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넘은 항구가 있고소가 누워있는 곳이 바로 축산면     1924년 3월 조성된 항구 동해안 최고 미항영덕의 대표적인 2대 항구로 손꼽혀축산항 태백산서 뻗어 나온 산봉우리 산세가 해안까지밀려 내려와 만처럼 쌓인 아름다운 해안선 이룬다     경북 동해안에 자리한 영덕군 축산면은 아름다운 해안 풍경과 풍부한 수산물로 유명한 어촌 지역이다. 면적은 약 59.31㎢, 인구는 2025년 8월 기준 2,308명으로, 작은 마을임에도 풍부한 자연과 전통이 공존한다.   축산(丑山)이라는 이름은 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처럼 보여 붙여졌다.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세가 해안까지 이어져 경관이 뛰어나며, 축산항은 영덕대게의 주요 위판장과 관광 명소로 사랑받는다. 축산항을 포함한 해안길은 도보 여행 코스로도 유명하며, 강구항에서 고래불 해수욕장까지 연결되는 블루로드 B · C코스가 축산면의 해안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축산면은 10개의 법정리(기암리, 대곡리, 조항리, 칠성리, 부곡리, 상원리, 도곡리, 고곡리, 경정리, 축산리)로 구성돼 있다. 과거에는 여러 초등학교 분교가 운영되었으나 현재 대부분 폐교됐으며, 축산중학교는 도곡리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경정리 뱃불마을 등에서는 전통 어촌문화를 여전히 만나볼 수 있다. 수산물 입찰권역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축산면의 자연 자원 중 하나인 칠성지(七星池)는 한국농어촌공사 경북지역본부 영덕울진지사에서 관리하는 저수지로, 수혜 면적은 160㏊에 달한다. 칠성지는 안정적인 농업용수 공급과 칠성리 일대의 가뭄·자연재해 예방을 위해 건립됐다. 1997년 착공해 2013년 준공됐으며, 2021 ~2024년 수리시설 개 · 보수 작업을 마쳤다. 안전 점검 결과 B등급을 받아 안정성을 확인했다.   칠성지는 제체 길이 264m, 높이 41m, 총 저수량 143만 9,000㎥로, 1종 국가관리 방조제 시설에 해당한다. 수혜 면적 160㏊, 만수 면적 10.96㏊, 홍수 면적 11.44㏊, 유역 면적 418㏊에 이르며, 저수율은 2021년 6월 기준 75.7%를 기록했다.   축산면은 자연, 어업, 전통문화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지역으로, 해안 트레킹과 신선한 해산물을 즐기려는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축산면은 어떤 곳    경북 동해안의 중심부에 위치한 영덕군 축산면은 오랜 역사와 풍부한 자연, 전통문화를 품은 법정면이다. 행정복지센터는 도곡리에 자리하며, 축산리, 경정리, 고곡리, 도곡리, 상원리, 부곡리, 칠성리, 조항리, 대곡리, 기암리로 총 10개의 법정리, 18개의 행정리, 33개의 자연부락, 93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축산면은 1914년 신설 당시 축산동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본래 영해부 소속으로 영해부사의 관할을 받았다. 1789년 호구 총수 기록에는 △축산육리 △축산진리 △양장리 △차유진경정육리 △경정진리 △고곡리 △상반포원포리 △하반포리 △부곡리 △칠성리 △복기암웅창리 △대동리 △백일동묘곡리 △원고리 △오금리 등 15개 리가 포함됐다.   1896년까지는 영해부 남면, 이후 영해군 남면으로 편입되었으며, 1899년 영해군읍지에 따르면 남면은 축산(丑山), 양(良, 羊), 장(庄, 場, 腸), 경정(景汀), 지경(地境), 차유(車踰), 고곡(古谷), 반포(反浦), 수일정(守一亭), 부곡(釜谷), 아삼(牙三), 복기암(伏基巖), 웅창(熊倉), 대곡(大谷), 화전(花田) 14개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정신방, 와고동, 원포동, 동로동, 도동과 묘곡면의 대곡동, 니전동, 망전, 조항산 등이 합쳐졌다.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폐지로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도곡동(반포, 정신방), 기암동(기암, 아삼), 부곡동(부곡, 원포), 고곡동, 대곡동(대곡, 동로), 상원동(와고, 수일정, 원포), 경정동(경정, 차유, 지경), 조항동, 축산동(축산, 양장), 화천동(웅창, 도동), 칠성동(칠성, 니전, 화전, 망전) 11개 동으로 재편성되며 축산면이라는 이름이 확정됐다.   1963년 8월 23일 군조례 제43호에 따라 축산출장소가 축산항에 설치되었고,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면 소속 동은 리로 개칭됐다. 1993년 7월 15일에는 화천리가 영덕읍에 편입됐다.   축산면의 지형은 서쪽이 뾰족한 삼각형 형태의 지형을 이루며, 태백산맥에서 이어진 포대산(444.9m)과 북쪽 용당산(182.1m), 남쪽 국사봉(516.4m) 등으로 둘러싸인 대부분 해발 100~300m 산지로 구성된다. 산지에서 발원한 조항천, 동로천 등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고래산(291.3m) 서쪽에서 북류하는 축산천으로 합류하며, 축산천은 부곡교를 지나 동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동해로 유입된다. 하천 연안에 일부 경지가 분포하지만 평야는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   해안선은 단조롭고 산지가 임박하여 경사가 급한 암빈 해안을 이루며, 항구 발달에는 불리하지만 북동쪽 축산항은 강구항과 함께 영덕군의 대표 어항으로 기능한다. 동쪽은 동해, 서쪽은 지품면, 남쪽은 영덕읍, 북쪽은 영해면과 경계를 이룬다.   문화유적으로는 △영덕대소산봉수대(경북도 기념물) △신돌석장군생가지(경북도 기념물)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국가민속문화재) △영덕도곡동충효당(경북도 민속문화재) △목사공종택(牧使公宗宅=경북도 문화재자료) △남(南)씨의 시조인 김충공(金忠公)이 당(唐)나라에서 귀화, 남씨 성을 받은 것에 대한 영의남공 유허비(英毅南公遺墟碑) △신돌석유허비 △박원대 고가(朴元大古家) △박의장 생가(朴毅長生家) △축산리 성터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은 축산면의 오랜 역사와 선조들의 삶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주요 교통로는 축산면의 동쪽 지역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국도 제7호선과 국가지원지방도 제20호선이 주요 교통로다. 이 도로망은 부산에서 고성까지 이어지며 면민과 관광객의 이동을 원활하게 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고추, 콩 등이 있으며, 경정리에서는 미역 양식과 대게잡이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축산면은 산과 하천, 바다가 어우러진 지형 속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마을이다. 험준한 지형 속에서도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을 이어가며, 문화유산을 보존했다. 축산면은 방문객들에게 자연 풍광, 전통 문화, 바다의 풍미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축산면 마을유래    경북 영덕군 축산면의 중심 마을 중 하나인 축산리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부터 역사를 이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축산리는 8세기 중기인 경덕왕 시대에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처음 개척했지만, 이후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시조의 이야기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경덕왕 14년(755년), 당나라 현종 연간에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안렴사 김충이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축산에 표착하게 된다. 그는 신라에 정착하기를 청했고, 경덕왕은 그에게 남쪽에서 왔다고 하여 남 씨로 사성을 부여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렸다. 식읍은 영양(英陽)으로 정해지며, 이로써 남씨 시조가 탄생했다. 이후 남씨 가문은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 되어 그 후손이 이어졌다.   축산2리 염장 마을은 약 200여 년 전 해일로 염수(鹽水)가 스며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양장(羊腸)은 약 500년 전 영해박씨가 입주하여 양을 사육한 데서 유래했다. 양장(良庄)은 약 300년 전 김복용이 구평들을 개척하며, 좋은 농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축산3리는 죽도산 밑 약 300년 전 오씨가 추씨와 함께 대나무를 심고 마을을 개척해 죽산동이라 불렀다. 일명 신기(新基)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고,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남면 지역으로서 축산포영(丑山浦營)을 두어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배치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장 · 차유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축산동으로 정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오늘날의 축산리가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은 축산 1 · 2 · 3리로 분동 되어 운영되고 있다.   1924년에는 축산항이 개발되어 어항으로 발전했으며, 이 지역은 축산, 축산항, 축산포, 축산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오랜 해양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축산리는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도곡리와 상원리, 남쪽으로 경정리, 북쪽으로 영해면 사진리와 접해 있으며,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해양자원을 갖춘 마을로 자리한다.   골마=웃염장 북쪽에 있는 마을신기동=축산 북쪽에 새로된 마을아릿염장=염장 아래쪽에 있는 마을염장(양장동)=축산 남쪽에 있는 마을웃염장=염장 윗쪽에 있는 마을장방등=장방등 밑에 있는 마을로 6 · 25한국전쟁 때 없어졌다.재궁마=염장 남쪽에 있는 마을주막거리=웃염장 서쪽 길가에 있는 마을중간마=골마와 주막거리 사이에 있는 마을     경정리(景汀里)    영덕군 축산면의 경정리는 긴 모래사장이 펼쳐진 해안 마을로, 예로부터 뱃불 마을로 불렸다. 이름은 경정리의 독특한 해안 지형과 오랜 전통 어업 활동에서 유래했다.   경정1리 뱃불 마을은 15세기 중기(1449년경), 세종 연간에 영해박씨가 월부현(月浮峴)에 올라 지형을 살핀 후 김해김씨와 함께 마을을 개척했다. 해안과 맞닿아 있어 어업과 농업이 조화를 이루며 마을 생활이 시작되었다.   경정2리 수구너미 마을(차유 마을)은 11세기 중기(1060년경), 영해부사(寧海府使)가 순시하던 중 말을 타고 재를 넘다가 마을 형국이 우마차(牛馬車) 길과 닮았음을 보고, 우차의 차(車)와 넘을 유(踰)자를 합쳐 차유(車踰)*라 명명했다. 마을 형성 시기와 개척자는 명확하지 않으나, 지형과 순시 기록으로 이름이 전해진 사례다.   경정3리 오매 마을은 16세기경, 안동권씨가 입주했고 이후 김해김씨가 정착했다. 어느 날 지관(地官)이 마을을 살피며, 남쪽 오두산(烏頭山)*과 앞쪽 *매화산(梅花山)에서 각각 오(烏)와 매(梅)를 따 오매라 칭했다. 다른 설로는 까마귀가 열매를 물고 들어오는 형국이라 해서 오매라 부르기도 하며, 오무(烏舞)라고도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부 남면에 속했으며, 갑오개혁 이후인 1895년 칙령 제98호에 따라 영해부가 영해군(寧海郡)으로 개편되면서 경정리는 영해군 소속이 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부령 제111호로 오매와 차유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경정동으로 편입했고,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오늘날의 경정리가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상 경정 1 · 2 · 3리로 분동되어 운영된다.   경정리는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고곡리, 남쪽으로 영덕읍 석리, 북쪽으로 축산리와 접해 있다. 긴 해안선과 모래사장, 전통 어촌 문화가 어우러진 경정리는 풍부한 자연환경과 역사적 가치가 함께 공존하는 마을로, 방문객에게 해안 풍경과 옛 어촌의 정취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마새쪽=뱃불 남쪽에 있는 마을.수구너미(車踰洞)=달부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오매(烏梅)=뱃불 남쪽에 있는 마을.     고곡리(古谷里)    고곡리는 동명의 정확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지만, 역사적 기록과 마을 개척 전설이 살아있는 지역이다. 고곡1리는 15세기 후기(1480년경), 성종 연간에 장철죽이라는 인물이 지형을 살핀 후, 선비들에게 마을 입주를 권장하고 자신이 먼저 터를 잡아 고실이라 명명하며 마을을 개척했다. 고곡2리는 같은 시기, 윤립이라는 인물이 세조 때 반정으로 유배되어 이곳을 찾아와 마을을 개척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시대에는 영해군 남면 지역으로 포함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반동 일부를 병합하고 고곡동이라 명명하여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현재의 고곡리가 되었다. 오늘날 행정동은 고곡 1 · 2리로 분동되어 운영된다.   고곡리는 동쪽으로 경정리, 서쪽으로 기암리, 남쪽으로 영덕읍, 북쪽으로 상원리와 도곡리와 접해 있으며, 역사적 개척 정신과 전통이 살아있는 해안 근접 마을로, 축산면 내 다른 리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도곡리(陶谷里)    도곡리는 옛날 이 마을에서 독을 구웠다 하여 ‘독골’ 또는 ‘짓골’로 불리다가 현재는 도곡이라 불리게 되었다.   도곡1리는 옛날 해주오씨와 선산김씨가 입주하며 마을을 개척했다. 17세기경, 무의공(武毅公, 朴毅長)의 4자인 도와 박선(陶窩, 朴璿, 166~1707) 공이 원구리에서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했다. 옛날 이 마을은 축산항의 포구가 이어져 배가 오가던 곳으로 반포(攀浦)라 불렸다. 하지만 여러 차례 폭우와 산사태로 포구가 메워지고 내(溪)가 생기자 번계(攀溪)라 부르게 되었다.   도곡2리인 복두미(福坪) 마을은 약 400년 전, 영해박씨가 마을을 개척하며, 복두산(福頭山)의 ‘복(福)’자를 따 복평이라 명명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으로 번계 · 복두미 · 효촌 · 하반동 일부를 병합하여 도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오늘날 도곡리가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은 도곡 1 · 2리로 운영된다.   도곡리는 동쪽으로 축산리, 서쪽으로 상원리, 남쪽으로 고곡리, 북쪽으로 봉화산과 접해 있다. 과거 포구의 흔적과 개척 역사가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마을로 평가된다.   망곡(望谷)=도곡 서쪽에 있는 마을번개=도곡 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복두(福頭, 孝村, 복두미, 복더미)=망곡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이 거북이처럼 생겼다아릿모치=복두미 아래에 있는 마을탄광모치=망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약 60년 전부터 유연탄을 캐냈다하반(下反)=번개 아래쪽에 있는 마을        상원리(上元里)    영덕군 축산면의 상원리는 이름의 유래가 상반리(上反里)의 ‘상(上)’자와 원포리(元浦里)의 ‘원(元)’자를 따서 붙여졌다.   16세기 후기(1580년경), 선조 연간에 안동권씨가 마을을 개척하고, 이후 정씨(鄭氏)가 다시 입주하며 정착했다. 그 뒤 안동김씨, 울진장씨, 진성이씨가 들어와 마을 주변을 다시 개척하면서 마을 이름을 와구(瓦丘)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남면 지역이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으로 상 · 하반동과 원포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상원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오늘날의 상원리가 되었다.   상원리는 동쪽으로 도곡1리, 서쪽으로 부곡리, 남쪽으로 해발 301m의 고래산(鯨山), 북쪽으로 도곡2리와 접해 있다. 역사와 개척 전통이 살아 있는 상원리는 축산면 내 다른 마을들과 어울려 전통 어촌 문화와 자연 환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번개(攀浦)=상원리와 도곡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 축산천이 둘러흐르고 있다수일정(守一亭)=상원리와 부곡리에 걸쳐 있는 마을로 인조(仁祖) 말년(1649) 에 수일정(守一亭) 백사언(白士彦)이 마을을 개척,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일정이라 했다왯두들(와고 瓦邱)=상원리 남쪽에 있는 마을웃번개(上及)=번개 윗쪽에 있는 마을황토모기(黃土項)=수일정 남동쪽에 있는 마을         부곡리(釜谷里)    부곡리는 지형이 가마솥 모양을 닮아 예로부터 ‘가마실’, ‘가매실’로 불리다가 현재는 부곡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6세기 후기(1590년경), 선조 연간에 장씨(張氏)가 마을을 개척하며 주민 정착의 기반을 마련했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기에는 영해군 남면 지역으로 포함되었다. 1914년 3월 1일,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포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고 부곡동이라 하여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오늘날의 부곡리가 되었다.   부곡리는 동쪽으로 상원리, 서쪽으로 칠성리, 남쪽으로 기암리, 북쪽으로 영해면 묘곡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가마솥 같은 지형과 전통 개척 역사가 어우러진 부곡리는 축산면 내 자연과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대표 마을이다.   대밭마(竹村)=가마실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대나무가 많다바깥가마실(방이바깥, 갈모봉, 갈미봉)=가마실 바깥쪽에 있는 마을수일정(守一亭 元浦 , 쉬일정)=부곡·상원리에 걸쳐 있는 마을안가마실(불개미골, 불개집골)=가마실 안쪽에 있는 마을          칠성리(七星里)    영덕군 축산면의 칠성리는 마을 내 칠성사(七星寺)가 있어 ‘칠성’ 또는 ‘성호(星湖)’라 불리며, 일설에는 칠봉산 아래 별이 달린 모습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칠성1리는 15세기 중기(1447년경), 세종 연간에 안 씨가 마을을 개척했고, 17세기 현종 연간에는 영양남씨와 무안박씨가 입주했다. 칠성2리는 17세기 전기(1623년경), 광해군 연간에 전씨가 입주하며 니전(泥田)이라 불렸으나, 이후 한 · 정씨가 들어와 꽃밭(花田), 진밭(陳田)으로 불리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묘곡면 지역으로 포함되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으로 화전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칠성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에 따라 동을 리로 개칭하며 오늘날의 칠성리가 되었다. 현재 행정동은 칠성1 · 2리로 분동돼 있다.   칠성리는 동쪽으로 부곡리, 서쪽으로 조항리, 남쪽으로 기암리 · 대곡리, 북쪽으로 영해면 묘곡리와 면계를 이루고 있다. 별과 사찰, 역사적 개척 흔적이 어우러진 칠성리는 축산면의 문화적 · 자연적 특색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꽃밭-재궁마=꽃밭 북쪽에 재궁(재실, 齋室)이 있는 마을.양지마=진밭 북서쪽에 있는 마을.진대밭=칠성 서쪽에 흙이 진 밭이 있는 마을.그밖에 진밭 남쪽에 있는 진밭, 재궁마와 칠성 동남쪽에 칠성리 내와 대곡리 냇물이 합해지는 합승나들이가 있다.         조항리(鳥項里)    새의 목처럼 생긴 고개가 있어 ‘새목산’ 또는 ‘조항산’이라 불렸던 조항리는, 새가 날개를 펴고 산정(山頂)을 나는 형국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세종 연간인 1431년경, 절강 출신 편석규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조항’이라 명명하였고, 효종 때인 1650년경에는 안동권씨가 입주해 세거(世居)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영해군 묘곡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일부 지역이 대곡동에 편입되고, 나머지가 조항리로 지정되어 영덕군 축산면에 포함되었다. 이후 1988년 5월 1일, 행정명칭 개정으로 ‘동(洞)’이 ‘리(里)’로 바뀌며 오늘의 조항리가 되었다.   마을은 해발 400미터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용수(自然用水)가 풍부해 1960년대에는 70여 호가 거주할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조항리의 위치는 동쪽으로 칠성리, 서쪽으로 지품면 옥류리, 남쪽으로 대곡리, 북쪽으로 영해면 묘곡리와 대리 등과 경계를 이루며,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산촌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다.   배끝말=조항 바깥쪽에 있는 마을안새말=조항 안쪽에 있는 마을샛모치=조항 북쪽에 있는 마을   대곡리(大谷里)    ‘큰 골짜기’라는 뜻의 대곡리(大谷里)는 예로부터 ‘한실’ 또는 ‘대곡’이라 불렸다.이 마을은 명종 연간인 1547년경, 김해김씨가 처음 개척하였으며, 뒤이어 해주오씨와 전주이씨가 차례로 정착해 터전을 이뤘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고, 대한제국 시대에는 영해군 남면에 속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로동과 묘곡면 조항산 일부를 병합해 대곡동이라 칭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88년 5월 1일, 행정명칭 변경에 따라 ‘동(洞)’이 ‘리(里)’로 바뀌면서 현재의 대곡리가 되었다.   마을의 위치는 동쪽으로 기암리, 서쪽으로 국사봉(國祠峯)이 있으며, 남쪽으로 화천리, 북쪽으로 칠성리와 접한다.   완만한 골짜기와 너른 들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고 농사가 잘돼 축산면 남부권의 중심 마을로 자리해왔다.   베게미=독냇골 북동쪽에 있는 마을.     기암리(奇岩里)    마을 입구에 기이한 바위가 있어 이름 붙여진 기암리(奇岩里)는, 바위 아래에 보(洑)를 막아 만든 ‘보터바우’에서 유래했다. 시간이 흐르며 ‘보텅바우’, ‘버텅바우’, 혹은 ‘복기암(伏奇岩)’이라 불리기도 했다.   기암1리는 마을 입구에 거북이와 개구리 모양의 바위가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마치 마을을 굳건히 지키는 듯한 모습의 ‘버텅바우 마을’로 불린다. 이곳은 명종 연간인 1545년경, 김해김씨가 처음 개척했다.   기암2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경, 안 씨 성을 가진 인물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입구가 세 갈래 큰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어 ‘삼남문(三南門)’이라 불렸으며, 이후 평산신씨와 박 씨가 함께 살아 세 성씨가 어우러졌다고 하여 ‘아삼(我三)’이라 했다. 그러나 마을 앞 어금니처럼 생긴 세 개의 바위가 있어, 실제로는 ‘아삼(牙三)’이라 불린 것으로 전해진다. 기암리는 변치 않는 바위가 마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지명과 인명에도 널리 쓰였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대한제국 시기에는 영해군 남면에 속했다. 1914년 3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 아삼동과 묘곡면 칠성동 일부를 합쳐 ‘기암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리(里)’로 개칭되면서 오늘날의 기암리가 되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기암 1 · 2리로 분동되어 있다. 기암리 위치는 동쪽으로 고곡리, 서쪽으로 대곡리, 남쪽으로 화천리, 북쪽으로 부곡리와 상원리가 접한다. 기암리는 이름처럼 바위의 전설과 형상이 살아 숨 쉬는 마을로, 자연과 전통이 함께 어우러진 축산면의 대표적인 산촌 마을이다.   구석모태=복기암(伏奇岩) 북쪽 구석에 있는 마을아릿모태=복기암 아래에 있는 마을임아삼(牙三, 애삼)=속고실 북쪽에 있는 마을웃모태(웃말)=복기암 위쪽에 있는 마을         대게원조 차유마을     축산면 차유마을은 명실상부한 대게 생산의 원조 마을로 꼽힌다. 고려시대 예주 부사가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차유(次有)’라 불리게 되었으며, 왕건이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안동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서 대게를 맛보고 감탄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대게는 울진에서 감포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히지만, 특히 영덕 앞바다의 차유와 경정리 죽도는 예로부터 진상품 산지로 명성을 얻었다. 영덕에서 잡힌 대게는 몸과 다리가 크고 껍질이 얇아 살이 많기로 유명하다.   ‘대게’라는 이름은 대나무처럼 길고 곧은 여섯 마디의 다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를 한자어로 ‘죽육촌어(竹六寸魚)’라 했다. 늦여름부터 초가을에 허물을 벗는데 한자어로 해(蟹)라 한다. 사람의 손으로 껍질을 벗길 수 있다는 의미다. 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걸그물(통발)을 이용해 어획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먹었던 붉은 게는 당시 역사서에서 ‘자해(紫蟹)’라 불렸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따르면 “조선 7도 71개 고을에서 게가 나며, 자해는 경상 · 강원 · 함경 3도 11곳에서 생산된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자해’가 오늘날의 홍게 또는 대게를 뜻한다.   권근의 『양촌집(陽村集)』에는 “왕건이 안동 하회 근처에서 견훤과 싸울 때 영해 박씨의 도움으로 승리한 뒤, 그 보답으로 영덕 차유마을에 들러 대게를 먹고 그 맛을 찬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대게는 임금께 진상되는 귀한 음식이 되었다.   영덕 앞바다는 수심 200~ 400m, 수온 3℃ 이하, 염분 33~34%로 연중 변화가 거의 없는 대게의 최적 서식지이다. 새우 · 게 · 오징어·문어 등 먹이가 풍부해 생육 환경이 뛰어나며, 대게는 약 10~15년간 자라야 상품성이 높고, 7년이 지나야 산란한다.   속살이 60% 이상 차오른 것을 ‘박달대게’, 그 이하를 ‘물게’라 하며, 홍게는 대게보다 작고 붉은 빛을 띠며 짠맛이 강하다.   차유마을은 이처럼 오랜 세월 왕의 진상품이 태어난 고장, 대게의 본향으로서 동해안 수산문화의 상징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게 어떻게 잡을까?    12월 1일, 축산면 앞바다에는 일제히 대게잡이 배들이 닻을 올린다. 수산업법상 조업은 11월 1일부터 가능하지만, 축산면과 경정리 어민들은 자원 보호를 위해 한 달 동안 대게잡이를 연기해 12월 1일을 ‘대게 첫 조업일’로 정해 지켜왔다. 과거에는 8명의 선원이 돛단배를 타고 면사나 견사로 직접 짠 자망(刺網, 걸그물)을 이용해 대게를 잡았다. 선원 각자가 손수 그물을 만들어 공동조업을 했으며, 어획물은 선주의 몫을 일정 부분 떼고 그물 주인이 나눠 갖는 방식이었다.   1980년대 들어 나일론 그물이 보급되고 어선이 현대화되며 어선의 수가 많아지면서, 조업은 점차 가족 단위 어업으로 전환됐다. 대게를 잡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축산항에서 서쪽으로 약 30분 거리의 대게어장에서 어민들은 어장 표식용 부이를 띄우고, 길이 약 1000미터의 그물을 수심 200미터 아래로 내린다.   그물 아래에는 납을 달아 물속에서 반듯하게 펴지게 하고, 그 사이를 지나던 대게가 걸려든다. 그물은 약 20일 후에 걷어 올리며, 자동 양만기를 이용해 배 위로 끌어올린다.   한 사람은 그물을 당기고, 다른 사람은 자를 들고 대게의 갑각 길이를 재어 9cm 이하의 개체는 바다로 던져 넣는다.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치어는 잡지 않는다. 그물에 걸린 대게는 다리가 부러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떼어 내며, 하루 평균 200마리 안팎을 수확한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겨울, 차가운 바다 위에서 시작되는 이 첫 조업은 단순한 어로행위가 아닌, 축산면 어민들의 땀과 전통이 살아 있는 겨울바다의 의식(儀式)이다.      차유어촌체험마을   경정2리에 자리한 차유어촌체험마을은 ‘푸른 대게의 길’로 불리는 블루로드 구간과 맞닿은 아름다운 해변 마을이다. 대게 원조비가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마을 입구의 커다란 붉은 대게 모형이 방문객을 맞는다.    마을에는 8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며, 포구 한켠에 자리한 정자가 바다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이곳은 어촌체험마을로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여름철 대표 체험은 갯바위에서 즐기는 고동 · 따개비 채취로, 발목을 적시는 동해의 맑은 물결 속에서 고동과 따개비를 따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은 칼과 소쿠리를 가지고 갯바위에 붙은 고동과 따개비를 따는 체험은 서해안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체험과 사뭇 다르다. 갯바위 아래 발목까지 동해의 푸른 바닷물이 차올라 쾌적함을 더해준다. 잡은 해산물은 즉석에서 삶아 먹거나 죽으로 즐길 수 있다.   저녁 무렵에는 통발 체험이 진행된다. 정어리 조각을 미끼로 던져 놓은 통발을 다음 날 아침 걷어 올리면 문어나 노래미 같은 어종이 잡히기도 한다. 체험객들은 마을 민박에 하룻밤 머물며 다음 날 아침을 설렘으로 기다리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마을에서 연중 진행하는 풍등 체험도 인기다. 가족들이 함께 등을 만들고 소원을 적어 바다 위 하늘로 띄우며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긴다. 겨울에는 대게 · 오징어잡이 체험이, 사계절 내내는 낚시 체험이 가능하다. 여름에는 도다리, 겨울에는 문어 등 계절마다 다른 어종이 잡혀 다양한 해양체험으로 영덕 바다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고동 따개비 체험, 통발 체험 등 체험프로그램은 대부분 10인 이상 예약제로 운영된다.   차유마을을 지나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코발트빛 바다와 어우러져 달리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길이다. 언덕을 넘으면 새로운 포구와 등대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블루로드에서 내륙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다시 평온한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푸른 바다와 사람의 손길이 함께 살아 있는 곳, 차유어촌체험마을은 영덕의 진정한 해양 정취를 오롯이 품은 체험 명소다.         죽도산   동해안의 천연 방파제이자 지질 명소인 죽도산(竹島山, 높이 78m)은 영덕 축산항 남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산으로 천연 방파제다. 약 1억 년 전의 모래와 진흙, 자갈로 구성된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죽도산은 경북 동해안 지질공원의 대표적인 지질 명소다.   현재는 등대와 전망대가 설치된 공원으로 개발되어, 축산항 일대와 동해안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지이자 영덕 9경에 속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지금의 축산항이 있는 지역 앞 바다에 축산(丑山)이라는 섬이 표시되어 있다. ‘축산(丑山)’이라는 섬이 바다에 떠있다는 것이다.   죽도산은 원래 섬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매립 공사로 육지와 연결되면서, 더 이상 섬이 아닌 육계도(陸繫島)가 되어 죽도산 혹은 죽산이라 부른다.   산의 기반암은 중생대 백악기 퇴적암층으로, 모래와 자갈, 진흙이 층층이 쌓여 형성됐다. 죽도산 주변에는 축산천이 북서쪽에서 흘러들며, 산 전체에는 산대나무 숲과 야생초가 울창하게 자생한다.   죽도산은 삼국시대 이후 왜적 침입의 주요 통로로 여겨져, 국가에서 수군만호(水軍萬戶)를 설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일본은 조선 시대에 죽도산을 전초기지로 삼아 중국과 러시아 침략을 준비하기도 했으며, 이는 산이 가진 역사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영덕군향토사에는 죽도산 북쪽에 절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동쪽 바닷가 중턱에 기와 조각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창포에서 절이 보였다고 하면 바닷가 동쪽이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죽도산에 절이 3개가 있은 것으로 알려진다.    축산도를 읆은 안로생(安魯生)의 사(詞)에는 “땅은 다하니 바다는 크고, 구름이 걷히니 섬들이 드러나누나. 큰 물결 거세게 치솟아 천둥 울리듯 하니, 형세가 눈사태 무너지는 듯. 만 그루의 대 수풀은 연기에 잠겨 고요하며, 일천 돛배들은 비 맞으며 돌아온다”라고 읊었다. 이는 죽도산 주변 경관과 해양 상황의 위엄을 생생히 담은 기록이다.    죽도산은 명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옛날 일본의 한 승려가 우리나라를 방문해 지도상의 명당산마다 사기 말뚝(쇠말뚝은 썩기 때문에)을 박아 인재가 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죽도산(죽산)에서 장군이 올라오다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산의 이름 그대로, 죽도산에는 대나무가 빽빽한 숲을 이루며, 간혹 키 작은 잡목도 보인다. 시누대(失竹)라 불리는 신우대 · 오구대 · 이대가 대부분이며, 울창한 산림 속에는 해국, 산국, 참나리, 섬쑥부쟁이, 칡넝쿨, 쑥, 복숭아나무 등 다양한 희귀식물과 해안 자생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죽도산 정상에는 등대와 전망대가 있어 축산항 일대와 동해안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또한 대소산 봉수대와 주변 지형의 변천, 육계도 형성 과정에 관한 자료가 전시돼 방문객에게 학습과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죽도산은 블루로드 B코스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50km 해안길 도보 여행길에서, 산을 지나며 동해의 일출과 월출을 감상할 수 있다. 축산천 냇거랑 위에 설치된 블루로드 현수교를 건너면, 와우산(66.3m)과 말미산(113.5m) 사이로 죽도산(87m)이 오목한 항구를 내려다본다. 죽도산은 동해로 돌출돼 사람들의 접근이 적어 생태학적으로 잘 보존돼 있다. 산 전체에 울창한 대나무 숲과 야생초가 자생하며, 바닷가에서는 희귀 식물과 해안 자생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자연 환경 덕분에, 죽도산은 동해의 해양생태를 경험할 수 있는 자연 학습과 생태 관광의 명소로 각광받는다. 죽도산은 지질학적 가치, 역사적 의미, 생태적 풍요, 전설과 명당 이야기까지 다양한 층위를 가진 영덕의 대표 명소다. 블루로드를 따라 걷거나 등대 전망대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순간, 수천 년 퇴적암층과 대나무 숲, 동해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과거 섬에서 산으로, 방어 거점에서 관광지로 변모한 죽도산은 오늘날 자연과 역사, 인간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진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죽도 등대    죽도산 해발 78.1m 정상에는 하얀 등대, 죽도 등대가 서 있다. 포항 호미곶과 울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이 등대는,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도 축산항으로 들어오는 어선의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처음 세워졌을 당시에는 포항 장기와 울진 중간에서 북극성처럼 빛났다고 전해진다.   등대는 고려시대 이후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방어선이었으며, 적의 침입이 예상될 때 봉화대 발화산으로 불을 올리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현재의 등대는 높이 23m, 등고 102m에 위치하며, 처음 불을 밝힌 것은 1935년 3월이다.   2011년 5월부터는 죽도산 전망대로 새단장, 기존 항로표지 기능뿐 아니라 동해안과 축산항을 조망할 수 있는 관광 명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등대는 총 7층 규모로, 2층 외곽에는 관망대가, 5층에는 죽도산 전망대가 자리한다. 최고층인 7층에서는 광달거리 19해리의 100섬광이 바다 위를 밝힌다. 전망대까지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쉽게 오를 수 있다. ‘축산항 등대’는 2020년 5월 해양수산부에서 ‘이달의 등대’로 선정되기도 했다.   등대로 오르는 길에는 두 개의 작은 비석이 서 있다. 대나무 숲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이 비석들은 ‘망향대’다. 앞쪽 비석은 세월을 전하고, 뒤쪽 비석은 사연을 들려준다. 기록에 따르면, ‘시조 영의공께서 고향을 바라보시던 곳으로, 철종 무신년 봄에 의령 후손 영해 부사 상교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이곳 일가 진사 고에게 돈을 주어 경술년에 죽도에 세웠으나 풍상에 훼손돼 옛터에 새로 세웠다’ (20 10년 7월 남씨 종친회) 자료를 종합하면, 이 비석은 영양남씨 후손들이 고향과 선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죽도등대와 전망대는 단순한 항로 안내를 넘어, 역사 · 문화적 의미와 아름다운 동해 조망을 함께 품은 명소로, 죽도산 방문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       축산항     축산항은 개항 100년을 넘긴 동해안 최고의 미항으로, 지난 세기 동안 지역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축산항은 최고의 해양 트레킹 명소로 각광받는 블루로드의 주요 거점이자, 영덕군민의 소울푸드인 물가자미의 주산지로, 매년 5월 초에는 물가자미 축제가 열리는 명소이기도 하다.   항구는 태백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봉우리들이 해안까지 이어져 만처럼 쌓인 아름다운 해안선을 이루고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1924년 3월 조성된 축산항은 인근 여러 항에서 들어오는 고기잡이 배들의 집하와 입찰을 총괄하며, 동해고속도로 개통 이후에는 오징어, 문어, 도루묵, 대게 등 주요 어종의 유통과 관광산업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강구항과 더불어 영덕을 대표하는 어항으로, 대게 위판이 열리는 전국 5개 항 중 하나이자, 대게 원조마을과 인접한 최고의 영덕대게 서식지이기도 하다. 축산항 어시장에서 신선한 대게를 직접 구입할 수 있어, 지역 특산물과 관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역사적으로, 축산항은 1930년 축항 공사를 시작해 1933년 준공되었으며, 1971년 12월 21일 국가어항으로 지정되었다. 국가어항 지정 이후, 축산항은 어선의 안전 정박, 어획물 원활한 양륙, 어민의 소득 증대와 지역사회 발전의 기반 조성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에는 물양장(소형 선박 접안 부두) 축조 공사를 완료해 항만 시설을 확충했다.   현재 축산항 시설은 북방파제 395 m(보강 1식, 동방파제 150m, 물양장 995m(보강 1식) 소파(消波) 호안 110m, 준설 27.75m, 친수 시설 1식, 기타 월파 방지공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육상 어항 구역 면적은 3만 1,707㎡에 달한다.   축산항은 자연경관과 풍부한 어업 자원, 현대적 시설을 모두 갖춘 영덕의 대표 미항으로, 관광과 어업,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지역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축산리 천년 느티나무 전설    축산면 축산리에는 수령이 천 년이 넘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마치 수십 개의 팔을 뻗은 듯한 가지가 장관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천년 당산나무’ 또는 ‘당산 할아버지’라 부르며,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신목(神木)으로 여긴다.   아득한 옛날, 축산리 마을은 산도 없고 물도 부족해 늘 가난과 흉년, 질병에 시달렸다. 바다에서 일하던 어부들은 배가 자주 뒤집혔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 역시 매년 흉년으로 고통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떠돌이 스님 한 분이 마을을 찾아와 말했다. “이곳은 생기가 끊긴 땅이오. 하늘 기운을 받아 땅 기운을 뿌리내릴 나무를 심는다면, 마을이 살아날 것이오.”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말에 따라 어귀의 기운 센 자리에 작은 느티나무 묘목을 심었다. 이후 나무는 거침없이 성장하며 마을을 감싸듯 큰 가지를 펼쳤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어부들의 배는 뒤집히지 않고, 병든 자도 줄며, 가뭄도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 아래에 작은 신당과 제단을 만들고,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제’를 올린다. 어르신들은 “신령스러운 나무 아래에서는 함부로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하면 안 된다”고 전한다.   실제로 예전 어떤 사람이 나무 아래에서 술에 취해 큰소리를 지르다가 몸이 마비되어 일어나지 못하다가 제를 지낸 후에야 걸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마을 사람과 외지인 모두 느티나무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이며 합장하는 풍습이 생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폭풍우가 불어도 느티나무 주변만은 안전했고,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축산리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실제로 최근 3월 산불 때도 영덕 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당산나무와 마을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수목으로, 일반적으로 300~500년을 사는 나무가 많으며, 천 년 이상 사는 나무도 적지 않다. 조상들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휴식과 농사 논의, 나랏일을 의논하며, 공동체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했다. 재질이 단단해 연장 손잡이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쓰였으며, 동북아시아 삼국 중에서도 한반도적 문화 정체성을 담고 있다.   2021년 8월 기준, 영덕군 내 느티나무 중 32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으며, 수령은 120~610년, 수고(樹高)는 9.4 ~25.6m, 흉고 둘레는 1~8.5m에 달한다. 지역별로는 지품면 8그루, 영해면 6그루, 강구 · 창수 · 축산면 각 4그루, 남정면 3그루, 영덕읍 2그루, 달산면 1그루 순이다. 보호수 지정일은 1982년 10월 29일이 가장 많으며, 이후 1992~2011년에 걸쳐 추가 지정됐다.   영덕군 보호수 느티나무는 주로 산기슭, 산정, 마을 입구, 촌락 부근에 위치하며, 성황목 · 당산목으로 불린다. 일부는 제를 지내는 산신 · 산주 · 성황당과 연결된 당산목이며, 남정면 부경리와 축산면 기암리의 몇 그루는 풍치목으로서 마을의 방풍 · 방호 효과를 담당한다.   축산면 천년 느티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닌, 마을의 역사와 전설, 생명력과 신령함을 품은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자, 지역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매마을 529년 된 향나무    축산면 경정3리 오매마을은 동해를 끼고 자리한 조용하고 아름다운 어촌이다. 맑은 바닷물과 한적한 분위기로 스노클링과 프리다이빙에 적합하며, 넉넉한 주차 공간과 금강수산 간판을 따라가면 쉽게 방파제에 닿을 수 있다. 마을 곳곳에 벽화가 있어 시골의 정취와 예술적 감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며 조용한 바다와 자연 속에서 힐링할 수 있는 숨은 명소다.   오매마을에는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풍경이 있다. 마을 앞 언덕을 감싼 500년 된 향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해왔으며,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洞祭)가 매년 열리는 장소로 활용된다. 향나무는 축산면 경정3길 32, 경정리 647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향나무가 휘감은 언덕 아래를 자세히 살펴보면, 수억 년의 지질층이 겹겹이 드러나 있어 오묘한 자연의 흔적을 한눈에 만날 수 있다. 마을 앞바다에는 금강산 1만2000봉을 옮겨놓은 듯한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파도 속에서 신비롭게 떠오른다. 향나무는 이 동신당 남동쪽 해식애 위 동신바위를 완전히 뒤덮고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 나무는 안동권씨 선조가 마을을 일군 시기에 바위섬 위에서 저절로 자라났다고 전해진다. 나무의 높이는 약 2m, 굵기는 50cm 정도로 크지 않지만, 가지가 무성하게 퍼져 너비 30m, 높이 10m가 넘는 바위산을 완전히 감쌀 정도다. 오매 향나무는 수백 년 해풍을 맞으며 자라온 동신수(洞神樹)다.   향나무와 관련된 전설도 남아 있다. 나무 옆에서 놀다가 바위에 떨어진 아이가 다치지 않은 반면, 나무의 뿌리나 가지를 꺾는 사람은 벼락을 맞는 등의 피해를 본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한 노인이 뿌리를 꺾어 팔려다 벼락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주민들은 향나무를 함부로 만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 1530년경 마을 개척 당시 안동권씨가 마을 앞 동신바위에 향나무, 대나무, 소나무를 심어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했다. 6 · 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대나무는 모두 소실되고, 향나무와 소나무만 살아남았다. 이렇게 살아남은 향나무는 이후 신목으로 숭상되며 마을 공동체의 상징이 되었다. 1982년 10월 29일, 이 향나무는 진귀희목(珍貴稀木)으로 경북도 보호수 11-4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오매마을 향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닌, 마을의 역사와 신앙, 자연이 어우러진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 주민과 방문객에게 신비로운 존재감을 전하고 있다.        축산면 전설 양반의 횡포     양반과 관련해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1977년 마을에서 채록된 이휘교 · 이규은의 구술을 바탕으로, 1990년 영남대출판부의 『인물전설의 의미와 기능』에 양반과 농부, 양반 행실, 살인한 양반 등의 제목으로 수록됐다.   축산면 번개에서 축산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염장’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중인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했는데, 어느 날 한 양반이 번개에서 축산으로 가기 위해 염장을 지나가게 된다.   마침 점심을 먹고 있던 농부들이 정중히 인사하며 “어르신, 시장하실 텐데 점심 드시고 가세요”라 권했으나, 양반은 화를 내며 농부들을 몽둥이로 마구 두들겨 팼다.   얼마 뒤 그 양반이 다시 지나갔을 때, 농부들은 지난 일을 기억해 못 본 척했다. 그러자 양반은 “이 고얀 놈들 옆에 개가 지나가도 말을 걸 것인데, 양반이 옆에 지나가도 밥을 먹으면서 밥 먹으라 소리를 안 하느냐!”라고 하며 화를 내고는 또 농부들을 두들겨 팼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떤 고운 여자가 어떤 양반집에 고기를 팔러 갔다. 양반은 고기를 사겠다며 여인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러고는 쌀독을 열고, 자신은 쌀독에서 쌀을 퍼낼 수 없으니 여인으로 하여금 대신 쌀을 퍼내게 했다. 여인은 양반이 시키는 대로 독 안에 머리를 박고 쌀을 퍼내고 있었다. 양반은 뒤에서 그 여인을 겁탈했다. 여인이 비명을 질렀으나 머리가 독 안에 박혀 있어 소용없었다. 양반에게 겁탈을 당한 여인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설움을 참아야만 했다.   또 어떤 양반은 집안 종들을 심하게 괴롭히다 결국 살인을 저지른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그 당시 살인은 아주 중한 죄였다. 살해 당한 종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몽둥이를 든 이들은 복수를 위해 양반의 방으로 쳐들어간다. 이에 양반은 미리 진사를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진사는 살인을 저지른 양반을 자신의 집에 숨기고, 자신이 대신 이불을 덮고 방에 누워 있었다. 종들이 몰려와 진사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자, 진사는 마패를 내세워 “마패를 지닌 사람을 때린 역적 놈들을 모두 잡아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힘이 없던 종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염장 마을을 지나는 양반의 난폭함, 여인을 유린한 폭력, 종들의 복수 시도와 권력자의 도피 등은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다. 이 설화들은 권력과 신분제의 현실,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행동과 윤리적 문제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민속 기록이다. 축산면 구비전승을 통해 우리는 옛사람들의 삶과 공동체의 감수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성찰할 점을 마주하게 된다.      당금애기    당금애기는 당금이라는 딸이 추운 겨울에 약초를 구해 계모의 병을 치료했다는 효행담이다. 이 이야기는 2002년 영덕군지와 2015년 축산면지에 수록되어 있지만, 구전 채록 경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옛날,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딸 당금이가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당금이가 세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새엄마를 맞이한다. 새엄마는 어린 당금이를 머슴처럼 부리며, 구박하고 울리기 일쑤였다.   마음씨가 고약했던 계모는 어느 추운 겨울날, 당금이를 불러 “당금아, 내가 오늘따라 생나물이 먹고 싶구나”라며 말했다.   당금이는 계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나물을 캐러 떠났다. 눈이 펑펑 내리는 길을 헤치며 나물을 찾던 중, 당금이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바위 곁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때 이상한 새 한 마리가 울더니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새를 따라간 당금이는 돌문과 대문 세 개가 있는 신비한 장소를 발견한다. 대문을 모두 열자 한 남자가 나타나, 당금이에게 어떻게 그곳을 찾았는지 물었다. 당금이는 새를 따라왔다고 대답하니 그 남자는 잘 왔다고 하면서 이상한 풀을 뜯어 주었다. 당금이는 그 나물을 집으로 가져와 계모에게 달여 먹였다. 그 결과, 계모의 병은 씻은 듯 나았다.   이야기의 중심 모티브는 계모에 대한 무조건적인 효도다. 계모가 어린 당금이를 구박하고 괴롭혔음에도, 당금이는 자라면서도 효성을 다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효행으로 계모가 개과천선했다거나, 당금이와 관계가 좋아졌다는 후일담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금애기에는 이상한 새, 돌문, 대문 세 개, 신비로운 남자 등의 등장인물이 당금이의 효도를 돕는다. 이 설화는 결과와 관계없이 효도의 실천 그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악독한 계모와 착한 전처 소생의 아이’ 이야기는 널리 분포되어 있다. 구박을 받던 아이가 부모의 병을 고치러 길을 떠나는 구조는 우리나라 무가(巫歌) 바리데기와도 상통한다. 당금애기는 단순한 동화적 이야기를 넘어, 효행의 의미와 신비적 요소가 결합된 축산면 설화로 자리 잡고 있다.        대소산 봉수대    영덕 대소산 봉수대(盈德 大所山 烽燧臺)는 축산면에 있는 봉수대다.   1982년 8월 4일 경북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된 이 봉수대는, 영덕 축산포 방면의 상황을 서울 남산까지 전달하던 곳의 하나였다.   대소산 봉수대는 남쪽으로 별반 봉수대, 북쪽으로 평해 후리산 봉수대, 서로 광산 봉수대 → 진보 남각산 봉수대로 이어지며, 정보가 신속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배치되었다.   봉수대의 형태가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 있어 조선시대 통신수단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이 봉수대는 조선 초기의 것으로 영덕 축산포 방면의 변경 통태를 서울 남산까지 알리던 통신시설이다. 산 정상에는 방어벽이 쌓였으며, 성 안에는 직경 11m, 높이 3.5m의 봉돈(烽墩)이 남아 있다. 대소산 봉수대는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당시의 위용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정보 전달 체계도 흥미롭다. 봉수대 간 소요 시간은 약 20분. 대소산 봉수대에서 영덕 축산포 방면의 상황을 서울 남산까지 전달하는 데는 약 9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이용해 신호를 보내던 봉수대는 조선 세종대 이후, 국경이 명확해지면서 약 12km 간격으로 산봉우리마다 설치되어 체계적인 통신망을 형성했다.   현재 대소산 봉수대에 서면 영덕 축산항과 영해면의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일출 명소로도 알려져 있다. 봉수대의 높이와 위치 덕분에 바다와 산을 아우르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기능과 함께, 조선시대 통신과 방어 체계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봉수대는 지방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축산면의 역사와 자연, 군사적 전략이 어우러진 대소산 봉수대는 오늘날에도 그 위용을 자랑하며 방문객에게 조선시대의 통신 문화를 생생하게 전한다.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    축산면 도곡리에 자리한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조선 중기 무신 박의장의 후손들이 터를 잡고 17세기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에서 축산면 도곡리로 이전, 건립한 가옥으로, 2016년 4월 27일 국가민속문화재 제286호로 지정됐다. 대지 1,941㎡(1필지), 건물 4동 규모로 이루어진 이 종택은 17세기 중반에 지어진영덕 지역 뜰집(ㅁ자형 주택) 확산의 대표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무안박씨가 영덕에 정착한 것은 15세기 후반. 이후 영해면에 집단 거주하던 후손들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전투에서 일등공신이 된 무의공 박의장(1555~1615)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축산면 도곡리로 분파했다.   이 종택은 서애 류성룡의 손녀사위이기도 한 박의장의 넷째아들 도와(陶窩) 박선(朴璿)이 큰형 박유(朴瑜)를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하며, 1590년경 터를 잡아 약 50여 년간 건축을 진행해 1644년 완공된 것으로 기록된다.   초창 이후로 크고 작은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원형은 크게 훼손되지 않아 건립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돼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문간채는 1942년 다시 세운 이후 1978년과 1993년 보수됐다.   종택은 남향 배치, 앞쪽으로 ‘내들이’라 불린 들판을 둔 전형적 입지 조건을 갖는다. 진입 순서를 기준으로 대문채, 사랑채와 안채가 연결된 ㅁ자형의 본채, 내삼문(內三門)과 사당(祠堂)으로 구성되며, 각각의 공간은 기능과 위계에 따라 분명히 구분된다.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전형적인 ㅁ자형의 뜰집과는 달리 안채와 면한 안마당의 폭이 5칸으로 매우 넓다.   영덕군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뜰집인 창수면 인량리의 영덕 충효당 종택과 유사한 구성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적 유사성은 영덕 지역의 뜰집 확산 과정을 잘 보여주는 요소로 평가되기도 한다.   17세기 중반에 건립된 이후 큰 훼손 없이 보존되어 오고 있는 만큼, 전체적인 배치나 구성 외에도 창호나 목구조의 세부 기법 등에서 당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목사공종택(牧使公宗宅)    축산면 칠성리에 자리한 목사공종택(牧使公宗宅)은 조선 중기 무신이자 외교관이었던 박홍장(1558~1598)의 살림집이다. 1996년 7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으며, 지역 사족 가옥 가운데 구조와 생활 형태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는 사례로 평가된다.   박홍장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사임(士任), 호는 농아당(聾啞堂)이다. 아버지는 현감 박세렴이고, 어머니는 영양남씨이다. 형은 박의장이다. 박홍장은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1596년(선조 29)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박의장과 함께 구봉서원(九峰書院)에 제향하고 있다.   박홍장은 1570년(선조 3) 축산 칠성리에 이 집을 건립했으며, 이후 1720년(숙종 46)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현재는 정침만 남아 있고, 사당은 소실된 상태다.   종택은 칠성리 뒤편 산을 등지고 남동향으로 자리 잡은 배치 형태를 띤다. 앞으로는 조항천과 들판이 펼쳐져, 풍수적 ‘배산임수형’의 전통 가옥 특징을 충실히 따른 형국이다.   목사공종택은 영덕 지역 종택 가운데에서도 ‘민가형 겹집’의 특징이 뚜렷한 사례로 꼽힌다. 소규모의 민가임에도 남녀의 일상생활 및 가사작업 공간을 분리하되 마루를 통해 가족단란 등 매개공간으로 통합하는 독특한 평면구성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조선 중기 상층 가옥의 공간 위계 · 생활 구조 · 건축 수법을 그대로 반영하여 상류 양반가의 생활문화가 ‘압축 형태’로 구현된 건축물로 평가된다.     영의남공 유허비(英毅南公 遺墟碑)    영의남공 유허비는 영양남씨 시조인 남민(南敏)의 자취를 기리기 위해 영덕군 축산면에 세워진 기념비다. 영의남공(英毅南公)은 당나라에서 신라로 표류해 온 남민을 일컫는 호칭으로, 신라 경덕왕이 그를 예우해 남(南)씨 성을 사성하고 영양현에 식읍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민은 당나라의 안렴사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 길에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됐고, 신라 해안으로 떠밀려와 축산 일대에 표류했다. 이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정착하면서 남씨 가문의 시조가 됐다.   유허비는 그가 표류해 머물렀던 장소이자 첫 정착지로 전해지는 축산면 죽도 인근에 세워졌다. 후손들은 그의 자취를 보존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1798년 유허비를 건립했다. 이 과정에서 영양남씨 문중은 1796년부터 1798년까지 축산 지역을 직접 답사하고 관련 문헌 및 현지 전승을 수집했으며, 이를 정리해 『축산지』라는 문헌을 편찬했다.   『축산지』에는 기문, 통문, 일기류, 유허비 건립 경위 등이 기록돼 있어 유허비의 조성 배경과 절차를 세밀하게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비석이 아닌 가문의 뿌리를 증명하는 1차 사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유허비는 단순한 비석이 아니라 남씨 가문의 뿌리와 역사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유산이다. 후손들은 매년 10월 10일 이곳에서 제향을 올리며 시조의 뜻을 기리는 의례를 이어오고 있다. 1957년에는 대종회에서 묘역 정비와 비석 재건립이 이루어져, 역사적 상징성과 실물 유적의 보존을 강화했다.   영의남공 유허비는 한 인물의 표류와 정착이 한 성씨의 기원이 된 사건을 기념하는 기념물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곧 한 가문의 역사적 출발점이자 영덕 지역에 남은 가장 오래된 ‘표류 기록’이자, 신라 · 당 · 일본을 잇는 국제 교류사의 한 단면을 증언하는 유산으로 평가된다.   영의남공 유허비 유래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산 2번지. 축산항을 마주한 산허리에 남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제각과 유허비가 자리하고 있다. 축산수협 급유탱크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시야가 트이는 지점에서 남씨 시조로 추앙되는 영의남공을 모신 제각과 비석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부터 1200여 년 전 신라 경덕왕 때 축산면 축산항 해안에 파선된 선박의 널쪽을 타고 표류하고 있던 두 사람을 고기잡이를 나갔다 돌아오던 어부들이 발견하고는 배에 건져 올려 축산항으로 데려 왔다. 가까이 가보니 그 위에는 굶주림과 파도에 지쳐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어부들은 그들을 배에 옮겨 싣고 미음과 치료를 베풀어 며칠 만에 회복시켰다.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나, 붓과 먹을 청해 글로 자신의 사연을 남겼다. 글을 모르는 어부들은 마을의 선비를 데려와 이들과 필담을 나누도록 했다. 필담으로 자기네들이 여기에 이렇게 구조돼 오게 된 경위를 알게 되자 이들은 어부들이 자신들의 은인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두 사람은 서로 안고 감격에 목이 메었다.    두 사람은 당나라 사람인 것 같지만 그 언행이 아무래도 보통사람이 아닌 것 같아 이곳으로 표류돼 온 경위를 물었다. 이들은 당나라 사람으로, 아버지는 김충(金忠), 아들은 김석중(金錫中)이라고 밝혔다. 김충은 이미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하던 인물로, 일본에 파견된 안염사(按廉使)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귀환 중 거센 풍랑으로 배가 파선했으며,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부자는 작은 널판 하나에 몸을 의지해 표류하며 살아남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판자를 양보하려 했고, 아들은 아버지를 두고 죽을 수 없다며 매달렸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붙잡은 채 정신을 잃었고, 그 모습이 어부들에 의해 구조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를 들은 어부들은 이는 필시 아들의 효심과 아비의 정에 하늘이 감복, 이 부자를 살렸으리라고 생각, 고을 원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다시 왕에게 상주됐다.   왕은 “남방에서 왔다”는 의미로 성씨 남(南)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또한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주고, 김충에게 영의(英毅)라는 호를 내렸다. 이때 그의 나이는 사십 대 중반이었다고 기록된다. 이로써 남씨 가문이 탄생했고, 이후 본관을 영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원래 이름을 지닌 영양김씨와 선조가 동일했기에, 영양남씨와 영양김씨는 오늘날까지도 같은 시조를 공유하는 동족으로 전해진다.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장군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이곳은 ‘태백산 호랑이’라 불린 항일의병장 신돌석(申乭石, 1878~1908)이 태어난 집터다. 현재 복원된 생가는 경북도 기념물로 지정(1993)돼 있으며, 뒷동산의 대숲과 앞마당의 호랑이 상이 장군의 기개를 상징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가 두 채로 이루어진 이 가옥은 장군의 부친 신석주가 1850년에 지어 살던 집을 바탕으로, 일제가 1940년 불태운 뒤 그 원형을 따라 복원된 건물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一(일)자형 초가로, 사람 인(人)자 형태의 맞배지붕이 특징이다.   도곡리 산 60-1 일대에는 신돌석 유적지가 조성돼 있다. 기념관·사당·야외 기념비군 등으로 구성된 이 공간은 장군의 생애와 항일 의병전쟁의 흔적을 온전히 전한다.   야외에는 ‘의병대장신공유허비’, ‘순국의사신돌석장군기념비’, ‘장산 신돌석 장군 시비’ 등이 세워져 있고, 기념관 내부에는 장군의 흉상과 함께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전시실은 ▲우국 ▲전기의병(1896) 참전 ▲영릉의진 편제표 ▲장호관 전투 ▲울진 우편취급소 공격 ▲영해읍성 점령 등 주제별 패널을 통해 신돌석 장군의 전투 활동과 영릉의진의 전개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의병 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와 생활 유물도 함께 전시돼 있다.   사당은 외삼문, 동재, 서재, 내삼문, 충의사로 구성돼 있다. 충의사에는 신돌석 영정이 있다.   신돌석은 1878년 음력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복디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태호(泰鎬),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돌석’은 어릴 때 불린 아명이다.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던 시기, 나이 19세였던 신돌석은 영해에서 중장군(中將軍)으로 추대돼 남천숲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또 한 번 위기에 처하자, 1906년 4월 6일(음력 3월 13일) 도곡리 자택에서 약 100m 떨어진 주점에 200~30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을 창의하며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나섰다.   ‘영릉’은 영해와 강릉을 아우르는 동해안 거점 지역을 의미하며, 이는 곧 경북과 강원을 잇는 광역 항일전선을 구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의병진은 상원마을 개천가 숲에서 훈련을 시작했고, 고래산 중턱을 군사훈련지로 삼았다.   해방 직후 정리된 ‘창의장명록(倡義將名錄)’에 따르면 영릉의진은 총 61명의 주요 인물로 편제돼 있었으며, 구성원은 평민뿐 아니라 지역 유림과 사족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는 신분 사회가 붕괴하던 격변기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신돌석의 의병부대는 영덕·청송·영양·울진 · 삼척 일대에서 약 2년 6개월 동안 일본군 전진기지를 6차례 공격하며 항일 투쟁의 주축이 됐다. 영해읍성 점령, 울진 우편취급소 공격 등 주요 전과는 기존 유림 중심 의병운동을 전국 민중항쟁으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각지 의병장이 모여 ‘13도창의군’이 결성됐을 때, 신돌석은 영남 의병을 대표하는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 으로 추대됐다. 이는 평민 의병장으로서는 이례적인 위상이었다.    영릉의진의 구성원이 평민이나 하층민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신돌석장군 보다도 신분이 높은 지역 문중 사람들도 함께했다. 사회적 신분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1908년 이후 일본군의 대대적 토벌이 이어지면서 의병 활동은 점차 위축됐다. 결국 의병 해산령이 내려졌고, 상당수 의병은 체포 · 투항 · 산개했다. 신돌석은 활동 무대를 만주로 옮길 준비를 하던 중, 1908년 12월 12일(음력 11월 19일) 상계(上溪)라는 계곡에서 옛 부하와의 다툼 끝에 돌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나이 겨우 29세.   전쟁 중 전사도, 체포도 아닌 예기치 못한 죽음이었기에 ‘태백산 호랑이의 허망한 최후’라는 표현이 남았다.   국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건국훈장 5등급 중 2등급)을 추서했고, 1971년 생가 뒤편에 있던 장군의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자 묘역(131호)으로 이장됐다. 2003년 1월 17일, 신돌석 유적지는 독립운동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오늘도 생가와 유적지는 장군의 정신을 기리고, 의병 투쟁의 역사를 되새기는 교육·기념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김성용 기자 <이 기사는 영덕군 지원을 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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