전국적으로 광포(廣布) 한 전설로 다양한 변이형이 존재한다. 비범한 아이가 자신들에게 해를 미칠까 두려워한 부모가 아이를 살해하는 유형이 일반적이다. 면경대 전설은 큰일을 도모하던 장수가 어머니의 말실수 때문에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는 내용이다. 아기 장수 전설의 변이형이 이 지역의 면경대와 관련하여 전승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말을 삼가도록 해라.”는 신령의 금기를 어기고, 아들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해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 ● 영덕읍 풍물 거리 및 가볼 만한 곳   ▲영덕시장 영덕 대표 전통시장이다. 5일 장은 4일, 9일 열린다. 하지만 2021년 9월 4일 새벽 3시 화마가 덮쳤다. 점포 79개 동이 타거나 그을리는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 규모는 42억 원이다. 애초 영덕시장은 영덕읍 남석길 23-48에 있었는데 화재로 영덕군 영덕읍 남석리 34~80곳에 임시시장이 마련됐다. 8월 준공을 목표로 영덕시장 재건축을 진행 중이다. 30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군은 겨울철에도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진행하며 ‘명품 영덕시장’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임시시장이 운영 중이나 냉·난방시설 부족으로 이용객과 상인들의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 군은 공사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군은 올해 1월 1·2층 슬래브 거푸집을 설치했다. 4월까지 골조 공사를 마무리한다. 7월까지 단열, 도장, 미장, 벽돌 쌓기 등 내부 마감 작업을 완료하고 8월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재건축되는 영덕시장은 전체면적 5770㎡ 규모로 조성된다. 1층에는 51개의 점포가 입점한다. 2층에는 다목적실, 동아리방, 교육실 등 주민편의시설이 들어선다. 주차 문제 해결을 위해 216대를 수용할 수 있는 전용 주차장도 마련된다. 별도의 공모사업을 통해 확보한 예산으로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한 어린이 놀이 공간과 편의시설도 구축한다. 김광열 영덕군수는 “계획대로 공사가 진행돼 을사년 새해에는 명품 영덕시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건축 사업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와 주민 편의 증진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된다.     ▲영덕시장 먹을거리 산해진미영덕 전통시장은 단순한 상점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미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맛집과 지역의 향토 특산품을 한눈에 만날 수 있는 보물창고이다. 전통적인 음식부터 현대적인 해석이 가미된 요리들까지, 그리고 특별한 지역 특산품들이 사람들의 입과 눈을 즐겁게 한다. 영덕 전통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장소가 아니다. 지역의 독특한 맛을 경험할 수 있는 환상적인 맛집들이 숨겨져 있다. 영덕의 특산물을 활용한 각각의 요리는 여러분을 새로운 미각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 해안 도시인 만큼, 신선한 해물 요리는 별미다.       영덕 대게 요리 전문점 영덕의 상징적인 음식인 대게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많다. 대게찜, 대게장, 그리고 대게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를 선보인다. 대게의 살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라 쫄깃한 식감을 자랑한다. 대게를 즐기고 나면, 맛있는 육수로 준비된 대게탕도 빼놓을 수 없다. 시원한 국물은 피로를 싹 날려준다.   해물파전과 막걸리시장의 작은 포장마차에서 바싹하게 구워낸 해물파전을 막걸리와 함께 즐길 수 있다. 바닥이 바싹하게 구워진 파전은 해물과 함께 입안에서 풍미가 더해진다. 적당히 쫀득한 식감과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이 더해지면 최상이다. 어시장 내 해산물 판매점전통시장 안에는 신선한 해산물을 구매할 수 있는 곳도 많다. 직접 해산물을 구매한 후, 인근의 식당에 가져가면 즉석에서 요리해 준다. 갓 잡은 오징어와 바지락은 물론, 다양한 해산물이 준비돼 있다.영덕 전통시장에서의 미식 여행은 이렇게 각기 다른 맛집과 차림표로 가득 차 있어 미식가들의 입맛을 돋운다. 무엇보다 시장의 진짜 매력은 다양한 식사 옵션들을 한 곳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데 있다.맛을 느끼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영덕 특산물인 청정미역 영덕은 청정미역으로도 유명하다. 신선한 미역을 사용한 미역국은 그 맛이 깊고 진하다. 전통시장 내 여러 식당에서 팔고 있다. 담백한 미역국을 렌즈로 바라보며, 고향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칼국수와 생선구이영덕은 바다와 가까운 지역 특성과 함께 신선한 재료로 만든 수산물 요리는 너무나 유명하다. 칼국수는 많은 사람에게 인기다. 영덕 앞바다에서 잡힌 신선한 해산물이 곁들여져 깊은 맛을 자랑한다. 지역 양념으로 맛을 더한 해물탕도 단골 음식이다. 해물탕은 영덕의 또 다른 먹을거리다. 각종 해산물과 함께 양념이 조화를 이루어 깊고 진한 국물 맛이 특징이다. 해물탕의 국물이 정말 시원하고 감칠맛이나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장 개요1965년 처음 문을 열었다. 60명의 세월이 흘렀다. 189개의 점포에서 상인들은 손님을 맞이한다. 청정해역의 넓은 바다와 무수히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영덕에서 지역민들의 희로애락을 묵묵히 함께 지내온 시장이다.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고 문화와 관광이 어우러진 대표 전통시장이다.전국적으로 유명한 고래불 해수욕장, 대진해수욕장이 근처에 있다. 휴가지에서 시장까지 ‘논스톱 장보기 셔틀버스’ 운행으로 낮에는 물놀이 밤에는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날리는 영덕만의 관광코스이다. 영덕의 특산품인 대게를 비롯한 오징어, 물가자미 회, 송이버섯 등 매일 다양한 상품으로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덕해맞이공원 산불로 버려진 땅, 희망과 보람의 땅이다. 영덕군 영덕읍 대탄리에 있는 영덕해맞이공원은 64㎞ 청정해역이 펼쳐지는 강축도로변에 있다. 총넓이 34만 ㎡ 중 5만 ㎡가 먼저 개발됐다. 강구면과 축산면의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해변공원이다. 1998년 4월부터 개발을 시작, 2002년 완공됐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맞아 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해맞이 장소를 제공하고자 개발됐다.   주차장과 볕 가리개 벤치 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부채 꽃과 패랭이꽃 등 야생화 2만 3000여 포기와 향토수종 900여 그루가 심겨 있다. 해돋이를 관람할 수 있는 곳까지 설치된 1500여 개의 나무계단이 유명하다. 나무계단 중간에도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두 곳 시설돼 있다. 바다 쪽에는 등대도 서 있어 함께 관람할 수 있다. 강구에서 918번 지방도로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교통이 편리하며 전면의 푸른 바다와 뒷면 넓은 초지, 해송 조림지로 열린 공간이 형성돼 있다. 산불피해 목으로 침목 계단을 만들어 산책로를 만들었다.   사진 촬영과 시원한 조망을 위한 전망공간과 휴식공간을 위해 파고라(뜰이나 편평한 지붕 위에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얹어 놓고 등나무 따위의 덩굴성 식물을 올리어 만든 서양식 정자나 길. 장식과 차양의 역할을 한다. 규범 표기는 ‘퍼걸러’이다.)를 만들었다. 어류조각품 18종을 실시간 방송되는 음악과 어우러지도록 했다. 야생화와 향토수종으로 자연 학습장 공간을 조성했다. 수선화·해국·벌개미취 등 야생화 15종 30만 그루와 해당화·동백·모감주나무 등 향토수종 8종 7만 그루를 심었다.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 창포 말 조형등대가 1곳이 있다.산책로를 따라 걷는 도중 전망대가 두 군데 설치돼 동해바다를 한눈에 관망하면서 사진을 촬영하기에도 좋다.가장 선명하고 멋진 일출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새해에는 물론 평일에도 일출의 장관을 보려는 사람들과 여유로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 △창포말등대 △영덕 조각공원 △산림생태문화공원 △대탄 해변 △오보 해변 △석리 어촌체험 마을 대탄마을 △경북교육청 영덕 자동차 야영장 △영덕 목재문화체험장 △영덕 신재생에너지전시관 △정크&트릭아트전시관 △국립청소년 해양센터 해양체험관 △동궁사 △영덕군 해맞이야영장 △덕흥사가 있다. 김성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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